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은회색 머리카락과 겨울 하늘색 눈동자를 지닌 날렵하고 강인한 소녀. 아무도 그녀가 몇 살인지 몰랐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때리는 건 괜찮은 나이지만, 데리고 자기에는 아슬아슬한 나이였다. - P345

"그래서 내 어머니는 누구냐고!" 그녀는 외쳤다. "말해준다고 했잖아."
그는 어깨 너머로 웃음을 보냈다. "땅의 아들을 묶어놓을 만큼 강한 자가 누굴까? 바람의 여신 말고 없잖아." 그는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 P351

이것은 불꽃족 루시가 북극성이 된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달에 일어난 일이다. - 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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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나뭇잎과 잔가지들이 발밑에서 으스러진다. 버스럭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되돌릴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손상을 받았을 때에나 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마치 이곳을 지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냉엄한 사실을 나의 뇌리에 각인하려는 듯한 느낌이다. - P251

과거로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난 미래를 향해 살아갈 거야. 여기서도 기필코 살아남고야 말겠어. 하지만 어떻게? 카터는 무자비하며 매수도 불가능해 보이므로 힘으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 P258

‘환생‘은 존재하지 않아. 다시 태어날 영혼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언젠가는 순전한 우연으로 인해서 지금의 너를 정의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 누군가가 태어날 수는 있어. - P263

네 육체가 살아온 인생을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보는 행위야말로 환상이야. ‘너‘라는 존재가 너 자신이 태어난 이래 일어난 모든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은 편리한 픽션에 불과해. 그런 건 사람이 아니라 합성물, 모자이크라고. - P265

혼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 P277

나의 진짜 고민은 유아론이 제기하는 본질적인 의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 그런 고민을 했을 때부터, 나를 둘러싼 외부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 따위는 없단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P277

만약 타인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인식할까? 어떻게 경험할까? 다른 인간이 경험하는 의식이 어떤 것인지 타인인 내가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 P277

샤안은 통신 엔지니어였다. 나는 홀로비전 뉴스 에디터였다. 우리는 금성에 테라포밍 나노머신이 파종되는 과정을 생중계했을 때 처음 만났다. - P280

육체 교환 테크놀로지가 실용화되어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이런저런 방식을 모조리 시험해 보자고 제안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샤안이었다. - P285

내가 지금 여기서 존재하는 것은 샤안을 위해 신기함을 만끽하고, 마이클을 위해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다. 때가 오면 기꺼이 두 갈래로 나뉘어서 내가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두 삶을 다시 살아갈 것이다. - P300

우리가 서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용서할 일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녀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행동을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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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입구>가 실체화할 때마다 몇백 명은 어떤 식으로든 목숨을 잃는다. <흡입구> 러너들은 그 안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을 10명에서 20명까지 구출한다. - P151

폴라가 바늘로 엄지손가락을 찌른 다음 그 피를 서로의 혈관에 넣어 섞자고 제안한 것은 우리가 9살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 P181

실험에 쓰인 박테리아는 생존에 적합하도록 인위적으로 조절된 실험실의 환경 밖에서는 (이론상으로는) 생존이 불가능했지만, 박테리아의 생존률을 낮추기 위해 삭제된 유전자들의 빈틈을 채운 바이러스가 실험실 밖으로 유출되는 사고가 기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 P187

1주 뒤에 폴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검사 결과에서 양성이 나왔다고 했다. 백혈구 수치가 증가했고, 적혈구 수치는 낮아졌다고 했다. - P197

가장 끔찍했던 것은 폴라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던 이유를 갑자기 이해했을 때였다. 나도 자기처럼 죽어가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함께 죽는 것 말이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동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함께 죽는 것. - P201

제약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약품을 제조하는 로봇들을 제어하는 이 파일은, 모든 생산 라인에서 나오는 모든 약병에 위약이 아닌 치료 약을 담으라고 지시할 것이다. - P213

"어떤 이행몽들을 꾸게 되실지는 저희도 모릅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고객님이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점입니다." - P219

나는 말을 이었다. "결국 이행몽이 뭔지는 알 수 없다는 거로군?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고? 그게 존재하는 건 수학적으로도 거의 확실하다고 했지?"
"예."
"하지만 내가 그걸 기억 못 하리라는 점도 같은 정도로 확실하다는 건가?"
"예." - P229

도대체 나의 뇌 속에 갇혀 있는 어떤 끔찍한 망상이, 혼수상태의 인간에서 혼수상태의 기계를 향해 흐르는 데이터의 흐름 속에서 미친 듯이 날뛸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단 말인가?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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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보음은 오래 내버려 둘수록 점점 더 높아지고 시끄러워지므로, 자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각성까지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 P141

과학 관측을 위한 ‘적재물‘을 <흡입구> 내부로 반입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러너> 중 한 명이 나인 것은 분명 사실이다. - P143

<흡입구>가 지구에 출현하기 시작한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흡입구>는 거의 완전한 구체고, 반지름은 1킬로미터를 조금 넘으며, 그 중심은 보통 지표면 근처에 위치해 있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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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방인에게 접근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 했고, 오히려 율법을 범하지 않으려고 이방인과의 접촉을 피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 P388

초기 이방 선교는 신학적 계획이나 전략 없이 거의 우연히 진행되었습니다(F. F. 브루스). - P389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의 가장 근본적 논쟁은 이방 성도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지의 여부였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방 선교 초기에는 이방인 성도들의 율법 준수 여부가 대두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P390

바울의 연대기를 재구성할 때 논쟁의 쟁점은 구제 헌금 전달, 예루살렘 공회, 안디옥 사건과 갈라디아서 저술 시점을 특정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요한 사건을 바울 생애의 어느 지점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초대 교회의 상황과 신학적 발전을 달리 구성하게 됩니다. - P396

로마서는 바울의 가장 성숙하고 심오한 신학사상을 담은 무게있는 서신이자 기독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문서입니다. 로마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바울 신학 전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곤 합니다. - P406

루터교 사제로서 하버드대학교 신학대학장을 지낸 스웨덴 출신의 스텐달(K. Stendahl) 교수는, 로마서의 핵심 주제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라면서 종교 개혁자들이 이해한 전통적 견해를 반박했습니다. - P408

바울은 직접 말로 전하려 했던 ‘나의 복음‘을 글로 썼습니다. 로마에 가지 못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영구적인 대체물을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로마서는 바울의 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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