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쪽지 - 여섯 살 소녀 엘레나가 남기고 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키스 & 브룩 데저리크 지음, 나선숙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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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작은 탄식이 가슴에서 터져 나온다. 너무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딸을 암으로 잃어야 했던 부모의 고통을 생각하면 지극히 사치스러운 감상이겠지만, 더 할 수 없이 충만한 사랑으로 채워진 이 가족의 특별했던 ’256일’을 목도하며 "단 하루를 살더라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되풀이 했다. 

여섯 살로 생을 마감한 꼬마가 나를 울린다. 여섯 살 엘레나는 2006년 11월, 희귀한 소아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사랑하는 딸이 곧 자신들의 곁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안 엘레나의 부모는 너무 어려서 언니를 잘 기억하지 못할 동생 그레이시를 위해 엘레나와 보내는 소중한 날들의 이야기를 ’일기’로 남겨놓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기 속에 남겨진 그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치열한 투쟁 같다. 매순간 기적을 바라고 실망하고 기적을 바라고 실망하기를 반복하며,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하루하루 감사하며 견디며, 더 사랑하기 위해, 서로에게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그렇게 투쟁했다. 

엘레나는 그렇게 256일 더 살고 떠났다. 그 특별했던 256일은 고통스럽지만 행복했고,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이 세상을 떠난 엘레나의 삶에 ’기적’은 없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남겨진 쪽지>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삶의 마지막 9개월 동안에 가족을 위해 곳곳에 가족 몰래 숨겨둔 엘레나의 사랑의 쪽지! 암 때문에 서서히 마비가 시작되어 걷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던 이 작은 꼬마 아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어른들조차 그런 상황에 처하면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도망치고 싶을 텐데, 엘레나는 하나씩 꿈을 이루어가며 매순간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고, 일상의 즐거움으로 충만하고, 삶의 환희로 충만했다. 그리하여 날마다 자기 인생 최고의 날을 살았다!

엘레나와 그 가족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랑할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알고 있다. 언젠가 엘레나처럼 나도, 가족도, 누구라도 이렇게 떠나가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엘레나처럼, 그 가족처럼 살지 못하는가? 아마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아직 많이 있다는 교만한 안도감이 우리 마음에 욕심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겨진 쪽지>는 아빠로 산다는 것, 엄마로 산다는 것, 가족이 함께 잠을 자고, 아침이면 뽀뽀를 하고, 밤이면 동화를 읽어주는 그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빛나는 일인지 알려준다. 비록 암과 싸우며 불안과 슬픔과 고통이 엄습하는 시간들이었지만, 희망의 끈을 잡고 꿈꾸며 사랑하며 ’함께’하는 그 순간순간이 빛이 난다. ’생(生)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그들의 특별한 ’256일의 삶’ 안에서는 가족사진을 찍는 일조차 숭고하기만 하다.

여섯 살 엘레나가 남기고 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 <남겨진 쪽지>는 우리에게 말한다. "삶의 소소한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매순간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고. 오늘 나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엘레나처럼 모든 것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빛나게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살았다 해도, 아마도 이 세상을 떠날 때 내가 가장 후회하게 되는 일은 그 모든 것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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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기독교 자끄 엘륄 총서 5
자크 엘륄 지음 / 대장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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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을 유사하다고 말하지 마라!"


기독교 선교 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최근 이슬람 세력이 눈에 띄게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무슬림이 거주하는 지역이 확대되고, 자체 인구는 물론 개종자가 늘어나면서, 세계 곳곳에서 무슬림의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안에도 이슬람 사원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으며, 이슬람 세계의 자본이 투자되고 있다는 정보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이슬람 문화권의 노동자의 이주도 꽤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무슬림 인구가 '의미 있는 소수'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가적으로 다종교 정책을 펴는 국가이기 때문에 사회 안에 서로 다른 종교가 공존하면서도 종교분쟁이 있는 여러 지역처럼 극렬한 마찰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국제결혼으로 인한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면서 '문화상대주의'에 관한 논의와,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한 논의도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이슬람의 종교적 특성 때문이다. 그들의 종교는 곧 삶의 양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문화권의 사람들이 이주해온다는 것은 곧 그들의 문화도 함께 이식된다는 것을 뜻한다. 무슬림의 인구가 의미 있는 소수로 계속 증가를 한다면, 우리나라의 정책과 복지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독교 선교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무슬림의 증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봐야 할 사회적 이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프랑스 사회에도 무슬림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하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반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중,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며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이 책의 저자 자끄 엘륄(1912-1994)은 이슬람에 대한 무분별한 미화를 경계하면서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당시 무슬림 민족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이슬람을 추종하는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 이슬람과 기독교를 접근시키려고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세 가지 논증은 당시 사회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책 <이슬람과 기독교>는 바로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그 세 가지 원리를 반박하고자 펴낸 논증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세 가지 원리는 1) 아브라함의 자손, 2) 유일신론, 3) 책의 종교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접근을 '추종의 세 기둥'이라 이름 붙이며, 기독교와 이슬람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이 세 가지 근거가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 차이임을 밝힌다. 첫째로, 아랍인이 이스마엘 자손이므로 결국 그들도 기독교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성경을 근거로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과 축복의 성격을 밝히며 '누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자손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믿음이 조상 아브라함의 후사로서 중요한 것은 혈육인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인가이다. 둘째로, 기독교와 이슬람이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론의 종교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는 하나님의 호칭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며 성서의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의 차이를 증명한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에 대한 이슬람의 왜곡된 인식이다. 셋째로, 책의 종교라는 것은 기독교와 이슬람이 모두 '성서-코란'에 기반을 둔 종교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서로 대립되는) 성서와 코란의 비교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근본적인 차이를 밝혀준다.

