기독교가 당신을 실망시켰다면
라비 재커라이어스 지음, 권기대 옮김 / 에센티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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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독교가 그대를 실망시켰는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가 돌아섰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공격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타종교에 비해 기독교 신앙에 유난히 이런 사례가 많아 보이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착각일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 시대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바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책은 기독교에 실망한 사람들, 그 때문에 기독교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시도하는 책입니다.

라비 재커라이어스는 "기독교에 실망했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했던 분이 아니거나, 우리가 만든 틀에 맞지 않는다"는 함의가 담겨 있다고 통찰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 실망했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시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며,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그 전지전능하신 신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40).

그래서 이 책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논의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실망했다고 말하는 "그분"이 진짜 누구신지 제대로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의 의미로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에서 갈등이 불거지는 지점은 '자신의 기대'(믿는 것)와 '자신이 겪는 현실'(경험하는 것)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는 누구인가"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잘못된 기대를 안고" 기독교 신앙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비 재커라이어스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로 비춰준 진실에 의하면, "기독교에 실망했어"가 사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의 의미일 수 있으며,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전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기대 또한 잘못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기도와 응답'에 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 그래서 기독교에 실망했어"라고 말하게 되는 갈등이 가장 많이 불거지는 곳이 바로 기도와 응답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초월적이고 전능하시며 사적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시퍼런 칼날이다. 하나님께 정당하게 요구했다고 믿는 것을 주지 않아서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켰다고 느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하거나 믿음을 포기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236).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학교에서 부회장도 맡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친구가 있습니다. 친구는 대학교에 들어가자 마자 기독교 신앙을 버렸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뒤로 온 가족을 불행하게 하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바뀌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했지만, 결국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친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실지도 모르지만 그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듣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며, 적어도 자기 기도에는 응답할 마음이 없어 보이니 이제는 자기가 돌아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실망감에 잘못 접근하면 욥의 친구들처럼 '옳은 말'만 해대는 차가운 잔소리가 될 때가 많습니다. 라비 재커라이어스도 이러한 실망감이 얼마나 지독한 아픔인지 잘 알고 있는 터라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갑니다. 이 책이 다시 논의하는, 예수가 누구인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합니다. 


"당신을 실망시킨 것이 복음서의 에수인가요, 아니면 그의 이름을 걸고 있는 교회인가요?"(145)

이 책은 회의주의자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기독교인이 먼저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실망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교회",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회의주의자들에게 말합니다. "어쩌면 당신을 실망시킨 것은 교회일지 모른다." 그리고 교회를 향해 말합니다. "개인의 믿음을 산산조각 내 책임이 교회, 바로 당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이 책은 사실 "누군가에게 안아줄 곳, 용서받을 곳, 사랑 받을 곳도 주지 않고 내팽개치는 교회"(144)에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은 전혀 교회로 살고 있지 않을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실패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상에 완벽한 교회, 완벽한 성도는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부족함을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느냐, 아니면 그런 부족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혼자 의롭다는 착각 속에 사느냐일 것입니다. 

이것은 회의주의자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신"를 실망시킨 건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을 실망시킨 건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나(교회)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영생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큼이나, 교회(사람)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도 등을 돌리는 것도 크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기독교에 실망한 "당신"이 단순히 경멸을 위한 경멸, 회의를 위한 회의, 거부를 위한 거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진지하게 믿음과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완전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적어도 "라비 재커라이스"의 책을 모두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바라보는 방법,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기독교가 제시하는 답"(교회가 아니라)을 다시 한 번 숙고해보시기를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숙고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살아내는 것'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믿음에서 돌아서는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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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라스 캐슬
저넷 월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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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엔 내가 어렸을 적 절벽에서 스완 다이브를 하고 사막에서 그림을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낭독하던 시절의 엄마로 보였다. ... 그런 엄마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뉴욕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노숙자 중 하나로 보였을 것이다"(14).

