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 강의
왕리췬 지음, 홍순도.홍광훈 옮김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중국 최초의 영웅, 항우

역사시대인 (삼황오제와 하는 빼고) 은부터 계산하면 중국은 약 3,500년~4,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은을 지나 서주를 거쳐 동주 시대의 춘추전국시대와 전국을 통일한 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왕과 명장, 책사, 정치가들이 어지러운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사라져 갔다. 이후 한을 지나 삼국지의 시대까지 내려오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물들이 명성을 떨친다. 그 중에 영웅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숱하게 이름을 날렸지만 내가 꼽는 최고의 영웅은 초의 항우이다.


중국 역사에서 항우 이전에 어찌 영웅이 없을까. 하지만 겨우 20대의 나이에 진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호령하다 우미인을 곁에 두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항우의 모습만큼 임팩트 있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초의 이름을 항우에 붙이려고 할 때 계속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항우 못지않게 스펙타클한 삶을 살았던 춘추 말기 오의 명장 오자서다. 그런데 오자서는 항우와는 좀 다르게 아이돌같다는 느낌이다.(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외에 전국시대의 유명한 장수들 중 진의 장수들은 악랄하다는 느낌이고, 다른 나라의 장수들은 임팩트가 약하다. 무엇보다 항우 이전의 영웅들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물론 이게 모두 나의 편견이라고 지적당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다른 의견도 당연히 많을테지만 항우 이전에는 항우와 같은 당당한 느낌의 선이 굵은 영웅을 찾아 보기는 힘들다. 《항우 강의》는 가장 영웅스러운 항우의 일대기를 강의한 왕리췬의 강의를 책으로 펴낸 것이다.

 

항우 項羽. B.C. 232 ~ 202. 본명은 항적. 우는 항우의 자이다. 진나라 말기 초의 군주. 한의 유방과 천하를 겨루어 천하를 재패할 뻔 했으나 결국 유방에게 패배하고 만다.

 


종횡무진 시대를 누비는 항우 강의

왕리췬은 이전에 읽은 책 《진시황 강의》에서도 그랬지만 《항우 강의》 역시 시기 순으로 역사를 서술하지 않는다. 항우의 일대기를 재구성하자면 숙부인 항량으로부터 시작해서 장한에 의한 항량의 전사, 항량의 자리를 대신한 송의를 죽인 후 군권을 탈취하여 거록대전에서 장한을 물리치고 난 후 관중으로 진격, 이후 유방의 항복을 받아들인 후에 있는 일촉즉발의 홍문연 등, 이 차례로 나올 것 같은데 《항우 강의》은 그렇지 않다. 대체적으로는 시간순으로 서술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마치 항우라는 하나의 큰 주제를 잡아두고 생각나는대로 작은 주제에 따라 글을 쓴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항우의 일대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좀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작은 주제별로 내용을 전개해 나간다고 하긴 했지만 딱히 주제를 엮어 나가는 방향성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정말 '생각나는대로' 글을 쓴 것 같다. 좋게 말하면 종횡무진 전장을 누빈 항우의 일생을 적어내려간 것 같고, 나쁘게 말하면 책의 전체 흐름을 미리 생각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쓴 것 같다.

 

유방 劉邦 B.C. 247? ~ 195. 한의 초대 황제. 초 출신으로 진나라 말기 항우를 누르고 한을 건국한다. 본명은 유계 劉季. 유씨 집안의 막내라는 뜻으로 이름으로도 평민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흥미롭고 분석도 좋지만 너무나 결과론적이다.

《항우 강의》는 재미있다. 《진시황 강의》도 그렇지만 왕리췬은 역사를 대중에게 흥미있게 소개하는데 탁월하다. 읽는 동안 지루하지 않고 책장이 쉽게 넘어간다. 모든 사건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숫자를 매겨가며 정리를 잘 해 놓았다. 그런데 전작에서는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던 분석이 이 책에서는 너무 과한 것 같다. 너무 당연한 말을 분석이라고 써놓는데다 내용에 중복이 많아서 읽은 내용을 한 번 더 읽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더 큰 불만은 항우와 그 진영에 있던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하다는 것이다. 5부를 읽기 전까지 항우의 행동은 모두 유방에게 천하를 넘겨주기 위해 실수만 하는 천하의 멍청이로 표현한다. 항우의 수하에서 모사의 역할을 했던 범증에 대해서도 가차없다. 모든 항우의 행동은 망할 길이고, 범증 역시 적절한 조언을 하지 못하는 무능한 모사로 설명한다. 물론 항우가 무력에 비해 판세를 읽는 능력이나 재능이 없었다손치더라도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임시나마 패왕이 될 수 있었으며, 유방과 천하를 다툴 수가 있었을까?