정리하면, <이슬람과 기독교>는 당시 제3세계 민족들을 향해 "떳떳하지 못한 양심"을 가진 지식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유사성을 '찾아내려는' 움직임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세 논증에 대한 변증서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왜곡된 양심은 '다른 것'을 '유사한 것'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과 기독교>를 통해 당시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요즘 '문화인의 자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문화상대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모두에게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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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쉬운 통계학입문 세상에서 가장 쉬운 시리즈 (지상사)
고지마 히로유키 지음, 박주영 옮김 / 지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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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를 학문으로 이해하다!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을 하면서 가장 애를 먹은 과목이 바로 이 ’통계학’이다. 사회의 현상과 사회적 경험을 관찰하면서 가설과 이론을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 ’통계학’은 절대 필수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즉, 통계학을 모르면 경험과학인 사회학을 공부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수학을 통해 익힌 통계에 관한 기본 개념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도 논문에 수록된 통계표를 하나도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어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통계 수업을 들으며 직접 부딪히기 전까지는 통계를 비교적 쉬운 학문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통계를 단순 원리로 이해하고 있었던 나의 얇팍한 지식은 ’통계학’이 독립적인 과목으로 존재한는 것조차 사실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학기 통계 수업을 들으며 절실하게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통계학에 결코 만만한 학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연계하여 대학원을 졸업하기까지 주어진 TEXT를 연구하는 학문에 익숙했던 내게 ’부분에서 전체를 추론’하는 귀납법적 학문은 그 방법 자체가 너무도 낯설었다. 한 학기 동안 통계학 수업을 듣고, 통계학에 관한 전문서적을 2권 정도 독파하고, 그리고 논문을 준비했다. 실제 설문조사를 하고 SPSS를 이용해 분석 결과를 얻기 위해 다시 SPSS에 관한 서적을 2권 정도 읽고 5권 정도 부분 참고하며 열심히 가설을 세워나갔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2년 동안 매달렸던 논문을 포기했다. 통계학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설계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추리통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여 설문지 작성에서부터 논리의 헛점을 안고 있었다.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상사에서 펴낸 <세상에서 가장 쉬운 통계학 입문>을 읽었다. 동경대학교에서 수학과를 전공하고, 현재 데이쿄대학교 경제학부 조교수로 제직 중이며, 수학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저자 ’고지마 히로유키’는 ’통계학’에 대한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도록 이 책을 집필했다. 저자는 ’중학교 수학이면 3주 만에 끝낸다’고 약속하지만, 내 경험상 통계학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적 이해가 없는 독자에게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통계학의 용어들부터 무척 낯설 것이라 예상한다. 수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용어와 도표, 그래프만 보아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통계학에 익숙한 독자라든지, 기본적인 개념은 알고 있지만 ’통계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학문적 지평이 좁은 사람에게는 통계를 ’학’(學)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는 저자의 새로운 설명방식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예언적중구간’이라는 개념을 이용한 설명이 신선하다. 무조건 개념을 암기하느라 골치가 아팠던 카이제곱분포, t분포의 차이를 확실히 알 것 같다.

나에게 통계학은 ’상상’과 ’논리’가 결합된 학문으로 이해된다. 불규칙하게 쏟아지는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찾아내는 통계, 그것은 논리의 학문이면서 또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추론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통계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익숙하게 사용되는 학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평균을 구하는 통계가 아니라, 가설을 세우고 검증을 하는 경험과학으로 통계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통계학입문>은 통계학에서 가장 필수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통계학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나 처럼 경험과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입문서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  처음 통계학을 접했을 때의 나의 당혹스러움을 떠올려 볼 때 - 그다지 흥미를 끌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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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재단사가 사는 동네 꼬리가 보이는 그림책 1
러쉰 케이리예 지음, 정영문 옮김 / 리잼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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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재단사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 단편영화 부문에 애니메이션 영화로 상영된 작품이 동화책으로 나왔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교활한 재단사와 젊은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고 한다. 어린이 그림책처럼 정사각형 판형으로 40페이지의 얇은 동화책이지만, 검은색과 황금색이 조화를 이룬 (다소 어두워 보이지만) 강렬한 일러스트와 이야기가 전해주는 교훈, 두 가지 모두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게 해주는 수준작이다. 일러스트도, 이야기도 한마디로 고급스럽다.

