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레오 버스카글리아 지음, 이은선 옮김 / 홍익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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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무의미한 사람이다.
- part 10. 삶으로부터 배우는 것들 中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사랑학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레오 버스카글리아 교수의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전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사랑학'이라는 과목이 있는 곳은 우리 학교뿐이며, 그런 과목을 담당할 정신 나간 교수라곤 지구상에 저 하나뿐입니다"(15)라는 고백에서 강의가 개설되었을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후, 그녀의 강의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그녀의 책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배우는 것"이라는 이 책의 가르침은 여전히 절실해 보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아마도) 이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의 당신은 진정한 당신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당신입니까?" 저자는 <어린 왕자>의 생텍쥐페리가 <인간의 대지>라는 작품에 남긴 말을 인용하여 이 책의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사랑이란 당신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도록 돕는 과정일지도 모른다"(41).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깨닫고 나를 진실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삶과 사랑과 배움이 시작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본래의 내가 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 빠르게 달리는 토끼에게 하늘을 나는 수업을 강요하는 '동물학교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저자가 독자들을 일깨우고, 교육계를 일깨우고, 세상을 일깨우고 싶은 메시지가 이 짧은 우화 속에 모두 응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입니다(이미 여러 번 들은 내용인데도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저는 이 책을 30년 전에 처음 읽었습니다. 늦게 찾아온 열병처럼 때늦은 사춘기로 인생에 대한 지독한 회의를 앓고 있던 시절, 절친의 선물로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이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라는 것, 그러니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본래의 나로 살아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 타인을 자기 마음으로 하겠다고 고집하기 보다 타인 역시 그 안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지극히 아름다운 가르침이라는 것은 알겠으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은 이 책에서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원했으나,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이 책의 책임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세상은 이미 그런 곳이 아니라는 절망이, (절대 기준, 절대자, 진리가 없다면) 아무리 나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어도 나는 허무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식이 더 무겁게 내리 눌렀던 것 같습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를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 책이 제 인생에 끼친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어떻게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인가, 더 바른 삶인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되어주었다고 믿습니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이 책이 자기계발의 선두주자 같은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읽기를 잘했습니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 길잡이의 선봉에 선 사람들, 즉 누구보다 먼저 교육자가 읽어야 할 책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칼 로저스의 말을 기억하며 말입니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 내가 아는 사실은 단 하나뿐, 배우려는 사람만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19).

무엇보다 이 책은 교학적 관점에서 진지한 성찰과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의 성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누구나 깊이 공감하며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로 쉽지만 분명하게, 날카롭지만 따뜻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사는 법을 전합니다. 저자 자신의 생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고스란히 배어 있어서 더 매력적인 강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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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뚜껑이 없어 - 요시타케 신스케, 웃음과 감동의 단편 스케치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컴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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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감이 안 돼!