명색이 '항우 강의'인데 이왕이면 항우의 탁월했던 점에 대해서도 좀 후하게 평가해 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마천은 서슬퍼런 무제 시대에 《사기》를 쓰면서도 항우를 본기에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고조 유방의 앞에 배치하기까지 했는데, 왕리췬은 그에 비해 항우에 대한 대접이 너무 좋지 않다. 춘추필법의 모범을 배우지 못한건가? 항우의 일대기는 어쩔 수 없이 역사의 승자인 유방과 일대일로 비교될 수밖에 없다. 시작점에서는 그저 동네 양아치에 불과했던 유방에 비해 초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었던 항우가 월등하게 유리했다. 가문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능력에 있어서도 유방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거록대전 후 관중으로 들어갔을 때까지만 보면 항우는 누가 봐도 전국을 통일한 중국의 군주였다.

 

왕리췬 (1945 ~ 허난대학교 문학원 교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사기 연구가. 중국 CCTV의 인문교양 프로그램인 백가강단을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해다

하지만 홍문연에서 유방을 살려준 후부터 항우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유방에게 계속해서 뒤통수를 맞고 휘하의 장수들은 유방에게 빼앗기고, 한 명 있던 모사 범증까지 떠니면서 철저하게 몰락의 길을 걷는다. 항우는 생애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했다고 한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당대 누구도, 심지어는 한신조차도 항우를 뛰어 넘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체를 대국적으로 보는 눈은 확실히 부족해서 결국 전략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형양에서 유방과 일진일퇴하는 동안 한신이 북방의 조부터 제까지 겸병해 버리자 결국 초 땅에 갇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잔정에 휘둘리는 모습도 항우의 패업을 가로막는 큰 요인이 되었다. 항우와 우미인의 스토리는 지금까지도 굉장히 유명한데, 저자는 항우가 아마도 우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내 생각에도 그렇다. 이건 전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잔정이 다른 휘하의 부하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면 얘기가 다르다. 특히, 숙부였던 항백이 홍문연이 열리기 전 장량을 만나고 유방과 사돈을 맺은 후에 결정적인 순간마다 항우의 실패를 유도하는 행동을 하는데도 아무런 처벌이 없는데서 친족을 과감히 잘라내지 못한 것처럼 한 세력의 수장으로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던 것 같다.


반면에 유방은 모든 여건에서 뒤지면서도 오로지 큰 도량 하나만으로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니 항우와 너무 대비된다. 물론 한을 세운 후 공신을 차례로 숙청한 것을 보면 정말 도량이 넓었던 것인지 의문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최소한 도량이 넓은 척이라도 한 점은 유방의 가장 큰 장점으로 보인다.

 

항우와 우희의 비극을 그린 영화. 패왕별희의 한 장면.


좀 성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다


왕리췬의 전작인 《진시황 강의》를 정말 만족스럽게 봐서 기대가 너무 컸는지 《항우 강의》는 좀 실망스러웠다. 특히 《진시황 강의》는 진의 부족함, 너무나도 철저한 법가에 입각한 정치체제 때문에 부정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주인공인 진의 입장에서 역사를 다룬 반면 《항우 강의》는 주인공인 항우 및 초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만 적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승자인 유방이 특별히 부각되는 것도 아니다. 항우의 일대기를 좀더 긍정적인 면에서 바라봐 주고 장점도 자세히 설명해 줬으면 좋았겠는데, 그 점이 아쉽다. 그래서 그런지 책 말미에에서는 항우의 좋은 점을 쓰려고 한 것 같은데 이미 늦었다.


마지막 항우에 관한 시들은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게 봤는데 다른 독자들도 읽을지는 모르겠다. 페이지수 채우기 위해서 덧붙인게 아닐까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 항우에 대해 큰 애정이 없어 보이는 저자가 시까지 줄줄이 수록한 건 좀 어색하다.


★★★★


항우의 패망의 기록이다. 이 책 한 권으로는 항우라는 영웅을 평가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항우의 찬양하는 책이 있다면 함께 읽어서 균형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나쁜 책도 아니고 재미없는 책도 아니다. 충분히 추천할 만한 책이다. 그저 《진시황 강의》가 좀더 좋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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