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은 다소 아쉬운 듯한 어조로, 자신은 그 집회를 보면서 사회적 관습과 그걸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경향이 무척이나 완고하다고 생각했는데, 반면에 니나는 그 집회의 활기와 목적의식에 흠뻑 빠져들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 P117

"시대가 해야 할 일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할레키 씨. 그리고 신사가 해야 할 일은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지요." - P122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진 공들여 만든 물건들, 백작은 생각했다. 그럼 혹시……….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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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고지식하지 않다고 전적으로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야. 장담하면 고지식한 사람이 되니까 말이다." - P106

대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제들을 가장 새로운 명칭을 붙여 요란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 P107

‘돕는다‘를 ‘가능케 하고 확실히 한다‘로 대체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은 만장일치의 박수와 대다수가 발을 구르는 소리로 채택되었다. 발코니에 있는 동안 백작은 정치적 담론이 언제나 따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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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친구들." 백작이 말했다. "여러분은 당연히 오늘 일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면담을 위해 크렘린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거기서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현 정권의 당국자 몇 사람이 나는 귀족으로 태어난 죄로 여생을 한 장소에서 보내는 형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이 호텔입니다." - P33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상상하는 것은 미쳐가는 확실한 길일 뿐이었다. - P38

나이 많은 그리스인은 문을 막 나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각하…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그리스인은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대공의 책상을 가리켰다.
"앞으로도 백작님의 시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백작은 고맙다는 뜻으로 빙긋 미소 지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콘스탄틴, 시를 쓰던 나의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로스토프 백작님, 시인으로서 백작님의 시절이 지나갔다고 한다면 유감스러운 사람은 우리입니다." - P47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P52

그러나 백작에게는 복수의 기질이 없었다. 장대한 작품을 구상할 상상력도 없었다.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꿈을 꿀 정도의 공상적인 자아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 P53

오랫동안 백작은 신사란 불신감을 가지고 거울을 보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거울은 자기 발견의 도구이기보다는 자기기만의 도구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미인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각도에 맞추려고 30도쯤 몸을 돌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는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 P65

"아빠가 얘기하길, 공주는 패배자들이 군림하던 시대의 타락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래요."
백작은 깜짝 놀랐다.
"몇몇은 그랬을 수도 있겠지." 백작이 수긍했다. "그러나 다 그런건 아니야.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 P73

"원칙적으로 말해서 새 세대는 이전 세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단다. 우리의 나이 많은 분들이 밭을 경작하고 전쟁에 나가 싸웠어. 그분들이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일반적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한 거야. 그러한 노력을 해왔으니, 설령 그 노력이 변변찮다 할지라도, 그분들은 마땅히 우리의 감사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거란다." - P84

니나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흔들면서 백작의 말을 잘랐다.
"아저씨는 방금 전에 실은 아주 젊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젊고말고."
"그렇다면 아저씨는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이라는 말을 하기엔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요."
잘났어, 정말. 백작은 생각했다. 이 차만큼이나 명징하고 야무지군. - P88

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 P90

메트로폴 호텔에서 4년을 살아온 백작은 자신을 이 호텔에 관해 꽤 많이 아는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직원들의 이름을 알고 이곳의 서비스를 직접 겪어서 알고 여러 스위트룸의 장식 스타일을 쉬이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니나에게서 교육을 받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풋내기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 P92

화려함은 끈질긴 힘이니까 말이다. 영악함도 끈질긴 힘이다.
황제가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와 거리에 던져질 때 화려함은 얼마나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는가. 그러고 나서 화려함은 조용히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새로 임명된 지도자의 복장에 관해 조언해준다. - P98

그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커피 탁자 위, 접힌 신문 옆에 놓여 있던 스푼과 찻잔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작은 그림은, 그동안 백작의 영혼을 짓누른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
.
.
즉, 백작이 스위트룸 317호에서 본 것은 단순히 오후의 차 한 잔이 아니라 자유인인 한 신사의 일상생활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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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21일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긴급위원회에 출두함

