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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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가설

류드밀라 나보코프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나보코프는 멋진 그림을 많이 그렸다. 평생동안 그린 나보코프의 그림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알 수 없는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나보코프가 그린 그림이 이상하다. 한 행성의 풍경을 연작으로 그린 그림은 마치 어딘가에 있는 현실세계같다. 그림을 모두 모아 3D로 시뮬레이션하니 누구도 본 적 없는 완벽한 행성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 행성의 이름을 류드밀라 행성이라고 이름짓고 나보코프가 가진 천재적인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코프가 죽은 후 류드밀라 행성과 같은 모습을 한 행성이 관측되었다.


윤수빈과 한나는 '뇌의 해석 연구소'에서 일하는 연구원이다. 연구소에서 영유아들의 뇌를 분석하던 중 아이들이 할 법하지 않은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아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있어 아이들의 뇌속에서 서로 대화를 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은 그 존재를 '그들'이라고 이름지은 후 계속해서 아이들의 뇌를 관찰한다. 관찰한 결과 '그들'은 아이들의 뇌 속에서 지적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을 알게 되고 일곱 살이 넘으면 뇌속에서 사라지고 '그들'에 대한 기억은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류드밀라 행성이 발견되었을 때 동요가 큰 뇌파를 그리며 류드밀라를 그리워한다.


김초엽. 1993 ~ .


젊은 신예 SF작가

SF에 관심이 많지만 한국 SF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까막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김초엽이라는 이름은 꽤 익숙하다. 일년 전쯤 국내 SF계에 미안한 마음에 구매해서 읽었던 단편 모음집에서 처음 그 이름을 접했고 얼마전부터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도 책이 오르고, 책 좋아하는 소셜 미디어 친구들이 책을 계속 포스팅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웠는데, 이게 상징적으로 지은 제목인지, 상대성이론의 헛점을 파헤쳐 상상력을 발휘한 것인지 궁금해서 읽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감성적인 문장 속에 실어 놓은 SF 상상력

SF 소설은 '얼마나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했는지'와 '그 상상력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표현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책이 재미있어도 아이디어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으면 좋은 SF소설이라고 하기 힘들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아이디어 측면에서 상당히 만족스럽다. 생명공학을 이용해서 낙원행성을 만든 과학자, 문자를 색상으로 표현하는 외계인, 유아기에 인간의 성장을 돕고 자아가 형성되면 사라지는 외계인의 정신 등 멋진 아이디어를 잘 발전시킨 단편들이 계속된다.


김초엽은 이 아이디어를 잘 살려서 대체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후 그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소설은 진행하는데 플롯이 잘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다. 쓸데없이 아이디어를 심하게 숨겨두지 않고 적절하게 궁금증을 풀어주기 때문에 머릿속이 너무 헝클어지기 전에 끝이 난다. 그래서 읽는 동안 머릿 속이 크게 복잡하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다. 작품 중에서 가장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다. 웜홀이 존재한다 해도 웜홀을 움직일 수 없다면 가고 싶은 곳이 아니라 우연히 화이트홀이 있는 곳으로만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는데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슬픈 이별을 잘 표현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온통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가득하다.


작품 속에 면면히 흐르는 그리움의 감성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굉장히 감성적이다. 그렇게 느껴지는 첫번째 이유는 SF소설답지 않게 섬세하고 따뜻한 문장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감성터지는 이유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그리움의 정서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데이지는 낙원의 기원인 시초지라고 불리는 지구와 그 곳에서 살고 있는 지구인들을 그리워한다. <스펙트럼>의 할머니인 희진 역시 우연히 도착했던 루이의 행성을 그리워 한다. 심지어 그들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저 넓은 우주를 10년동안이나 홀로 떠돈다. <공생가설>은 그리움의 끝판왕이다. 이미 멸망한 것이 틀림없는 류드밀라의 행성인들은 정신만이 총합적인 모습으로 인간의 공통 정신 속에 숨어산다. 끊임없이 자신들이 탄생했던 고향인 류드밀라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불의의 사고로 가족과 헤어진 안나의 가족에 대해, <관내분실>은 죽을 때까지 남처럼 살았던 엄마에 대해,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어릴 때부터 영웅이었던 이모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따라간다.