뭔가 풍자적이고, 귀여운 단편 스케치인데 또 이렇게 공감이 안 되기는 처음이라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언젠가 'B급 영화'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는 개그를 보았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닮았다고 할까요. 애초에 흐름이라는 것이 없는 단편 스케치이지만, 너무 '단편적'이라 그럴까요. 작가의 의도랄까, 생각의 흐름이랄까, 아무튼 작가의 표현을 잘 따라갈 수가 없어 전반적으로 무엇을 느낀다든지, 공감을 하다든지, 웃음이 난다든지, 감동이 있다든지 하는 '감상'이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또 '전부'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전반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단편적이지만 그래서 더 강렬하게 생각을 부여잡고, 느낌을 부여잡는 스케치들도 있습니다. 아래의 페이지(밑 사진)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스케치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뚜겅이 없어>는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가의 일러스트 북이고, 이 작품은 초판 이래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웃음과 감동의 단편 스케치라는 소개를 보고 기대가 컸던 작품입니다. 솔직히 기대보다 실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기발하고 귀여운 스케치로 가득하지만,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는 독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순간들을 포착한 단편들의 연속이 지루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 어떤 글들은 귀엽고 기발한 반전으로 사고의 전복을 일으키는 충격을 주기도 하니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일은 오니까, 무엇을 해도 돌아오지 않는 어제 일을 생각해보자"와 같은 글이 그렇습니다. (저자의 이력을 보면 더욱) 이 단편 스케치들을 함부로 평가할 자격은 제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그림) 에세이를 읽듯이 읽어가지 말고, 스케치 한 편 한 편에 오랫동안 머물며 충분히 감상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급 영화나 포스트모더니즘적 개그를 보았을 때처럼 다른 사람의 반응(감상)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한다면,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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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지금은 기본으로 돌아갈 때다!
손봉호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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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과학적 사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롱을 받고 있고,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 기독교 신학은 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했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유주의 신학은 너무 빨리 과학적 사고에 아첨해 버렸고, 보수신학은 너무 강하게 과학적 사고와 담을 쌓았다. ... 결국 정치, 경제, 기술, 학문 등이 공공영역을 주도하고,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은 거기서 무의미하게 되고 말았다. 삶의 주변으로 물러난 기독교는 오직 영혼의 구원과 개인적 경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인간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하고 사람들이 관심과 시간 대부분을 쏟아붓는 공공영역은 내팽개치고 말았다. ... 이런 이원론 때문에 기도와 전도에 열정을 쏟는 그리스도인조차 정치계나 기업계에 들어가면 불신자와 다름없이 행동한다"(92).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기독교 지성의 힘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글은 모두 <월드뷰> '대표주간 칼럼'에 기고한 것들을 모은 것"(6)이라고 하는데, 설교의 설교처럼, 어쩌면 (전형적인) 설교보다 더 강하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따끔하게, 심각하게, 놀랍게 흔들어 깨우는 시대적인 통찰을 보여줍니다. 

한국 교회의 타락상을 날카롭게 분석하며 손봉호 교수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를 보면 항상 주위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을 때라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돈이 가장 매력적인 우상으로 부상하게 된 오늘날, 모든 욕망이 '돈'이라는 대상으로 집약되면서 그리스도인조차도 돈을 섬기고 있는 세태를 매섭게 지적합니다. 세상을 향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일깨워야 할 그리스도인이 돈을 사랑하다는 데 앞장서는 현실은 이 시대의 종교개혁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기독교가 공적인 영역으로 관심을 돌려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사명을 일깨우는 책이기도 합니다. 교회와 신학이 좀 더 심각하고 철저하게 문화의 변화와 씨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요즘 사회와 교회에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동성애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에 따라 우리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동성애 문제'도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과감하게 손봉호 교수님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열린 토론도 활발히 일어나야겠지만 "성경에는 동성애에 대한 경고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정의롭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도 한국과 미국의 보수 교회는 후자는 무시하고 전자에만 열정을 보인다"(92-93)는 지적도 많은 반성을 하게 해줍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읽는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성경적인 시각과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인 사명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독교 지성이 있다는 것이 큰 복으로 느껴집니다. 이 책과 같은 좋은 유산을 많이 남겨주시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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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리커버 양장 에디션) - 라틴어 원전 완역판
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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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완전한 설명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심화시켜 주는 일련의 명상들이라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27).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신입 수도사들의 영성 훈련을 위해 쓴 책이라고 합니다. 책을 보니 자연스럽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고백록>이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며 영성을 훈련한 책이라면,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다른 사람을 이끌기 위한 가르침이고, 하루에 한 주제씩 묵상하기 좋게 재편집된 <주님의 나의 최고봉>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아>도 짧막한 교훈으로 단락이 나누어져 있어 빠른 속도로 통독해나가기 보다 한 단락 속에 오래 머물며 깊은 묵상을 하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영성"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교회용어사전은 영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성품을 말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은총을 경험하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럽고 경건한 성품이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 속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의 속성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온전한 사랑, 말씀에 기초한 도덕적 통찰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신비에 대한 신령한 지식과 지혜를 겸비하게 된다.」


"신속하게 지나가 버릴 일들에 대해서 연연해하면서, 영원한 기쁨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38).

