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구 교수의 인간의 경제학
이준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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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경제학, 아직은 어린 학문
행동경제학에 대한 책들은 그동안 꽤 많이 읽었다. 행동경제학의 아버지라 하는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고 잘 이해가 되지 않아 절망하다가 새롭게 번역한 책이 좋다고 해서 읽으려고 사놓고 대기 중이다. 최근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탈러의 책도 여러 권 사서 읽었고, 행동경제학 관점에서 거시경제학을 설명했다고 하는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실러의 《야성적 충동》도 찾아 읽어 봤다. 경제학은 원래 큰 관심이 없었는데 행동경제학에 흥미가 돋아서 오히려 거꾸로 경제학 전반에 관심이 많아졌다.


행동경제학은 연구한지 오래되지 않은 학문이라서 각론은 발전하고 있지만 아직은 총체적인 학문으로 정립되지는 않은 것 같다. 개별 학자가 연구한 분야가 비온 후 죽순 올라오듯 쑥쑥 치고 올라와 거대한 대나무가 되고는 있지만 아직 숲을 이루지 못한 느낌이다. 어쩌면 행동심리학을 경제학에 적용한 행동경제학은 원래부터 그럴 수 밖에 없는 학문인지도 모르겠다.


저명한 경제학자가 쓴 행태경제학 입문서
행동경제학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아 보고 싶어서 개괄서를 찾던 중 일본 학자인 도노모 모리오가 지은 《행동경제학》이 있었다. 그 외에 딱히 맘에 드는 책이 없었는데, 경제학 서적을 뒤적이던 중 이준구 교수를 알게 됐고, 그의 저작을 살펴 보던 중 행동경제학 관련 도서를 낸 적이 있는 것을 알았다. 개정판까지 나왔으니 꽤 오래된 책인데 왜 눈에 띄지 않았지? 일단 제목이 《인간의 경제학》이고 이준구 교수는 행동경제학을 '행태경제학'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눈에 검색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경제학에는 전혀 문외한인 입장에서 이준구 교수라는 분도 잘 모르니 내 눈에 띌 리 없는 책이다. 궁금증에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이준구 교수 1949 ~ .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쉽다

책을 읽기 전에 이준구 교수에 대해 검색을 해봤다. 굉장히 유명한 경제학자이고, 경제학원론 등 수많은 책을 쓴 사람이다. 예전에 들었던 이해하기 힘들었던 경제학 수업을 생각하면서 긴장을 하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경제학》은 굉장히 쉬운 책이기 때문이다. 그냥 좀 쉬운 책이 아니라 지금까지 읽었던 행동경제학 관련 책 중에서 가장 쉬운 책이다. 해외의 행동경제학자의 저서들은 굉장히 신경을 써서 공들여 읽어야 했는데, 《인간의 경제학》은 출퇴근 시간에 가볍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어렵지 않다. 잘 이해되지 않던 어려운 용어를 쉽게 풀어 놓았고 실례도 풍부하다. 개별적으로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개념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번역이 아니라서 문장도 이해하기 쉬웠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굉장히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책을 읽은 후, 경제학 책도 쉽게 쓰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동안 사려고 마음만 먹고 있었던 경제학 원론 책을 한 권 샀다. 물론 이준구 교수 공저.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 1934 ~ . 이스라엘 출신 경제학자. 심리학자로 시작해서 행동경제학의 초창기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전망이론'으로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행동경제학 전반을 정리해 놓았다

《인간의 경제학》은 행동경제학에 대해서 연구한 책이 아니다. 행동경제학에서 다루는 여러가지 이슈와 아이디어를 정리해 놓은 책이다. 저자가 애초에 행동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책에서 밝혔듯이 다른 분야에 비해 최근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행동경제학에 대해 연구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행동경제학을 연구하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행동심리학 연구를 노교수가 할 수는 없었을 테니 이 책은 태생적으로 종합·정리·소개하는 책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경제학》은 종합해서 정리한 후 소개하는 과정이 정말 잘되어 있다. 그동안 읽어왔던 행동경제학 책들과 비교해 봐도 이 책만큼 행동경제학을 잘 정리해 놓은 책을 보지 못했다. 기본적인 행동경제학의 개념과 용어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 다루었고, 행동경제학과 관련된 중요한 실험들도 충실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이 책 한 권만 읽으면 행동경제학 전반에 대한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누군가 나에게 행동경제학 책을 딱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하면 이 책을 권하겠다.


