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길 위를 걷다 - 오늘 만나는 종교개혁 영성의 현장
김성영 외 지음 / 두란노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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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된 교회도 지금 개혁되어야 한다"(31).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전절'이라는 이스라엘 절기를 지키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수전절은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신구약중간기인)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성전에 제우스 동상을 세우는 등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뿌리째 흔들려 하자, 쇠망치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 마카비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마카비 혁명이라 하고, 이 마카비 혁명으로 수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더렵혀진 성전을 정결케 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수전절입니다. 그런데 마카비 혁명으로 성전을 정화한지 2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성전은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정화 작업을 필요로 할 만큼 극도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수전절에 바로 그 성전을 거닐고 계셨습니다. 수전절 날,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성전을 거닐며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종교개혁 길 위를 걷다>는 자꾸만 수전절에 성전을 거니시는 예수님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지금 한국 교회는 다시 한 번 제2의 종교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7년,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들을 벌였습니다. 이 책의 발간도 그런 사업 중의 하나입니다.

<종교개혁 길 위를 걷다>는 "2016년 5월부터 2017년 6월까지 1년간 '영성의 현장을 찾아서'란 제목으로 5부작 55회에 결쳐" 국민일보에 연재된 "종교개혁 500주년 시리즈"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발상지인 독일과 스위스, 프랑스와 영국, 미국과 한국 땅 곳곳을 방문해 역사의 현장을 추적하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끼쳤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독일에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한반도까지 전해졌는지, 그리고 이 한국 땅에서 어떻게 개혁 정신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는지 그 현장"을 생생하게 돌아보았습니다(10).

그러나 개혁과 부흥의 현장을 차분하게 걸으며 우리가 가진 신앙의 저력, 신앙의 유산을 돌아보는 이 시간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해야겠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지금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표어가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겨버리시고야 말 것 같은은 한국 교회의 위기를 더 생생하게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치던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말은 오늘의 교회 개혁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88). 

개인적으로 저에게 2017년은 다음세대를 세워가는 교회를 꿈꾸며 교회 개척을 시작한 첫 해입니다. 교회 개척을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소원했던 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세대와 함께 종교개혁 현장으로 비전트립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세대와 함께 종교개혁 현장을 돌아보며 종교개혁의 시대정신을 가르치고 우리가 가진 신앙의 유산을 깨우치며, 죽어가는 영혼을, 시대적인 사명을, 그렇게 우리 가운데 임하여 계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품기 원했습니다. <종교개혁 길 위를 걷다>를 읽으며 그 소원이 더 불타올랐습니다. 이 책의 인도대로 발자취를 따라가며 이 책의 교훈을 다시 다음세대에게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길 위를 걷다>는 종교개혁이 시작된 독일에서 시작하여, 유럽과 영국, 미국을 돌아 다시 한국땅으로 옵니다. 한반도의 복음화와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던 그 영광스러운 발자취에는, '오늘날' 교회는 물론 사회로부터도 지탄의 손가락질을 받는 사랑의교회, 여의도순복음교회, 명성교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종교개혁 길 위를 걷다>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돌아갈 '표준'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이 책이 다시 전하여준 종교개혁의 유산과 함께, "이 땅의 부흥과 회복은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리" 노래하며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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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 사건 : 3월, 4월 편 노재명 성경사건 대기록 2
노재명 지음 / 가나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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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 사건, 매일 한 사건씩 큐티!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매일 경험하는 요즘입니다. 이처럼 날마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싶은 갈망을 가진 분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이 바로 이 책, <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사건>입니다. <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사건>은 일석이조, 삼조, 사조, 오조의 책입니다. 

첫째로, 성경의 사건을 날짜별로 재구성해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사건> 중 두 번째 책으로 3월과 4월에 일어난 성경사건을 날짜별로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3월 1일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45일 만에 시내광야에 도착"한 날이며, "에스겔 선지자에게 계시가 임한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월과 4월은 절기상으로 유월절(무교절)과 초실절이 기간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달이라, 이번 책은 절기 풍습과 함께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부활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책은 이스라엘의 월력, 절기, 지리, 풍습 등에 성경의 배경적 지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우리 시대의 개념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일어난 시대와 공간 그리고 사회 문화적 배경을 이해"(4)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그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연구해보고 싶은 성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어 줍니다.