심리학은 우리의 성격, 삶의 태도 등이 대부분 어린 시절에 형성되며 그 책임(책임이라기보다 영향력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이 양육자, 그러니까 (대부분의 경우) '부모'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부모에게 어떻게 양육받느냐에 따라 아이의 성격, 삶의 태도 등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하지만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어린 시절의 경험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내 인생의 '키'는 처음부터 내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을 자각하는 순간, 비로소 내 인생의 키가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더 글라스 캐슬>은 유명 칼럼니스트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저자가 자신의 '특별했던' 어린 시절을 고백한 책입니다. 엄마는 "꽃샘추위를 막으려고 목에 누더기를 둘둘 감아 묶고서 쓰레기를 헤집"으며 "먹을 걸 찾느라 정신없는데", 자신은 "진주를 걸치고 파크애버뉴에 살고" 있는 것이 부끄러워, 들통날까 전전긍긍했던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런 게 네 아빠와 나야. 받아들여"(17).

저자 '저넷 월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들 원하는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괴짜라고 부를 사람도 있고, 자유인으로 볼 사람도 있고, 무책임한 부모라고 평가할 사람들도 있을, 그런 삶의 방식을 '평생' 고집한 사람들입니다. 저자의 어린 시절은 그녀의 첫 기억, 그러니까 저자가 세 살 때 혼자 펄펄 끓는 물에 핫도그를 데우다 전신 화상 사고를 당하는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그녀의 엄마는 아이를 위해 요리를 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영원히 남을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빠는 원하면 어떤 일이건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어떤 일이든 오래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고, 해고를 당하거나 미납 고지서가 쌓이면 서슴없이 '도주'를 택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주로 한밤중에 느닷없이 짐을 꾸려서 떠나는 건 우리에겐 일상이었다"(37).

이 아이는 생존에 필요한 짐만 챙겨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는 부모를 따라 사막 한복판에서 별을 보며 잠을 자기도 하고, 공깃돌 크기만 한 빗방울들이 억수처럼 쏟아지는 날에는 세찬 빗속에서 물을 튀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잘랐습니다.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먹을 수 없고 늘 언제 떠날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일상 속에서 아이는 일찍부터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하며 (강제적으로) '강하게' 성장해갑니다.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견디질 못하는 강박증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밤에 긴 산책길에 나서는 걸 여전히 좋아했고, 틈날 대마다 서쪽 강가로 나가 걸었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별을 보긴 힘들었지만, 날이 맑은 밤이면 검은 강과 하늘이 만나는 곳 위에서 변함없이 빛나는 금성을 볼 수 있었다"(443).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저자는 "사는 게 살짝 겁이 나기도 했지만 정말 재미난 건 변함이 없었다"(45)고 고백합니다. 사막 한가운데 으리으리한 유리성을 짓겠다는 꿈을 평생 끌어안고 살았던 아빠는 불안정한 생활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딸에게 '금성'을 남겨주었고, 그런 아버지를 유일하게 견뎌 준 엄마는 그런 아빠와 살며 "지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의미심장한(?) 교훈을 남겨주었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 이 아빠와 엄마가 자녀를 대하는 방식이 "유별나서" 불쾌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것을 "양육"이라고 이름부치기가 망설여지는 일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식대로 자녀를 사랑했다는 생각은 듭니다. 결핍이 가득하고 파괴적인 측면도 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준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책이 그 증거입니다.

잘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잘 안 되는 것이 자녀 양육이고, 완벽하려고 해도 절대 완벽할 수 없는 것이 부모 노릇입니다. 어쩔 땐 잘하려는 노력이, 완벽하려는 욕심이 자녀를 더 망치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자는 완벽하려는 노력대신 그저 온전히 "미성숙한" 자기로 살며  부모 덕분에 그녀가 부모보다 더 성숙해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를 보며 생각합니다. 이것은 "받아들여야 할" 문제인지도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부모를, 가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고민과 함께, 어쩌면 그것이 해답이 아닐까 하는 힌트도 함께 던져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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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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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거짓말을 해줘!
더 중요할수록,
더 널리 퍼질수록
더 큰 비밀을 알려줄 테니까 …." 