리처드 세일러 Richard H. Thaler 1945 ~ . 독일 출신 미국의 경제학자. 독일 출신으로 이름을 탈러라고 읽는 것이 맞지만 미국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세일러라고 표시한다. 행동경제학을 체계화한 공으로 2017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다 좋은데..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서술의 태도이다. 저자는 이 책의 내용을 다른 연구자의 연구성과를 '종합'해서 쓴 책이다. 1차 저작물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물론 책 말미에 출처를 충실히 밝혀 놓긴 했지만 본문 내에서도 '실험에 의하면'보다는 '행동경제학자 누구누구의 실험에 의하면'처럼 읽는 사람이 이론의 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명확히 알 수 있도록 썼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단정적인 서술표현도 많이 나왔는데, 1. 저자가 직적 실험해서 확인한 것이 아니며, 2. 행동경제학이 아직은 정립되지 않은 학문이라는 점에서 과하게 단정적인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

행동경제학을 빨리 이해하기 위해서 단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이 책이다. 이 책을 읽은 후에 행동경제학 전반에서 이슈가 되는 개념을 이해한 후 개별 학자의 책으로 범위를 넓혀 나가면 행동경제학을 이해하는데 최고의 방법이 될 것 같다. 행동경제학을 처음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behavioral economics 행동경제학? 행태경제학?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행동경제학이라는 용어보다 행태경제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처음 행동경제학이라는 용어를 들었을 때, 어차피 번역이지만 도대체 어떤 이유로 학문의 이름이 저렇게 되었는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어를 보면 어째서 그런 명칭이 되었는지 이해는 되지만 나는 적어도 용어 문제에서만큼은 이준구 교수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미 행동경제학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가 주장을 한다고 해도 행태경제학으로 바뀌기 쉽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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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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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내가 일하고 있는 영장류센터 근처에 있는 별장에서 불이 났다. 그 별장에는 어째서인지 야생동물들이 있는 케이지가 있었고 안에 있던 동물 중 침팬지 한 마리가 도망쳐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119 구조대는 영장류센터에 도움을 청했다. 내일 낮에 베를린으로 떠나려 했던 나는 별로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스승과 함께 침팬지를 구하러 한밤 중에 나갔다. 스승과 나는 침팬지로 오해받은 보노보를 구출해서 연구소로 돌아오기 위해서 밴에 태웠다. 스승은 항상 운전이 불안했다. 오늘따라 더 불안했는데 안 좋은 예감은 꼭 들어맞는 법. 스승은 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에 놀라 운전대를 틀었고 밴은 가드레일을 받아 버린다. 보노보를 안고 있느라 조수석에서 앉아 안전벨트를 하고 있지 않았던 나는 지니와 함께 앞 유리창을 깨고 튕겨나와 절벽으로 떨어졌다.


기대하면서 기다린 소설


정유정이 3년만에 쓴 소설이다. 사실 나에게 3년만이라는 시간이 큰 의미는 없다. 정유정을 안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의 소설을 읽은 것도 차례대로 읽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로 소설이 나온다고 해서 기다기긴 했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을 읽었고 정유정이 쓴 소설 중에 네 번째로 읽는 소설인데 세 권 모두 굉장히 만족스럽게 읽었기 때문이다. 먼저 읽었던 책들은 모두 긴장감을 강하게 주는 책들이라 가슴을 잔뜩 졸이면서 읽었다. <진이, 지니>를 읽기 시작할 때, 각오를 단단히 하고 첫 장을 넘기는 것은 당연하다. 절대로 읽는 사람을 편하게 놔두지 않는 사람. 정유정은 나에게는 그런 이미지를 주는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에 소제목만을 읽으니 <28>의 느낌이 물씬 났다. <28>에 개가 중요하게 등장했다고 하면 <진이, 지니>에는 영장류인 보노보가 등장한다. 인간과 보노보의 교감이 중요한 소재일 것 같다. 그리고 또 어디선가 피가 튀겠지.. 라고 생각을 했는데 좀 다르다. 이전 세 권에서는 사람이 죽어 나가고 피가 튀는 장면을 마치 실제로 해 본 것처럼 자세하게 묘사했었는데 <진이, 지니>는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안심했다.