셋째로, 매일 성경의 한 사건씩 큐티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하루에 한 사건씩 읽어나가며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할 수 있어 부담이 없고, 매일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넷째로, 많은 성도가 오해하고 있는 성경 지식을 바로잡아줍니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흥미로운 지식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 요한이 보냄을 받은 "광야"가 우리가 생각하는 광야와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리적 광야의 의미와 유대인에게 있어서의 광야의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세례 요한이 외쳤던 유대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광야의 의미가 아니라 신앙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기도하며 말씀을 기록하던 쿰란공동체가 있던 곳, 목동들이 자신들의 삶을 이어나가는 생활공간,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유대종교의 신앙인들이 천양하며 지나가는 곳"(58)이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보냄받은 광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광야와 정반대의 곳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빈들, 광야, 사막이 막연한 느낌을 주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로 향하는 길목이요, 그와는 반대로 새로운 신앙을 찾아 빛의 아들을 갈망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필사하는 삶을 살았던 쿰란공동체의 신앙의 학습장이요, 양, 염소를 치며 삶을 살았던 삶의 현장입니다"(61). 이 책은 이와 같이 "나의 가장 소중한 것, 우순순위를 둔 곳이 유대광야"(63)라는 사실을 통해 성도가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볼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다섯째로, 흥미로운 신학적 연구 과제들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가장 재밌었던 도전 과제는, 가룟 유다가 죽은 것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 전인가, 후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저자는 누가복음 24장 9절과 33절 말씀,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26절 말씀을 비교해보면 "가룟 유다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을 찾아오신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합니다(258).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이고, 이 말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까지 살아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누가복음 24장 9절에서 말하는 '헨데카'(열 하나)는 '가룟 유다'가 빠진 '사도들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일까요? 아니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살아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도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을까요? 저자는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도전합니다(254-260). 

성경에 바른 이해는 '지식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문제이며, 여기에 우리의 영생, 즉 영원한 운명이 걸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사건>은 초실절부터 칠철절 사이 기간의 추수 풍습을 통해  신천지의 주장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밝힙니다. 성경에 관한 잘못된 지식 하나가 전혀 다른 신앙, 전혀 다른 길로 우리를 끌고 갈 수도 있습니다. 

<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사건>은 성경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말씀의 은혜가 있는 책입니다. 다만, 신학적 해석에 있어서 고개가 갸윳거려지는 부분도 좀 있다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예를 들면, 저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온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헤롯 안디바스가 한 일에 간섭"했다가 "옥에 갇히고 결국 죽게 된"을 두고, "세례 요한이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91)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해 요한복음 3장 29절을 근거로 이런 풀이를 내어놓습니다. "사명을 받았고 사명은 깨달았으나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고 못했던 것은 친구이기에 앞서 신부였던 자신의 신분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91) 저자의 이런 해석에는 반론도 많이 따를 것으로 보입니다. (오탈자가 다소 많은 것도 아쉬운 점 중에 하나입니다.) <날짜별로 본 오늘의 성경사건>은 이 책이 제시하는 해석을 '정답'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성경연구를 위한 '좋은 자료'로 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적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성도들이 읽을 때 더 유익하고 더 잘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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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가 알고 싶다 - 다시 배우는 십일조, 축복의 통로인가 다른 복음인가 알고 싶다
윤상원 지음 / 넥서스CROSS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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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도 모세율법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교회에는 '십일조'라는 이름의 헌금이 존재하고, 저 또한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한 이후, 줄곧 수입의 십일조를 드려온 신자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나름 온전한 십일조를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십일조가 알고 싶다>는 아무런 고민 없이(?)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이든, 십일조 헌금에 대해 의구심이나 거부감을 가진 신자이든 모두가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많은 성도가 수입의 10분의 1이나(!) 드려야 하는 십일조에 부담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신학적으로도 모세율법의 십일조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목소리를 높이는 이 때에, 십일조뿐 아니라 성도의 헌금 생활과 교회의 헌금 사용에 관해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적 도전을 던져주는 강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가 알고 싶다>는 모세율법의 '십일조'를 강제적인 의무로 강요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십일조로부터의 해방을 노래하는 책도 아닙니다. 소득의 10분의 1을 반드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십일조 엄수주의'도 반대하지만, '십일조 폐지론'에도 찬성하지 않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십일조가 알고 싶다>는 먼저 십일조 엄수주의의 오류가 무엇인지를 밝히며, 십일조 폐지론의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합니다.