온통 그리움의 정서가 가득해서 한 편씩 읽을 때마다 안타까움에 잠깐이라도 마음을 추스리며 읽게 된다. 그런데 김초엽은 이 모든 그리움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어떤 작품 하나 반갑게 만나면서 행복하게 끝나는 단편이 없다. 억지로 떼어놓고 오랜 시간 그리워하게 하더니 만남을 주선하지는 않는다. 따뜻해 보이는 악마.



<관내분실>에서는 죽기전 사람의 뇌구조를 그대로 업로드하여 도서관에 저장한다.


★★★★

지금까지 읽었던 한국의 SF소설 중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읽었다. 아이디어도 좋고 그 아이디어를 솜씨좋게 녹여내서 개연성을 부여한다. 궁금증을 만들어 냈다가 풀어주는 과정도 자연스럽고 문장도 예쁘다. 그리움이라는 주제가 단순하긴 하지만 짧은 단편은 치밀한 설정과 구성보다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중요하니 그런 면에서 뛰어난 작품집이다. 계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편에서 솜씨를 보였으니 중단편도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공생가설>과 <관내분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멋진 SF단편집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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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누군가의 불어난 재산, 올라간 직급, 새로 딴 학위나 상장처럼 그의 외형적 변화에 대한 인정이나 언급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그 사람 자체, 그의 애쓴 시간이나 마음씀에 대한 반응이다.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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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신의학은 사회 구조적인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 개인의 심리적 문제들을 여러 연구와 실험을 동원해서 생물학적 원인으로 돌려놓는 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인간이라는 한 우주의 광활한 내면을 세로토닌 등 몇 가지신경 전달 물질을 앞세워 지나치게 단순화하기도 했다.
p.85

자신의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사람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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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저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아픈 몸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볍게 여기지 않길 바라는 속마음이 있다. 자신의 고통을 진지하게 대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몸이 건강할 때도 인간의 그런 바람이나 욕구는 거의 본능적이다. 하물며 몸이 아플 때야 더 말해 무엇할까.
p.18

근자에 정신 질환뿐 아니라 우울이나 불안, 부끄러움 같은 우리일상의 불편이나 곤란의 원인들을 뇌의 생화학적 문제로 몰아가는추세가 도를 넘었다는 느낌이다.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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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김보영 외 지음 / 돌베개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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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책벌레로 만든 SF

내가 처음 SF 소설을 읽은 것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인지 5학년 때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다. 한참 책을 읽는데 재미가 붙어 있었고 집에 있는 책은 이미 여러 번 읽어서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을 때 나의 눈은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세계동화전집, 위인전기, 어린이 백과사전과 이모가 던져주고 간 세계문학전집만 읽던 나에게 학교 도서관은 새로운 책들이 쌓여 있는 보물창고였다. 그리고 내 또래 많은 책벌레들이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 같은데, 추리소설과 SF 소설에 푹 빠져 버렸다. (무협지도 대표적인 장르소설인데 내가 무협지를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였고 그나마도 김용이 쓴 소설만을 반복해서 읽었다.) 이때 알게 된 작가들이 셜롬 홈즈, 뤼팽, 아가사 크리스티, 에르큘 포와로같은 추리작가들과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H. G. 웰즈같은 SF 작가들이다.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작품들이 많은데 아시모프의 《강철도시》와 《불사판매 주식회사》가 가장 인상깊게 남아 있다. 그 외에도 굉장히 많은 SF 소설을 읽었는데 하도 어릴 때 읽었던 책이라 다시 읽고 싶어도 내용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어 찾을 수도 없다. 어쨌든 내가 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은 SF소설과 추리소설 덕분이고 지금도 SF소설은 꽤 많이 읽는 편이다.