정유정. 1966 ~ .


하드웨어는 그대로인데 소프트웨어는 바뀌었다


짧게 끊어지는 문장, 부사도 극도로 자제해서 사용하고, 접속사는 볼 수가 없다. 정유정의 소설을 읽으면 최대한 절제된 문장과 빠른 속도감에 항상 감탄을 한다. <진이, 지니>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읽었던 그의 소설 그대로다. 전혀 변함이 없이 군더더기없이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긴장의 끈을 놓기도 힘들다. 지금까지처럼 조각가가 돌을 쪼듯이 정성스럽게 가다듬었을 것이 틀림없는 정제된 문장이 이어진다.


그러데 내용은 다르다. 이전 소설에서 느꼈던 심장을 꽉 조이는 듯한 긴장감이 많이 사라졌다. 긴장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같지는 않다. 오히려 예전 소설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함이 많이 스며들어 있다. 도구는 그대로인데 결과물인 조각품이 달라진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피칠갑을 하고, 다시 읽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던 고통스러운 외부묘사는 굉장히 많이 사라졌다. 대신에 내면 묘사에 집중했다. 그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살을 에이는 느낌이 많이 줄어든 것은 틀림없다. 물론, 이진이의 심정이 편해 보이는 건 아니다.


보노보. 인간과 가장 가까우면서 성격이 온순한 영장류.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주인공인 이진이는 큰 사고가 났지만 벼랑 밑에 있던 나무에 걸려서 겨우 살았다. 좀 아프긴 했지만 걸을만 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영장류센터로 가는데... 몸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평소 걷는 것과는 다르게 걷는다. 어? 뭐지?라고 생각하는데.. 이진이는 자신이 보노보인 지니(스승이 이름붙여 준)의 몸속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진이의 영혼이 지니의 몸 속에 빙의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이제부터 진이는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민주는 때마침 근처에서 노숙을 하던 처량한 백수였고, 보노보의 몸으로 병원에 갈 수 없는 진이는 민주에게 천만 원을 사례비로 지급하기로 약속한 후 민주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향한다. 보노보의 모습으로 민주와 처음 대화할 때는 힘으로 굴복시키기도 하고 글을 써서 설득을 한다. 


이쯤되니 도대체 작가가 이 소설을 어떻게 끌고 나가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끝맺으려고 하는 거지? 어째서 보노보(지니)의 몸 속에 진이가 빙의된 거지? 그럴듯한 이유라도 나중에 알려 주려나?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결국 정유정은 독자를 설득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다. 병원에는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보노보의 몸 속에 빙의된 진이의 영혼이 병원으로 간다고 해서 정말 되돌아 갈 수 있긴 한건가? 책장은 대책없이 넘어간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불안감


정유정은 자신의 작품속 인물들을 절대로 편하게 놔두지 않는다.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들을 보면 인물들을 극한상황까지 밀어 붙여서 주인공이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든다. 해피엔딩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도 않는다. 진이는 어떻게든 병실에 누워 있는 자기 몸 곁으로 가려고 한다. 그런데... 간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어렴풋이 그 곁에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이쯤에서 나는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유정이 주인공을 편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진이는 아마도 결코 편안하게 결말을 맞기 힘들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진이의 몸체는 그냥 죽어 버리고 진이는 지니의 몸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걸까? 이건 또 이거대로 굉장히 충격적인 결말인데.. 제일 바라는 결말은 극적으로 자기 몸으로 돌아가서 얼마동안 코마 상태에서 치료를 받다가 정신을 차린 후 민주와 웃는 모습으로 재회하는 것인데, 정유정이 그렇게 놔둘 리는 없잖아. 그냥 마구 불안한 마음 뿐이다. 도대체 진이를 어떻게 할 거냐? 책의 결말은 내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수긍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슬프다.