교회 안에서 헌금 생활을 가르쳐야 하는 목회자들은 신학자들과의 깊이 있는 토론을 통해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의미와 원리를 다시 숙고하며 신학적으로 입장 정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이 책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십일조 문제는 내 소득의 몇 %를 드려야 하는가, 드려야 하는가, 안 드려도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고백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신약교회는 '내 소유의 소유권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립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십일조 헌금을 드립니다"(130). 사실 십일조뿐 아니라, 모든 헌금이 신앙고백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십일조 정신'입니다. 다음은 제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저자의 선포입니다. "옛 언약의 시대에 이스라엘 나라는 '탐욕'이 통치하는 가나안 땅 한복판에서 자선을 베풀어 '거룩한 백성'의 소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3년마다 드리는 '자선의 십일조'였습니다. ... '탐욕'으로 가난한 자가 발생하였고, 그 탐욕은 가난한 자를 억압했습니다. 이 탐욕이 가나안 땅을 지배하는 원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자선은 탐욕이 만들어놓은 세상질서를 바르게 회복하는 원리였습니다. ...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 한복판에서 자선을 행할 때, 그것은 탐욕이 세워놓은 가나안 땅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그만큼 하나님 나라와 그 통치를 현시하는 것이었습니다"(142-143).

<십일조가 알고 싶다>는 '십일조'에 대한 논쟁적 이슈를 잘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논쟁적 이슈에 대한 이 책의 입장이 단 하나의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읽어볼 만한 책이며, 무엇보다 현대 교회가 배워야 할 헌금의 사용 원리에 관해 중요한 성경적 인사이트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데 의의와 가치를 두고 싶습니다. 구약의 모세율법의 십일조이든, 신약의 자발적인 자유에 의한 십일조이든 성도의 십일조 생활은 "맘몬이 지배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149)이라는 선언이며 고백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를 이 승리의 외침 가운데 다시 불러모으기 위해서는 '헌금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헌금의 개혁은 헌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목회 일선에 이런 문제를 놓고 정직하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목회자가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와 소망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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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알고 싶다 - 다시 읽는 요셉,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 알고 싶다
노진준 지음 / 넥서스CROSS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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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교회가 가장 많이 오해하고, 가장 잘못 읽었던 이야기가 요셉과 다니엘의 이야기였습니다"(6).

돌잔치에 가보면, 아이를 축복하기 위해 말씀뽑기를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이왕이면 요셉이나 다니엘과 관련된 말씀을 뽑기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강대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두 인물처럼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요셉의 이야기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잘 섬기며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결국 높여주신다는 이야기로 풀어집니다. "인생은 한 방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요셉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힐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알고 싶다>는 우리가 요셉을 오해해도 "너무"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노예로 밑바닥 인생을 살던 요셉이 하나님을 잘 섬기며 진실하게 인내하며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김이 수단이고, 총리로의 출세가 목표"(100)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세상에서의 출세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알고 싶다>는 "언제부터 교회가 형통을 물리적 축복이나, 편안하고 안락한 삶으로 읽기 시작했는지 모르겠"(52)고 한탄합니다. 요셉의 형통을 이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요셉에 관해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요셉이 알고 싶다>는 요셉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 요셉이 꾸었던 꿈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요셉의 형통에 대해서, 요셉이 받은 유혹의 실체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요셉 이야기의 절정은 요셉이 총리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그 가족들이 애굽으로 가게 되었다는 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요셉의 성공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입니다"(53).

<요셉이 알고 싶다>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요셉 이야기를 다시 읽어냅니다. 요셉 이야기의 초점은 요셉이 어떻게 고난 중에서 애굽의 총리까지 될 수 있었는가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요셉을 통해 성취되는가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요셉의 생애의 결론은 그가 총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골이 가나안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129).

요셉의 꿈은 요셉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었으며, 요셉의 형통은 "복을 받는 삶이 아니라, 복이 되는 삶"(55)에 있으며, 요셉이 받은 유혹은 "거룩과 성경을 위해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야 했던 사건"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선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음을 다시 이야기합니다(64-65).

