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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칠웅
리산 지음, 이기흥 옮김 / 인간사랑 / 2016년 11월
평점 :

삼가분진 三家分晉과 전진찬제 田陳簒齊
천자의 나라였던 주나라는 견융의 침입으로 수도인 호경이 함락된 후 낙읍으로 천도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다. 이후 약 350여년간 중국대륙은 수많은 나라가 세워지고 멸망하면서 흔히 말하는 춘추오패가 회맹을 통해 대륙을 호령하기도 했지만 주 왕실은 명목상으로나마 권위가 살아있기는 해서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진 晉(전국시대를 끝낸 진시황의 진 秦이 아니다)은 중원의 강자로서 춘추시대 초기에는 진문공의 선정으로 강대국이었으나 춘추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왕의 세력보다 강한 집안이 나타났고, 여섯 개의 집안은 서로 진의 땅을 나눠 가진 후 반목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조, 위, 한 세 개의 집안이 나머지 세 개의 집안을 멸문시키고 진을 쪼개어 각자 나라를 세우니 이것을 삼가분진이라고 한다. 나라를 세운 것을 주왕에게 인정받은 것은 50년 후이지만 이미 주왕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의미는 없었다.
태공망 강상(강태공)이 제후로 봉해져서 봉토로 받은 곳은 지금의 산동 지역으로 산물이 풍부하고 역대로 제환공, 관중, 포숙아 같은 훌륭한 군주와 더불어 명재상을 배출한 전통의 강국이었다. 하지만 춘추시대 말기 전씨 성을 가진 가문이 몇 대 재상을 세습하면서 왕의 권력이 약해지고 급기야 전씨가 강씨를 왕좌에서 쫓아낸 후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럿을 전진찬제라고 한다.
삼가분진은 그동안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많이 들어 봤지만 전진찬제를 전국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처음 봤는데, 시기적으로 겹친 것인지 실제적으로 전국시대를 여는 신호탄으로 봐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전국칠웅》의 저자인 리산은 삼가분진과 전진찬제를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리산 李山 (1963 ~ ) 현재 베이징 사범대학 교수. 중국 CCTV의 인문교양 프로그램인 '백가강단'에서 강의를 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초기 전국시대부터 꼼꼼하게 다룬다
전국시대는 삼가분진이 이루어진 B.C. 453년부터 진이 중국 전역을 통일한 B.C. 221년까지의 약 230년간을 말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삼가분진이 주의 승인을 받은 B.C. 403년을 출발점으로 따지기도 한다.) 긴 기간을 책으로 옮기려면 아무래도 주로 부각되는 인물이나 사건이 있을테고 상대적으로 무시되는 것도 있다. 저자에 따라 취사선택이 되는 인물 중에서 지금까지 전국시대를 다룬 책들은 보통 위의 오기와 방연, 제의 손빈, 진의 상앙으로부터 시작하는 책들이 많았다. 이들은 전국시대 초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장수들이면서 삶이 극적이라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춘추시대의 백미가 합려, 부차로 이어지는 오와 구천의 월 사이의 전쟁과 오자서, 손무, 범려의 지혜대결인 것처럼 전국시대는 초기에 유명한 인물들이 몰려 있다. 반면에 전국시대에는 춘추오패와 같은 눈에 띄는 패자는 없어서 왕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도 않고 딱히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전국칠웅》에서는 초기 전국시대의 시대상황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서 초기 판도에 큰 영향력을 미친 위의 문후, 무후, 양혜왕부터 역사를 다룬다. 특히, 주로 인물의 뛰어난 점을 강조하여 장수 위주로 설명하는 다른 책들과는 달리 《전국칠웅》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발전과 쇠퇴를 왕의 기량에 따라 판단을 한다. 그동안 이야기의 흥미로움에 밀려 무시되었던 부분을 자세히 살펴 놓았다. 아무리 훌륭한 인재가 있어도 왕이 발탁하지 않으면 재주를 떨칠 수 없으니 그동안 왕에 대해 너무나 관심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칠웅도. 중앙에 진이 3개로 분열되어 만들어진 조 趙, 위 魏, 한 韓이 자리잡고 있고, 왼쪽에는 진 秦, 아래는 초 楚, 오른쪽에는 제 齊, 오른쪽 위 한반도와 맞닿은 가장 변방에 연 燕이 자리잡고 있다.
종횡가의 시대, 전국종횡가서를 다룬다
초기 법가 성향의 두 정치인인 오기와 상앙에 대해서 설명한다. 오기는 위를 전국시대 초기의 강국으로 이끈 명재상이고, 상앙은 진을 발전시켜 훗날 천하통일을 할 수 있는 강국의 기틀을 다져 놓았다. 이후 전국시대는 합종연횡이라는 단어로 정리되는 종횡가의 시대로 접어든다. 종횡가는 결국 외교(라고 쓴고 권모술수라고 읽는다)에 의해서 타국과 연합을 하고, 중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인데 그동안은 합종책의 소진과 종횡책의 장의로 대표되어 왔다.
그런데 《전국칠웅》은 지금까지 읽었던 전국시대 관련 책과는 합종연횡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 소진, 장의가 한 문하에서 공부하여 소진이 먼저 출사하여 합종책으로 진을 궁지에 몰아 넣고 장의가 후에 진을 중심으로 한 종횡책으로 소진의 합종책을 깨뜨리는 것이 그간의 상식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장의가 먼저 나온다. 장의가 진에서 활약할 때의 상대는 주로 위의 혜시와 공손연이다. 연횡책의 시조로 장의를 내세운 것은 변함이 없지만 합종책의 시조는 송 출신이면서 위에서 활약한 혜시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1973년에 마왕퇴에서 발견되었다는 《전국종횡가서》의 연구성과를 적극 반영한 것으로 그동안 다른 책들이 사기의 소진, 장의 스토리를 그대로 답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비해 더 역사적인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소진은 장의 사후 20여년 후에 활동을 했다고 하니, 많은 전국시대 관련 책들이 개정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 것 같다. 단, 소진과 장의의 합종연횡책 대결은 전국시대 가장 흥미진진한 내용중에 하나라서 버리기는 참 아깝다.