주재: V. A. 이그나토프, M. S. 자콥스키, A. N. 코사레프
검사: A. Y. 비신스키 - P13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당신의 증언을 모두 고려해보면 우린 그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를 썼던 명민한 영혼이 자기 계급의 부패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굴복했으며, 지금은 한때 자신이 지지했던 바로 그 이상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이를 근거로 한다면 우리로서는 당신을 이 방에서 내보내 수감하는 게 온당할 것이오. 하지만 당의 고위직 중에는 혁명 이전 단계 영웅의 범주에 당신을 넣는 사람들이 있소. 그래서 위원회의 의견은, 당신은 당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그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다음 사건. - P17

1922년 6월 21일 오후 6시 30분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에스코트를 받으며 크렘린 궁전 문을 나와 ‘붉은광장‘에 들어섰을 때 날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시원했다. - P21

위층으로 올라가는 방식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군인에게 어떻게 전쟁터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백작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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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신은 보라색을 좋아하지 않았다. 병적으로 억눌린 듯한 색깔이 심장병 환자의 입술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온 세상을 채운 보라색에 포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남은 인생을 이 보라색 세계에서 살아야 했다.
헤일로호도 없고 윈톈밍의 우주선도 없고 인간의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 P761

두렵지만, 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일이 두 사람에게 남았다. 현재 그곳의 연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저속 환경에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 정상 광속의 세계에서는 방사성 붕괴가 발생하지 않는 원소들이 저속에서 각기 다른 속도로 붕괴되기 때문에 저속에서 지속되는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 P762

그녀 뒤에 1890만 년의 세월이 있었다. - P764

관이판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뭘 하죠?"
"다시 찾아보고 싶어요. 정말 작은 흔적조차 없을까요?"
"없어요. 1800만 년이 흘렀어요. 모든 게 사라졌어요."
"돌에 글씨를 새겨놓았을 거예요."
관이판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청신을 보았다.
청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AA는 돌에 글씨를 새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 P765

1시간 뒤 그들이 받은 이미지 위에 1890만 년 전 글씨가 나타났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어요
당신들에게 작은 선물을
붕괴를 피해
새로운 - P766

그때 무언가가 그들을 상념에서 깨웠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선으로 그린, 사람 키만한 직사각형이 은은한 빛을 내며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현실의 화면에서 마우스 커서로 선택해 확대시킨 창같았다. - P768

"안 돼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청신이 관이판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우리 둘도 1800만년만큼 멀어지고 싶어요?"
관이판이 말없이 청신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10분 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문으로 들어갔다. - P770

관이판이 손을 휘둘러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당신에게 별을 선물했던 윈톈밍이 당신에게 또 우주를 선물했군요. 청신, 이건 우주예요. 비록 작지만 이건 하나의 우주예요."
.
.
.
"그는 가장 위대한 남자군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과 우주를 선물할수 있다니, 난,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요."
청신이 옆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대며 웃었다.
"당신은 우주에 하나뿐인 남자니까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어요." - P774

지자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647호 우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이 우주의 관리자입니다." - P775

청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를 기록하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 회고록을 《시간 밖의 과거》라고 이름 붙였다. - P783

관이판이 말했다.
"시간이 2차원만 되어도, 그러니까 직선 형태가 아니라 평면 형태만 되어도 여러 개의 방향이 생기게 되죠. 그러면 동시에 여러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어요." - P784

회귀 운동 성명서: 우리 우주의 총 질량이 임계치 아래로 떨어졌다.
우주는 곧 개방된 뒤 영원히 팽창하며 죽어갈 것이고 모든 생명과 기억도 사라질 것이다. 당신들이 가져간 질량을 돌려주고 기억체만 새로운우주로 보낼 것을 촉구한다. - P790

소우주에는 메시지가 담긴 표류병 하나와 투명 공만 남았다. 표류병은어둠에 파묻히고 1 세제곱킬로미터의 작은 우주에서 투명 공 속 작은 태양만이 가물거리는 빛을 토해냈다. 이 작은 생명의 세계 속에서 물방울이 무중력 유영을 하고 있었다. 물방울에서 뛰쳐나온 작은 물고기가 다른 물방울로 뛰어 들어가 한들거리는 수초 사이를 유유히 헤엄쳐 다녔다. 작은 육지의 풀잎에서 굴러 떨어진 이슬 한 방울이 핑그르르 돌아 날아오르며 우주를 향해 한 가닥 투명한 햇빛을 반사했다. - P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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