도망치듯 '베인'이라는 외딴 섬으로 이주해온 선더리 목사의 가족. 그의 딸 페이스는 목사이자 저명한 자연과학자로서 아버지의 평판에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음을 눈치챈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돕고 싶었으나, 처음으로 아버지를 도왔다고 생각했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아버지의 죽음이 자살이라고 확신한 어머니(머틀)는 어떻게든 남편의 죽음을 사고사로 처리하기 위해 애쓰지만, 페이스는 아버지가 살해 당했음을 직감한다. 그 권총, 자정까지 집에 돌아와야 한다고 서두르던 아버지, 그 신비로운 식물을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누구를 두려워한 것일까? 아버지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페이스는 아버지가 숨겨 왔던 거대한 비밀과 마주하게 되고, 환상 같은 거짓과 진실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발견하게 된 거대한 비밀은 거짓말을 먹고 비밀을 토해내는 나무,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관한 것이다. 이 나무는 거짓말을 '먹을 때'만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는 그것을 먹은 사람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지식을 가르쳐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 나무에게 거짓말을 먹이는 방법은 나무에 대고 거짓말을 속삭이고 나서 그 거짓말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거짓말의 중요한 것일수록, 그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 큰 열매가 맺힌다(223-224). 

지식을 갈구하는 사람일수록 한 입만 먹으면 아무도 갖지 못한 비밀(지식)을 토해내는 이 나무에 큰 유혹을 받았다. 페이스의 아버지 선더리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알고 싶은 창조에 관한 진실. 선더리 목사는 그 비밀을 알기 위해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거짓말을 먹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자신이 먹은 거짓과 관련된 지식(비밀)을 토해낸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니까 창조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으면 창조에 관한 거짓말을 퍼뜨려야 하는 것이다. 알고 싶은 진실과 관련된 거짓말을 먹이기 위해 선더리 목사는 자신을 파멸시킬 거짓말을 속삭이기 시작한다. 

"거짓말 나무는 가장 큰 비밀이자 보물이자 파멸의 원인이 된다"(245).

아버지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먹는 나무에 거짓말을 먹이기 시작하는 페이스는 거짓말의 속성, 즉 거짓말을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 거짓말을 골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짓말은 일부만 제공해도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며 커져간다는 것, 몇 개의 암시를 던지고 침묵하면 거짓말은 쑥쑥자라 새로운 형태를 갖춰간다는 것 등을 깨달으며,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말의 불길 속에 자신을 내던진다. 

맹수의 이빨처럼 사람들을 물어뜯는 거짓말의 노골적인 공포가 이 책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압도한다. "거짓말은 불과 같다는 걸 페이슨 알게 됐다. 처음에는 보살피고 연료도 줘야 하지만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 살짝 바람을 부쳐주면 이제 막 피어오른 불길이 커지겠지만 너무 세게 부치면 꺼져버릴 것이다. 어떤 거짓말들은 처음부터 기세 좋게 퍼지면서 신나게 타닥거리며 타올라 더 이상 연료를 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더 이상 내가 처음에 퍼뜨린 거짓말이 아니게 된다. 그 거짓말은 나름의 생명력과 형태를 가지고 홀로 커져가면서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366). 