손빈. 위나라 출신으로 제나라에서 활약한다. 손자병법을 저술한 손무의 후손으로 알려졌으며, 동문수학한 방연에게 누명을 쓰고 위기에 처하자 지혜를 발휘하여 제나라로 피신하고, 후에 마릉전투에서 방연을 전사시켜 원수를 갚는다.
흥미로운 내용, 좋은 번역과 저자의 입담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인기있는 시기는 춘추시대, 전국시대, 초한쟁패기, 후한말의 삼국시대이다. 굉장히 어지러운 시기이면서 각 시대를 대표하는 매력적인 문신과 장군들이 즐비하고 온갖 인간군상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무한투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그중에서도 전국시대는 다른 시기에 비해 더 많은 국가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모든 지혜와 무력을 총동원하던 시기라서 가장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시기인 것 같다. 원래부터 재미있는 시기를 《전국칠웅》의 저자 리산은 꽤 그럴싸한 입담으로 옛이야기 풀어내듯이 역사를 풀어 나간다. 단지 이야기 뿐만 아니라 당시 각 국가의 상황과 배경,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적절하게 곁들여져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어나가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종횡가의 대표적인 두 인물인 합종책의 소진과 종횡책의 장의에 대한 새로운 설명은 그동안 역사책에 있던 잘못된 정보를 잡아 주서어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읽었던 책들은 《전국종횡가서》의 내용을 소개는 하면서도 대부분 이전에 알려졌던 내용을 답습하고 있다)
중간중간 적힌 저자의 입담도 읽는 재미를 더하는데, '초희왕의 일관된 모습으로 보자면, 그는 마치 척추신경으로 모든 일을 사고하는 듯 일을 처리함에 머리는 도무지 쓰지 않는 것 같았다. (p.309)'처럼 저자의 평가가 아주 적나라해서 통쾌함을 준다. 그리고 범저가 소진왕을 만나서 원교근공책을 설명하는 과정에도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그러니 다른 나라를 치려면 먼저 한나라와 위나라부터 시작하여 불도저같은 전략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면 바로 한 발자국을 얻을 수 있습니다. (p.507)'를 볼 수 있다. 아무리 전국시대에 각국이 발전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고 하고, 중국의 고대문화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발전했다고 해도 2,300년 전에 설마 불도저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강의를 책으로 옮긴 것이라 들어 있는 표현일테니 걸고 넘어질 내용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다.

장의. 진에서 활동한 정치가. 연횡책을 구상했으며, 원교근공을 주창하여 이후 진이 전국통일을 할 수 있는 외교정책을 수립하였다.
약간 아쉬운 점도 있다
책의 여기저기에 확대경이라는 부분으로 글틀이 많이 있는데, 이게 별다른 내용이 아니라 그냥 책의 본문을 뽑아 글자를 크게 하고 굵게 해서 별칸에 다시 쓴 것일 뿐 다른 내용이 아니다. 정말 '확대'만 해 놓았는데 무슨 필요가 있나 싶다. 처음 보는 편집방식인데 쓸모있어 보이진 않았다.
사진과 지도가 너무 적다. 사진이야 크게 필요없다손치더라도 지도가 너무 적은 것은 많이 아쉽다. 전국칠웅의 대략적인 위치나 강줄기를 머릿속에 넣어 놓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독자는 각국의 위치에 기대어 설명한 부분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더구나 몇 개 있지도 않은 지도 속의 한자는 우리나라에 쓰는 정체자가 아니라 중국에서 사용하는 간체자인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출판된 책의 지도를 그대로 따와서 붙인 것 같은데 성의없어 보인다. 한자는 알아도 간체자를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많다. 이 좋은 책에 가장 기본 적이 것이 허술해서 완성도를 깎아 먹으니 아쉽다.
진의 시황제.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다. 하지만 사후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지 하지 않아 환관 조고, 막내아들 호해, 재상 이사가 배신하여 권력을 쥐게 되는 빌미를 주고, 결국 진은 전국통일 15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
오랜만에 역사책을 남은 분량을 세어 보면서 아쉬워 하며 읽었다. 아쉬운 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전국시대 역사책 중 가장 읽기 편하고 재미있었다. 주로 열전의 인물 위주로 역사를 설명했던 기존 책들과 달리 왕과 국가의 관점에서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설명해서 전국시대 전체를 조망하기에 굉장히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대단한 입담꾼이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이 책의 전작으로 《춘추오패》라는 책도 있는 것 같은데 찾아 보니 국내에는 번역출판이 되지 않았다. 꼭 읽어 보고 싶다.
전국시대에 관한 책 한 권만 읽어볼 생각이라면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