진이와 지니의 공감


보노보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주인공 진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인간에게 자유를 뺏기고, 몸까지 빼앗긴 지니. 예상과는 달리 진이와 지니가 대화를 한다든지 하는 장면이 나오지는 않았다. 몸을 빼앗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니의 기억을 진이가 볼 수 있게 되고 기억이 현재로 흐르면서 진이는 자신의 육체가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행복한 숲속의 삶을 살다가 인간의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지니에게 미안하다. 일부러 한 것은 아니지만 지니의 몸까지 빼앗은 것도 미안하다. 결국 진이는 육체가 죽는 순간 자신도 세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예상과는 다른 결말이다. 원래 작가가 해피엔딩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니들 인간이 아무리 잘났어도 자연을 니들 편한대로 이용해 먹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작가는 묻는다. 자연을 그대로 좀 놔두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지니를 자연으로부터 분리시켜 인간세계의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사람이 물론 제일 나쁘다. 하지만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자기 편의에 의해서 지니의 몸을 떠나지 않고 있는 진이 역시 그런 자신의 모습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니의 것은 지니에게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리고 민주는 그 고생을 해 놓고 결국 아무런 댓가를 받지 못했다. 좀 뭐라도 챙겨주지..




훔치고 싶은 정유정의 문장


정유정이 쓰는 문장은 정말 멋지고 깔끔하다. 글쓰는 걸 좋아하는 나도 그의 문체를 따라해 보고 싶어서 부사와 접속사를 빼고 되도록 단문장으로 글을 써 보려고 노력해 봤다. 하지만 그게 정말 어렵다. 군더더기를 모두 빼고 글을 쓰려고 하니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접속사를 빼고 쓰는 건 더 어려워서 그러려면 앞뒤에 있는 문장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접속사가 없어도 글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게 말로 하는 것처럼 만만치가 않았다. 그만큼 정유정의 글은 멋지다. 아마도 일반적인 소설가보다 퇴고를 훨씬 여러 차례 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멋진 작가. 멋진 문장 솜씨이다. 따라하고 싶고 훔치고 싶다.


★★★★☆


정유정의 소설은 읽으면 도대체 뒷수습을 어떻게 할지 항상 긴장을 하면서 읽는다. 긴장감만큼은 우리나라 소설 중에 정유정 소설을 이길만한 소설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진이, 지니》도 마찬가지다. 다른 소설들은 긴장감에 잔혹함이 곁들여져 있다면, 《진이, 지니》는 긴장감 속에 따뜻함이 묻어 있다는 것이 좀 다르다.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 다 떠나서 재미있다.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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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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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야화에 등장하는 타임머신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상인 압바스는 어느날 신기한 물건들로 가득찬 새로운 가게에 은쟁반을 사러 갔다. 바샤라트라고 하는 가게 주인은 여러 가지 물건을 보여 주다가 수직으로 서 있는 원형고리를 보여 준다. 이 고리에 손을 넣으니 손은 통과하였으나 반대쪽에서 손이 나오지 않다가 잠시 후 반대쪽에서 손이 튀어 나온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손이 나타났다. 타임머신이다.


압바스는 말도 안되는 신기한 물건을 보고 협잡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인이 경험한 세 가지 얘기를 듣고는 이 물건이 과거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압바스는 이 물건을 보고 과거에 자신이 저질러 후회하고 있는 일을 되돌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곳에 있는 타임머신은 만들어진지 얼마되지 않기 때문에 더 먼 과거로 가기 위해서는 이십 년 전 과거로 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는 카이로로 가야 한다. 압바스는 바샤라트의 소개를 받아 카이로로 여행을 떠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테드 창. 1967 ~ . 중국계 미국인. 1~2년에 한 편씩 중단편 SF소설을 쓴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SF 작가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소설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테드 창의 신작


테드 창은 영화 <네 인생의 이야기>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이 있다는 걸 알고 영화를 보기 전에 먼저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었다. 대단한 작가였다. 테드 창은 실제상황같은 배경을 하나 정한 후에 그 배경 속에 상상력을 가득 채워 놓는다. 채워놓은 상상력이 배경과 잘 어우러져서 마치 실제같다. 아주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상상을 현실인 것처럼 꾸며 놓는다. 