거짓말을 먹는 나무를 통해 폭노되는 거짓말의 속성만큼이나 이 책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읽는 재미를 주는 것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관한 고발이다. 페이스는 "소녀들이 품어서는 안 되는 갈망"에 저항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14살짜리 소녀는 눈에 환히 보이는 곳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존재일 뿐이며, 가만히 있어도 성가신 그 무엇이 되고 만다. "네가 아들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족의 재산을 늘려서 그 은혜에 보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딸은 절대로 그러지 못해. 넌 절대로 명예롭게 군대에 복무할 수도 없고, 과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성직이나 의회에서 명성을 얻을 수도 없고. 일을 해서 잘 살 수도 없어. 어차피 넌 평생 내 지갑을 털어가는 짐밖에 안 돼. 네가 결혼한다고 해도 지참금 때문에 우리 집 재산이 크게 축날 거다"(147).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는 여자들의 전쟁을 교묘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여긴 전쟁터야, 페이스! 남자들만 전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마찬가지야. 세상은 우리에게 무기도 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고 하지. 하지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이대로 죽게 될 거야"(434).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창조와 진화의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얼핏 보면 진화의 승리로 분위기를 몰아가지만, 과학 아래 숨은 편견과 무지도 함께 폭노하고 있다. "두개골이 클수록 뇌도 더 크고 지능도 높지. 남자와 여자의 두개골 크기 차이만 봐도 알 수 있어요. 남자 두개골이 더 커서 지능의 왕이란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86). "과학이 그녀를 배신했다"(86). "페이스가 자연과학 연구를 계속하면 여지이기 때문에 아마 평생 동안 남자들에게 조롱당하고, 비하되고, 무시를 받고, 하대를 당할 것이다"(539).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신앙과 과학, 거짓과 진실, 이성과 미신, 논리와 환상, 편견과 차별이 섬세한 대칭을 이루는 다양한 색실이 되어 한땀 한땀 수를 놓듯이 정교하게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해간다. '거짓말을 먹는 나무'라는 소재는 냉정하고 분석적인 추리와 맞물리며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새로운 분위기의 스릴러를 완성해낸다. 작가의 필력이 잘된 번역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나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뱀과 여자와 선/악과처럼, 뱀과 여자와 거짓을 먹고 진실을 토해내는 나무는 신화적(환상적)인 분위기를 재현하고, 신비로운 식물을 둘러싼 비밀과 음모는 '인디아나존스' 스타일의 모험을 만들어내고, 창조와 진화의 긴장, 여성과 왼손잡이에 대한 차별을 고발하는 장면들은 한편의 극사실주의적인 역사소설과 같고, 그 와중에 작은 희망처럼 피어나는 가족애와 우정은 카타르시스적인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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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 - 명화와 함께하는 달콤쌉싸름한 그리스신화 명강의!
천시후이 지음, 정호운 옮김 / 올댓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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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달빛은 유난히 아름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 속에 온갖 신과 설화가 있고 땅 위의 풀 한 포기, 이슬 한 방울까지도 어떤 요정의 풋풋한 감성을 담고 있으며 또한 달을 관장하는 신은 매우 아름답고 고상한 여신이기 때문이다"(9).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탐했던 아이였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가슴에 담겼고, 어떤 이야기들은 기억에 담겼고, 어떤 이야기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따라 함께 떠내려가버렸지만, 가슴 한 가운데 콕 박힌 보석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쟁의 신 '아레스'에 관한 그리스신화입니다. 만화책이었고, 급하게 읽은 탓인지 제목도 전체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전쟁의 신, 아레스'라는 남자 주인공 이름은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가 짊어져야 했던 운명의 무게가 제 가슴에도 낙인을 남기듯 말입니다. 전쟁의 신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짊어진 채, 사랑하는 여인을 뒤로 하고 황량한 바람 속으로 사라져가던, 긴 창을 들고 말을 타고 떠나가던 그 쓸쓸한 장면 하나가 정지된 화면처럼, 남자 주인공의 전형처럼 그렇게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그리스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걸 안 건 한참 후의 일입니다.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은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냅니다. "그런데 매우 모순되면서도 흥미로운 점은 이토록 잔인하고 난폭하며 지혜의 큰 적이자 인간에게 더없이 무자비한 아레스가 글쎄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베누스, 영어 이름 비너스)의 애인이었다는 점이다. 아레스는 자주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의 품에서 평온과 안정을 찾았는데, 둘의 스캔들은 훗날 수많은 막장드라마의 원형이 되었다"(103). (지금 생각해보니, 늘 그랬던 것처럼 이 둘의 비극적 운명이 한 만화작가에게도 영감을 주었었나 봅니다.)