<요셉이 알고 싶다>는 한 편의 견고한 설교로 읽힙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날카로우며, 한 문장 한 문장이 진실하고 애통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많은 설교를 읽고 들었지만 이분처럼 성경 말씀을 전하고 싶다(설교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습니다. 정말 흥미롭게 읽었고, 요셉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뻔뻔한 죄인인가를 사무치게 깨달으며, 우리 신앙의 초점이, 우리 삶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점검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노진준' 목사님의 책을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 대로 더 많은 메시지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요셉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다시 읽기를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노진준 목사님은 요셉 이야기의 궁극적인 의미는 "세상에서의 출세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수단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데 있다"고 말하며, "문제는 현대 교회가 이 소명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도전합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한 번 이 도전 앞에 서기를, 이 메시지가 들려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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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리 종활 사진관
아시자와 요 지음, 이영미 옮김 / 엘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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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칠 종' 자에 '활동' 할 때 '활'을 붙여서 '종활'이에요. 인생을 아쉬움 없이 마무리할 수 있도록, 예를 들면 유산 상속과 관련된 확실한 유언장을 마련한다거나 묘지를 준비한다거나 원하는 장례식에 관해 가족에게 의견을 전해두기도 하죠. 그중에, 조금 전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생전사진이라고 부르는데, 자기 영정사진을 살아 있는 동안 찍어두는 활동도 포함돼요"(174).

우린 언젠가 모두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지금의 삶과 작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끝이 난다는 것은 알고 있지요. 아무리 완벽하고 아름답게 준비를 한다 해도 아쉬움은 남겠지만, 그 작별의 시간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요? 누군가는 유서를 남기기도 하고 재산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영정사진과 수의를 준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부탁으로 수의와 영정사진을 준비하실 때 많이 우셨습니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는 할머니의 말도, 그래야 더 오래 사신다는 풍습도, 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도 아버지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했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건 모두가 알았습니다. 

<아마리 종활 사진관>은 영정사진 전문 사진관입니다. '종활', 그러니까 인생을 마무리 짓기 위한 활동의 하나로, 돌아가신 후에 영정으로 쓸 사진을 찾기 위해 허둥지둥하지 않도록, 고인을 기억하게 될 마지막 모습, 생전의 가장 그 '답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남기는 곳입니다.


"아마리가 찍는 사진에는 이야기가 있었다"(128).

<아마리 종활 사진관>은 <첫 번째 유언장>, <십이 년 만의 가족사진>, <세 번째 유품>, <두 번째 영정사진> 이렇게 총 4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마리 종활 사진관의 가족은 4명입니다. 아마리 종활 사진관을 책임지는 유메코, 사진을 담당하는 아마리, 카메라 견습생 도톤보리, 헤어디자이너 하나가 그들입니다. 유메코는 친절하고 다정하지만 셈이 빠르고 다소 영악해 보이는 구석도 있습니다. 아마리는 사진 하나는 끝내주게 찍지만 다소 무례하고 불친절해 보입니다. 이상한 오사카 사투리를 구사하는 도톤보리는 좀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을 활짝 열고 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화자인 '하나'는 할머니의 수상한 유언장 때문에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찍은 아마리 종활 사진관까지 찾아왔다가 뒤늦게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아마리 종활 사진관>은 "영정사진을 둘러싼 네 가족의 미스터리를 따뜻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유산상속에서 하나의 엄마만을 제외시킨 할머니. 그 할머니가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퀴즈를 풀어내는 <첫 번째 유언장>, 엄마가 죽어가는 순간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아들(손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통해 가족들이 알지 못했던 진실을 깨닫고 뜨겁게 화해하게  되는 <십이 년 만의 가족사진>, 만삭의 산모와 남편이 찍은 영정사진 속의 비밀을 파헤치는 <세 번째 유품>, 아름답고 매력적인 젊은 아가씨와 한 번, 아내와 다시 한 번 그렇게 2번의 영정사진을 찍어야만 했던 아버지의 따뜻한 사연을 다룬 <두 번째 영정사진>. 가족의 비밀을 풀어가는 미스터리이지만, 미스터리보다는 따뜻한 가족애를 다룬 가족 드라마처럼 읽힙니다.


"오해가 풀렸다고 떠난 가족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멈춰 있던 시간은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150).

<아마리 종활 사진관>은 삶의 시작에도 끝에도 결국 가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인간 세상이 참 크고 복잡한 것 같아도 한평생 가족의 반경을 벗어나지 못하며 결국 생의 의미를 찾고 생의 의미를 남기는 곳은 가족 안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더 큰 오해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는 것, 그래서 가족은 어렵다는 것, 그럼에도 그 사랑과 이별이 내 삶의 시작과 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아마리 종활 사진관>은 제목에 그 이름을 내걸고 있는 '아마리'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했다면, 다소 무례해 보이고 불친절해 보이는 그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인지를 이야기해주었더라면 더 매력적이고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를 비롯해 유메코, 아마리, 도톤보리의 활약이 더 기대되는 소설입니다. (작가가 그럴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처럼 다음편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아머리 종활 사진관과 이대로 작별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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