테드 창의 소설이 더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언제쯤 소설이 나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중편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를 구해서 읽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인터넷 서점에서 신작이 나온다는 알림이 떴다. 당연히 바로 주문. 읽던 책이 있어서 그 책을 읽은 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천일야화의 서술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SF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상 속에 현실을 못박아 버린다


여전히 대단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치밀하다. 테드 창의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의 일들이 모두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잘 몰라서, 공부가 부족해서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먼저 실려 있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천일야화>의 액자 이야기 구조를 완벽하게 따르고 있다. <천일야화>를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셰헤라자드가 칼리프에게 얘기를 하는 안에 다른 화자가 있고 또 그 화자가 얘기를 하던 중에 다른 얘기를 만들어 내고.. 끝도 없이 액자 속에 다른 액자가 끼여들면서 얘기가 진행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철저히 그 구조를 따랐기 때문에 이 단편이 <천일야화>의 어디 쯤에 들어가 있어도 이질감이 들지 않을 정도다.


책의 제목과 같은 단편인 <숨> 역시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미리 정보를 주지 않는다. 자락을 깔아 놓지 않고 그냥 직접 얘기를 진행해 버린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슬슬 분위기 파악을 해 나가고 '아! 얘기를 하는게 사람이 아니라 로봇 비슷한 건가 보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로봇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정해 놓고 설득할 생각도 하지 않은채 소설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전편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독자들이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양자붕괴에 의해 발생하는 평행우주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때 생길 수 있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소재 하나를 잡아 집요하게 상상한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타임머신이 주제이다. 그 시대적 배경이 천년대 초반의 어느 시점이고 글을 쓰는 스타일이 천일야화에서 따온 것일 뿐, 타임머신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타임머신이 미래,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우주관으로 글을 쓴다.


<숨>은 엔트로피에 관한 우화이다. 숨을 쉴 수록 아르곤의 무질서도가 높아져서 세상의 아르곤 밀도가 낮아지면 결국 인류의 멸망이 올 것이라는 아이디어로 소설을 썼다.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는 읽자마자 스키너의 유명한 심리실험이 생각났다. <옴팔로스>는 지구가 창조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들이고,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양자붕괴에 의해 평행우주가 생긴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사기를 쳐 먹을지 연구하고 있다.


테드 창은 하나의 소재에 꽂히면 그 소재로 인해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현상들을 집요하게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상상하는 것 같다. 그 후 가장 그럴 듯한 내용으로 소설을 써내려간다. 그 내용들이 전개되는 과정이 무리가 없어서 설득력이 있다. 소재 하나를 잡아 굉장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는 느낌이다.


옴팔로스 Omphalos는 델포이 신전에 있는 돌로서 세상의 중심을 표시한다.


★★★★☆


장르문학이면서 그렇게 인기가 있는 장르도 아닌 SF소설인 <숨>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떡하니 올리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테드 창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건 오로지 영화 한 편 뿐이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어쨌든 멋진 작가의 책이 인기가 있는 것은 충분히 기쁜 일이고 나도 강력히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다.


이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적이 있는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가 책 속에 들어 있어서 불만이 있다. 이미 읽은 책이라서 약 150페이지 정도 읽을 필요가 없었던 건 많이 아쉽다. 아쉬움에 별 반 개를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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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나오키 1 - 당한 만큼 갚아준다 한자와 나오키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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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한만큼 갚아 준다.


*책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블 경제의 종말과 정글 속에 던져진 은행원들


1980년대 중반, 엔고의 시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신호탄으로 일본 경제는 역사상 유례없는 대호황의 시대를 맞게 된다. 주가는 폭등하고, 부동산 가격도 따라 올랐다. 한때 도쿄의 땅을 다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고 했고, 세계 50대 기업 중에서 일본기업이 30개가 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할 사람은 부족하고 인재는 더욱 부족했다. 이른바 일본의 버블경제기이다.


한자와 나오키도 버블 경제기에 몸값이 최고인 상태에서 '산업중앙은행'에 입사한다. 은행으로부터 인재로 인정받은 순간, 다른 은행이나 회사에 뺏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받는다. 버블 경제의 시대, 한자와 나오키는 은행 입장에서 다른 곳에 빼앗길 수 없는 뛰어난 인재였다.