중국의 한 대학교에서 명강의로 손꼽히는 내용을 책으로 담아낸,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은 그리스신화의 원형을 있는 그대로 들려주지 않고, 현대적인 시각에서 재해석을 시도했습니다. '전쟁의 신, 아레스'의 운명을 놓고도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여자는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속설이 정말 사실이었던가?"(103) 하고 말입니다. "전쟁의 신은 직업이 '살인'이고, "사랑의 신은 직업이 '방화'니까 이 둘은 거의 비슷한 업종"이라는 유머(?)도 섞어서 말입니다. 

일면 장난스러운 면도 있지만 장난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이런 진지한 해석도 덧붙입니다. "전쟁의 신은 오직 사랑의 신의 품안에서만 평온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일부 신화학자들의 해석은 꽤 그럴듯하다. "이 전설은 아마도 폭풍우가 지나간 후에 더 아름답고 찬란한 봄날이 다가오고 대지에 생기가 흘러넘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생겨났을 것이다. 아레스가 분노를 가라앉힌 후 모든 생명처럼 사랑의 신이 발산하는 강력한 매력에 빠지게 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신화에서는 사랑 자체가 충돌과 유혈사태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103-105).

위에 인용한 '전쟁의 신, 아레스'의 이야기는 이 책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줍니다. 그리스신화의 원형과 현대적 해석, 그리고 유머와 통찰이 흥미롭게 녹아들며 인류가 간직해온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자는 "그리스신화는 신이 인간 세상에 함께했던 시절의 이야기다"(9)라고 정의합니다. 그리스신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이 인간과 매우 닮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고, 남녀 성별이 있으며,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과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정해진 운명과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등이 말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종교성과 천상의 위엄은 훨씬 약하지만 대신 삶의 재미와 인문학적인 정신을 더 많이 담고 있다. 그들은 세속적이고 발랄하며 낭만적이고 활기 넘친다"(8). 신이지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며 허영을 좋아하고 향락을 즐"기며, "고상한 품격을 지키는 경우가 아주 적다"(13)는 것이 그리스신화에서 만나볼 수 있는 신들의 매력이며, 이 책이 보여주는 그리스신화의 매력입니다. 

이것도 선입견이고 편견일지 모르겠는데, 중국인들이 집필한 책을 읽을 때마다 그들이 공부하는 방식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방대한 이야기를 참 호방하게 훑으며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리스신화를 처음 읽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는 그리스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정리되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사실  '시시포스' 신화처럼 그 부분만 따로 떼어내며 들으면 엄청난 영감을 주는 이야기도, 그리스신화라는 전체적인 이야기 속에서 보면 다들 너무 '제멋대로' 생성된 이야기처럼 '막' 돌아다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신이 인간과 함께한 시절>에는 명화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 속에서 명화는 이야기를 '거들 뿐'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하고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강의 주인공이기도 한 저자는 카를 야스퍼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무리합니다. "개체적 자아의 모든 위대한 성장은 고전 세계를 다시 접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세계가 잊힐 때마다 늘 야만적인 상태가 다시 나타났다"(483). 어쩌다 인간은 '신'이라는 관념을 갖게 된 것일까요? 우리 삶의 뿌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한 채, 어떤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무슨 이유로 야스퍼스는 고전 세계가 잊힐 때마다 야만적인 상태가 다시 나타났다고 단언한 것일까요? 고전 세계가 남긴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삶에 던져주는 영감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가진 독자, 이런 질문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세월 속에서도 오랫동안 인류가 소중하게 간직해온 이야기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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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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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없었다면,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해진 충격적인 전파가 없었다면 레티시아 페레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알지 못했던 수천만의 사람들이 그녀가 실종되는 순간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텔레비전, 라디오, 언론, 인터넷은 부재하기에 현존하고 죽었기에 살아 있는 모순적인 인물을 만들어냈다"(108).