그 후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는 다양한 책을 읽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SF소설에 빠졌다. 정확히는 어릴 때 봤던 책을 다시 읽고 싶어서 SF를 찾다 다른 SF소설도 읽었다. 《강철도시》가 포함되어 있던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와 《파운데이션》 시리즈를 구매해서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아시모프의 팬이 되었다. 당시에 사놓았던 책 중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다시 출간되었지만 《로봇》 시리즈는 출간되지 않고 있다. 이 때 사놓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구하기 힘들 것이다.(중고 책이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SF소설은 책을 읽는 재미를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책을 사모으는 책덕후 기질까지 나에게 선사했다. 우리나라에서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 장르에 속하는 SF소설은 있을 때 사놓지 않으면 절판되어 다시는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지금은 구하기 힘든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라든지 아시모프의 '우주 삼부작' 시리즈같은 책들이 책장 어딘가에 꽂혀 있다.)


왼쪽으로부터 저자인 김보영, 박상준, 심완선


신문연재분을 엮은 SF 안내서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는 한국일보에서 약 1년간 세 명의 SF 관련 전문가가 'SF 작가와 작품 소개' 에세이 50편을 엮어 펴낸 책이다. 정말 미안하게도 나는 우리나라 SF 소설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나마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세 저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다. 좀 부끄럽기도 하다.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는 SF 독자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 같은 작가 50명과 작품을 소개한다. 주로 소설가를 많이 소개하지만 소설가 뿐만 아니라 만화가와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도 소개한다. 당연하다. 새로운 세계는 소설가만이 창조해 내는 건 아니니까. 모두 읽고 보니 35 명 정도는 작품을 읽거나 본 적이 있고, 나머지는 생경하다. 혹은 작품을 알고는 있었지만 작가는 모르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읽을 책들이 잔뜩 남아 있다.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처럼 한 분야에 대해 정리해 놓은 책을 읽으면 내가 잘 몰랐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는 점이 가장 좋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접하지 못한 작가와 작품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불끈 솟아오른다.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서 책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담아 놓는다. 혹여 절판이라도 된 책이 읽고 싶으면 짜증이 난다. 책구매 비용이 늘어나 몇달간 적자재정에 시달린다는 건 이런 책을 읽을 때 가장 좋지 않은 점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SF 소설 중에 하나다. 사진은 아마도 일라이저 베일리와 마지막으로 대화하기 전의 지스카드인 듯.


전문가가 정성들여 쓴 소개서

세 저자가 번갈아 가변서 굉장히 읽기 편하게 SF 저자와 작품에 대해 설명을 했다. 작가들의 삶을 소개하는 것도 좋고 작가들의 대표작이 좁게는 SF문학계, 넓게는 사회와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고 영향을 끼쳤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특히 신문 칼럼의 한 코너였던만큼 각 챕터가 글이 깔끔하고 군더더기없는 것이 마음에 든다. 많이 제거했다고는 하지만 신문 연재물인만큼 시의성 있는 주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흥미롭다. 연재가 끝난지 약 2년 정도 지났으니 상황은 많이 바뀌었으나 그 때의 상황을 상기하면서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SF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한 번 읽고 이해한 후에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놓을 수는 없다. 이제 이 책 속에 소개된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서 읽는 수고를 해야겠다. 갑자기 읽어야 할 책의 숫자가 확 늘어나긴 했어도 상관없다. 차근차근 거장들의 상상력을 더듬어 가는 즐거움을 누릴 생각을 하니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들을 생각하면 몹시 절망스럽기도 하다.


최근에 가장 인상깊게 읽은 중국 작가 류츠신의 《삼체》의 영화 포스터.


★★★★☆

SF독자라면 한 번 읽고 눈에 잘띄는 곳에 두고 틈틈히 읽을 책이다. 설명도 깔끔하고 50명의 작가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있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부담도 없다. 백과사전처럼 두고 읽어도 될 듯하다.


특이하게 글자 단위가 아니라 단어 단위로 줄바꿈을 한다. 그동안 시집 말고 단어 단위로 줄바꿈을 한 책을 본 적이 있나? 큰 문제는 아니지만 괜히 거슬렸다. 사진 설명을 사진 왼쪽에 세로로 써놓아서 책을 읽다가 90도로 돌려가며 읽어야 해서 불편하다. 이건 또 왜 이렇게 했을까? 편집이 좀 이상하다.


SF의 전체 역사는 아니겠지만 전반적인 경향과 알아야 할 작가들이 총망라되었다. SF 팬과 관심있는 독자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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