예배도 분주하게, 기도도 분주하게 해치우는 현대인의 신앙양태를 보며 '영성을 잃어버린 세대'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어보니 성도들의 영성은 언제나 세속적인 도전을 받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성을 애써 훈련하지 않으면, 세상(탐욕과 욕망과 교만)이 영혼 안에 꽉 들어찬 상태로 헛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허울뿐인 종교인으로 전락하게 될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음을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영성의 시작은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삶을 생생하게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당신이 행하였던 신앙 고백을 기억하고, 당신의 눈 앞에 선명히 보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모습을 그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길로 행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기 위하여 애쓰지 않고 있다면, 예수님의 삶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112).


"그러므로 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심오한 정의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내 심령 안에서 회개가 일어나 실제로 낮아져서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38).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지식을 더하는 책이 아닙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생각의 힘을 키우는 책입니다. 예수님으로 우리의 생각을 가득 채우는 책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시간입니다. 기독교 고전 목록에서 그 이름이 빠지지 않는 책이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낯익은 제목이기도 한데, 정작 이 책을 정독한 사람은 몇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CH북스에서 발간한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라틴어 원전 완역판이라는 데도 의의가 있지만, 무엇보다 책이 참 예쁩니다. 빠른 속도로 통독하지 않고 옆에 두고 오래 묵상해야 하는 책인데, 표지도 양장이라 튼튼합니다. 2018년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천천히 묵상하며 영성훈련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영성훈련교재가 왜 그토록 위험한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어준 문장을 아래에 인용해봅니다. 역으로 이것은 이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기 전에, 다음의 문장을 깊이 묵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의 헌신이란 영적으로 유익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단지 자연적으로 좋은 것에 대한 신앙, 즉 친절, 예의, 청결함 등등에 대한 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다. 즉 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게 되며 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혼란이 야기되는 것이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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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 - 신앙을 무력화시키는 영적 크립토나이트를 깨라
존 비비어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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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뜻하신 것보다 훨씬 못한 삶에 만족하지 말라!

'크립토나이트
'는 영화 슈퍼맨에 나오는 가상의 방사성 물질입니다. 악당들은 슈퍼맨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슈퍼맨의 고향에서 이 '크립토나이트'를 가져왔습니다. '크립토나이트'는 슈퍼맨의 단 하나의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천하무적 슈퍼맨도 이 크립토나이트에 노출되면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력해지고 맙니다. 

<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는 슈퍼맨의 크립토나이트에 비유하여, 신앙을 무력화시키는 영적 크립토나이트는 무엇인가를 묻는 책입니다. 영적 크립토나이트의 정체를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가장 심각한 이유는, 이 영적 크립토나이트를 그대로 방치하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이 뜻하신 것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묻겠다. "왜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우리를 통해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왜 약하고 아프고 심지어 일찍 죽는 교인들이 그토록 많은가? 우리가 영적 크립토나이트를 방치한 탓이 아닌가?(80)

<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는 영적 크립토나이트의 정체를 밝히고, 그것을 알아보는 분별력을 키우고, 그것을 깨뜨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큰 도전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전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문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시대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왜 환한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분명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주셨는데, 무엇이 문제이기에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세상에 깨지고 터져 피를 철철 흘리며 사는 것일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해줍니다. 더 심각한 것은, 복음을 전할 능력을 상실한 채 살아가면서도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각입니다.

<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가 폭노하는 영적 크립토나이트의 정체는 (어쩌면)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교회에 오랜 다닌 신자라면 그것을 깨는 방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째서 우리가 이 '영적 크립토나이트'의 정체를 그대로 방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데도 그것을 당연시 하는 세태에 대해 더 큰 심각성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이타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이해를 초월하는 평안, 초자연적인 능력, 행복, 활기, 창의성, 신성한 지혜, 뛰어난 이해력, 최고의 지식, 날카로운 통찰력까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신령한 성품을 우리는 왜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궁금한 신자에게, 그 모든 신성한 성품이 우리 삶 가운데 가득하기를 소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혼자 읽어서는 안 되고, 공동체가 함께 읽어야 할 책입니다! 영적 무기력은 공동체와 함께 싸워야만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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