경기가 언제나 호황일 수는 없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적인 대호황기는 그리 길지 않았고,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경제는 어두운 터널 속에 갇히고 말았다. 산업 전반이 침체에 빠졌고, 한자와 나오키가 근무하고 있는 '산업중앙은행'은 '도쿄제일은행'과 합병하여 초대형 은행인 메가뱅크가 되었다.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한자와 나오키는 그 와중에 지뢰를 밟아 버렸고, <한자와 나오키>는 5억엔이라는 엄청난 돈을 부실대출한 한자와 나오키의 생존을 위한 분투기이다.


이케이도 준 池井戸潤 1963 ~ . 일본의 소설가. 


정글과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한자와 나오키>는 일본 초대형 은행의 한 지점에서 벌어지는 은행원간 암투를 다루는 소설이다. 일본소설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많아서 다양한 소설들이 번역되서 소개되고 있고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많이 올라 있다. 지금 바로 생각나는 내가 느끼는 일본소설은..

1. 만화책을 소설로 옮긴 것 같다.

2. 추리소설이 많고 극적 반전에 집착을 많이 한다.

3. 가볍고 읽기 쉽고 소시민적이다.

4. 초반에 특이한(또는 엽기적인) 소재로 몰입감이 대단하다.

5.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정도일 것 같다. 심심풀이로 손에 잡고 읽으면 시간은 잘 가는데 마지막에 실망을 하고 읽은 책 목록에 꼭 남길 필요는 없는 그런 책들이 많다. 2할 타율 정도 되는 것 같다.


<한자와 나오키>는 지금까지 읽어 온 일본소설들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본격적으로 일본의 최근 사회 분위기(그래도 나온지 15년이나 지났다), 그 중에서도 경제를 많이 반영하고 있고 직장에서 흔히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사건들이 내용을 이룬다. 특히, '부하의 공은 상사의 공, 상사의 잘못은 부하의 잘못'이라는 말로 대변되듯이 부하의 공적을 상사가 가로채고 상사의 잘못을 부하가 뒤집어쓰는 은행의 모습은 우리나라 직장인들도 읽다 보면 공감을 할 수 있다. 


정글과 같은 직장, 먹느냐 먹히느냐.


위기에 처한 한자와 나오키는 이제 5억엔을 회수하지 못하면 은행에서 낙오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이라고 해서 낙오한 직장인의 삶이 평탄할 리가 없다. 극한까지 몰린 한자와 나오키는 분식회계로 회사의 자금사정을 속여서 대출을 받은 히가시다 미쓰루 사장을 찾아 5억엔의 일부라도 찾으려고 한다. 나오키 과장이 이렇게 애쓰고 있는 동안 지점장인 아사노 다다스는 5억엔 부실대출 책임을 한자와 나오키에게 떠넘길 생각만 한다. 국세국에서는 한자와 나오키보다 먼저 히가시다 미쓰루를 찾아 국세를 받아 내려고 한다.


3중고에 시달리면서도 한자와 나오키는 어떻게든 사건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합법적인 방법만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편법과 불법의 경계선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한다. 어차피 잡아 먹지 않으면 잡아 먹히게 되어 있으니 이것저것 가릴 계재가 아니다. 마지막 결말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불법을 눈감아 주기까지 한다. 한자와 나오키는 정의로운 인물은 아니다. 단지, 적들보다 덜 불법적인 사람일 뿐이고, 이 책의 주인공이여서 독자가 감정이입을 한 사람일 뿐이다. 새가슴을 지닌 일반적인 직장인과는 달리 직장내의 정치와 음모에 탁월한 점이 있다. 그래서 통쾌하다.


원작은 2004년에 발간되었다. 한국판에서 첫번째 책은 부제가 드라마로 유명한 대사인 '당한만큼 갚아준다'로 정해졌지만, 원작의 부제는 '우리들, 버블입행조'(버블시대에 은행에 입사한 직원)이다.


통쾌한 결말, 이제 다음 이야기로..


한자와 나오키는 결국 불법대출 사건을 해결한다. 사건의 전말은 처음 예상과는 사뭇 다르다. 히가시다 미쓰루 사장을 찾기 위해 애쓰던 중 은행장과 히가시다 사장이 중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큰 불법 가운데 작은 불법이 숨어 있었다. 히가시다가 숨겨 놓은 재산을 탈탈 털어서 은행의 대출금을 갚고 덤으로 한자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아사노 지점장의 약점까지 잡아서 자신이 원하는대로 인사이동을 요구한다. 속이 시원해지는 결말이다.