아주 조용한 동네에 ’레자드’라는 청년이 당나귀를 타고 들어와 주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이 동네에는 손님의 옷감을 몰래 잘라내 훔쳐가는 무서운 재단사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레자드는 재단사에게 옷감을 도둑 맞는 동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신은 그 재단사를 혼내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내기를 한다. 재단사가 레자드의 옷감을 훔쳐가면 자신의 당나귀를 내놓고, 그렇지 않으면 마을의 당나귀 한 마리를 가져가기로 한다.

자신만만한 젊은이 레자드와 무서운 재단사와의 한판 승부,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 무서운 재단사는 손님을 칭찬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배곱빠지게 웃기는 이야기를 하는 재주가 있다. 재단사는 그동안 이 두 가지 능력을 통해 손님들의 옷감을 몰래 훔쳐온 것이다.

어렸을 때 읽은 우화나 동화와는 달리, 이 책의 교훈은 들어나게 나타나지 않는다(적어도 내게는). 무서운 재단사가 전하는 교훈은 이렇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남의 이야기는 귀담아 들으면서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들을 줄 몰라."(36)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TV를 보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나의 모습이 대입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여행하는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느라 내가 여행할 기회를 놓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신경을 쓰느라 나의 내면의 소리에는 무심하게 되는 생활이 눈앞에 그려졌다. 

무서운 재단사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무서운 재단사가 자신들의 옷감을 훔쳐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찌해볼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당하기만 하는 동네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동네 사람들의 충고를 무시하며 혼자서만 제일 잘난 것처럼 자신만만한 레자드의 어리석음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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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철학자들의 서 -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숭고한 철학적 죽음의 연대기
사이먼 크리칠리 지음, 김대연 옮김 / 이마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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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으로 죽는 방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죽음이란 현실에 직면해서도 자제력과 차분함,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14)

참으로 오만한 책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이니 죽음 자체를 거부하지는 못할지라도 죽음이 가져다주는 공포에는 한 번 맞서보겠다는 심산이다. 죽기를 무서워하는 인간은 한 평생 매여 종 노릇한다고 하는데, 죽음에 직면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고요함을 유지하는 ’품격’을 갖춰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품격을 ’철학적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무엇인가에 도취돼 달아나고 벗어나려는 우리의 욕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철학적 죽음’이란 개념은 우리의 깨어 있는 정신의 힘을 보여준다."(12) 저자는 죽음의 공포와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철학이 제공해준다고 믿는다(!). 저자는 철학을 이렇게 해석한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우리가 말하고 먹고 마시는 입에 달고 사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다."(13)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철인(哲人)이 곧 철인(鐵人)이라는 말인가? 

아무튼 철학적 죽음을 이상으로 여기는 저자는 그래서 철학자들의 죽음을 탐구했다. 철학자들은 어떻게 죽었는지를 통해 죽음에 대해 철학에서 배울 수 있는 적절한 태도를 발견하려는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하여 철학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아 <죽은 철학자들의 서(書)>라 이름 붙인 이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190여 명이나 되는 철학자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더불어 철학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은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그러나 철학적 사유와 철학자의 죽음을 직접 연결짓는다는 것이 어찌 보면 그럴 듯 하기도 하지만, 심각한 논리적 모순을 가진 연구 주제가 아닌가 하는 반론이 생긴다. ’철학자들의 죽음’이 곧 ’철학적 죽음’이라는 논리의 단순함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실제로 이 책을 통해 확인한 철학자들의 죽음은 그들의 철학적 사유와는 별개의 문제임을 알려 줄 뿐이다. 스크라테스 정도가 그나마 저자의 의도에 맞아떨어지는 철학적인 죽음이었다고나 할까. 또하나 기독교 성인들의 죽음은 종교철학자의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신앙)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의 거창한 연구 의도를 떠나, 죽음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유와는 별개로, 그저 철학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읽으면 이 책은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주제도 독특하거니와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의 죽음을 모았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철학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여러 가지 이유 중에, 괴이하고도 어이없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 철학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소똥에 질식사하거나, 연회에서 소변을 참다가 방광이 터져 죽은 철학자의 이야기는 완전 블랙코메디다. 

<죽은 철학자들의 서(書)>를 통해 품격있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얻어지는 결론은 이것이다. 품격있는 죽음이란 죽는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살아온 삶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닐까. 언제 어떤 모양으로 우리를 덮쳐올지 모르는 죽음을 그나마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은 그저 오늘 심어야 할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열심과 최선으로 심는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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