2011년 납치되어 살해된 18세 프랑스 소녀. 우리가 이제 와서 그 소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녀를 알지 못했던 우리가 이제와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소녀의 이름과 그 삶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레티시아>는 "2011년 1월 18일 밤에서 19일 사이에 납치"되어 잔인하게 살해 당한 한 소녀의 삶과 죽음을 복원한 '르포'(기록문학)입니다. 역사학자이며 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단순히 '희생자'로 기억될 '레티시아'라는 한 존재를 우리 안에 생생하게 복원해내었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그녀의 본모습과 존엄성과 자유를 그녀에게 되돌려주는"(9) 일이라고 단언합니다. 

<레티시아>는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 톱뉴스가 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한 소녀의 실종 사건'이 어떻게 언론과 정치에 의해 철저히 소비되며 국가적 사건으로 확대되어 갔는지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레티시아의 경우는 스토리텔링이 기가 막히게 용이했다. '괴물'의 손아귀에 떨어진 '천사', '미치광이'에 의해 살해된 '순결한 소녀', 기분 나쁜 커플로 묶인 두 인물의 -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 관계도에서 희생자와 살인자는 죽음 속 단짝이 된다. 소녀의 실종과 발견되지 않은 시신을 둘러싼 서스펜스, 사건의 재빠른 정치화, 비탄에 빠진 가족들 …. 이만하면 소비될 준비가 된 이야기다"(129). 어쩌면 이 책도 결국은 그녀의 이야기를 소비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레티시아>는 그보다 훨씬 큰 것, 보다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를 고발하고 통찰합니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레티시아는 과잉 살해를 당했다"(429).
<레티시아>는 폭력적인 친아버지와 "애정의 대가로 강간을 거래"한 위탁가정의 양부에게 한 소녀가 어떤 학대를 당하며 어떻게 파되되어 왔는지, 그리고 결국 그러한 폭력이 또다시 어떻게 잔혹한 죽음이라는 폭력으로 이어지며 그녀의 죽음을 사회적 구경거리로 전락시켰는지를 밀도 있게 보여줍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 범죄자들에 대한 감시, 형벌 정책의 문제점 등이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레티시아 살해는 '여성으로서 죽임을 당한' 여성 혐오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레티시아가 세 살일 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를 폭행했다. 그다음 양부가 그녀의 언니를 성추행했으며, 그녀 자신도 18년밖에 살지 못했다. 이러한 드라마는 여성들이 모욕당하고 학대받고 구타당하고 강간당하고 살해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여성들이 완벽하게 권리를 가진 존재들이 아닌 세상, 희생자들이 역정과 구타에 체념과 침묵으로 답하는 세상, 언제나 같은 사람들만 죽어 나오는 출구 없는 방"(10). 스마트폰의 혁신적인 기술말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체념과 침묵말고 무자비한 폭력에 더 나은 방법으로 저항할 수 있는 비폭력적 방법은 없을까요? 언제나 같은 사람들만 죽어나오는 출구 없는 방에 작은 탈출구라도 만들 수 있는 길은 정녕 없을까요? 일단 <레티시아> 같은 작업이 그 한 방안이요, 시도라는 것에 작은 희망이라도 품어봅니다.  

"살자, 저항하자, 사랑하자"(483).
책을 읽어보면, 왜 이 책이 르포 문학의 진수이며, 문학 장르가 아니면서도 어떻게 메디치상과 르몽드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는지 납득이 갑니다. 사실 이 책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기보다, 여성학이나 여성문제를 다루는 대학, 대학원 수업의 '읽기과제', '토론과제' 도서로 활용될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역사학자가 파헤친 '진실'이 수업적 용도로만 소비되지 않고, 이 사회, 그리고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기를 바래봅니다. 범죄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되지 않는 한 비극의 추상 수준을 낮추지 못하는 우리에게, 모든 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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