와중에 아사노의 부인이 우연히 지점장실에서 만난 한자와에게 아사노를 잘 부탁한다고 고개를 조아리는 장면은 마음을 좀 짠하게 한다. 아사노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딸을 사랑하고 가정을 지키려는 모습과 그 틈을 노려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한자와의 모습은 묘하게 선과 악을 뒤틀어 놓은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애초에 한자와라고 해서 꼭 선은 아니고 아사노라고 해서 악은 아니다. 그저 자신이 있는 처지에서 어떻게 상대방을 누르고 올라갈까 고민을 하던 두 짐승의 싸움일 뿐이었다. 그냥 한자와 나오키 과장이 우리 편일 뿐이다.


2013년 3/4분기 TBS 드라마에서 방영된 <한자와 나오키>. 주인공인 사카이 마사토가 열연했고,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하여 엄청난 화제와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아 원작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기다리는 팬들이 많았다.


★★★★☆


소설 <한자와 나오키>는 우리나라에는 같은 이름의 일본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서 함께 유명해 졌다. 드라마는 소설의 1부와 2부를 다뤘고, 소설은 4부까지 출간되어서 드라마의 뒷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찾아 봤지만 소설을 찾을 수 없어서 아쉬워 했다. 인플루엔셜 출판사에서 전권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고, 기쁘게도 서평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읽어 볼 수 있었다. 더불어 내년 2/4분기에는 <한자와 나오키>의 3부와 4부를 다루는 드라마 시즌2가 방영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것도 정말 반갑다.


굉장히 재미있다. 은행시스템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많고, 일본은행 시스템은 우리나라와는 또 다를테니 익숙하지 않은 용어도 있다. 그래도 조금 어려운 용어는 책 속에서 자세히 설명을 해 놓아서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책이다.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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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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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제국이 멸망하고 있다

인류는 이미 우리 은하를 꽉 채우고 있다. 인간이 거주하는 행성은 약 2,500만 여개. 은하계에 퍼져 있는 인구는 모두 400경 명, 4,000,000,000,000,000,000 명이다. 수만년 동안 은하계를 지배하고 있는 은하제국이 모든 인류를 지배하고 있으며, 은하제국의 수도는 트랜터이다.


팔십 평생을 '심리역사학' 연구에 몰두한 해리 셀던은 공공연히 은하제국이 멸망할 것이며 3만년 동안 야만스러운 시대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언(이라기보다는 증명)을 한다. 제국의 불순분자이다. 결국 은하제국의 통치자들은 해리 셀던과 그를 따르는 10만여 명이 넘는 과학자들을 은하 변방에 있는 터미너스라는 불모지로 추방한다. 해리와 추종자들은 터미너스에 정착하여 파운데이션을 세우고 3만 년으로 예상되는 야만의 시대를 1,000년으로 줄이기 위해 세워 놓은 미래 역사의 설계를 진행한다. 장대한 미래 우주역사 대서사시, 파운데이션 시리지의 시작이다.


그 유명한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F 작가 중 한 명인 아이작 아시모프,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SF 시리즈 중 하나인 파운데이션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로봇 시리즈와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원래 세계관이 다른 소설이었는데 나중에 세계관을 하나로 합쳐 버렸으니, 로봇-파운데이션 세계관의 첫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시모프가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감명을 받아 썼다고 한 만큼 <파운데이션>은 은하계의 장대한 미래역사를 다룬다. 관찰자로 등장하는 가알 도닉의 눈으로 바라 본 해리 셀던과 터미너스에 파운데이션이 건설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터미너스로 추방된 후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던 해리 셀던의 예측과 반전이 흥미롭다.


아이작 아시모프 Isaac Asimov 1920 ~ 1992. 소련 출신의 미국 작가. 유태인으로서 3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엄청나게 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아서 클라크, 로버트 A. 하인라인과 함께 세계 3대 SF 작가로 불리운다. <파운데이션> 시리즈, <로봇> 시리즈, 우주 3부작이 대표작.


심리역사학, 은하대백과사전.. 이건 페이크다!

심리역사학은 소설 <파운데이션>에서 가장 먼저 제시한 개념으로, '개인의 행동은 추측할 수 없지만 인간을 집단으로 다루면 그 흐름을 파악하고 조정까지 할 수 있다'는 가상의 학문이다. 해리 셀던은 심리역사학의 창시자이며, 일군의 심리역사학자들과 함께 1,000년 후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후 30,000년 동안 지속된다는 것을 증명해 내고 그 기간을 1,000년으로 줄이기 위해서 은하계 변방에 파운데이션을 세운다. 파운데이션의 목적은 인류의 지식을 집대성한 사전인 '은하대백과사전'을 만들어서 인류의 지식을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다. 


<파운데이션>은 처음 파운데이션을 설립하는 과정을 보여준 후, 파운데이션이 발전해 나가는 역사를 다루는데, 은하대백과사전을 편찬하는 것은 사실상 은하제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페이크였다. 그 사실을 몰랐던 사전 편찬자들은 현실이 흘러가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여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 샐버 하딘 시장에 의해서 물러나고 샐버 하딘은 샐던 위기(파운데이션이 처한 큰 위기, 해리 셀던이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을 한 방향으로 미리 설계해 놓았다)를 무사히 넘기면서 권력을 잡고, 파운데이션은 차츰 주변 성계를 지배해 나간다.


<파운데이션>의 시점에서는 이미 인류의 근원지가 어딘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지구를 찾아 나서는 것이 시리즈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가 된다.


심리역사학이 멋진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역사의 흐름을 통계학적으로 다룬다는 것과 그 흐름을 컨트롤해서 미래의 방향을 바꾼다는 소설의 아이디어는 정말 멋진 것 같다. 하지만 소설에서 세부적으로 적용할 때, 실제 역사에서는 중요한 순간, 단 몇 사람의 결단에 의해서 해리 셀던이 선택한 방향으로 나간다는 점이 좀 불안하다. 파운데이션의 첫 영웅인 샐버 하딘도 그렇고 이후에 등장하는 호버 말로도 마찬가지인 게, 그 개인들이 적절한 자리에 있어서 적절한 판단을 하지 않았다면, 혹은 무능력해서 계획을 실패했다면 해리 셀던의 계획은 크게 벗어났을 것이다. 일단 한 번 정해진 루트에서 벗어난 샐던 프로젝트(해리 셀던이 안배해 놓은 미래의 역사)는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으므로 장대한 계획은 망가질 수밖에 없다.


심리역사학은 통계학적인 사회학이기 때문에 큰 집단을 다룰 때는 유용하겠지만 개인의 심리를 다룰 때는 유용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소설 맨 처음 단 한 사람의 판단을 측정해서 파운데이션의 설립 장소를 터미너스로 예측한 것은 반전으로서는 멋진 장치이지만 심리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너무 개인의 판단에 도박을 걸었기 때문에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마찬가지 이유로 샐버 하딘이나 호버 말로같은 파운데이션 초기의 지도자들이 굉장히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서 셀던 프로젝트를 수호해 나가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스러워 보인다. (결국 사단이 나고 말긴 하지만..)


애플이 파운데이션 드라마판 판권을 구매했다고 한다. 이미지는 왼쪽부터 해리 셀던, 뮬, 아르카디아 다렐로 추정된다.


★★★★☆

SF 소설을 좋아한다면 아시모프를 모를 수가 없고, 아시모프를 안다면 <파운데이션> 시리즈를 모를 수가 없다. SF 소설의 기념비적인 작품인만큼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예전에 9권짜리 책을 읽었는데 개정되어 나온 책을 오래 전에 샀다가 이제서야 새로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을 산 후에 혹시 <로봇> 시리즈를 출간할 예정이 없는지 출판사에 문의를 했는데 별다른 계획은 없는 것 같다. SF 소설이 그렇게 독자층이 넓지 않은 편이라서 출판사에서 쉽게 손대지 못할 것 같기는 하다.


강력히 추천한다. 특히, 언제까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절판된 후에 후회하지 않도록 SF 팬이라면 꼭 전권을 소장해 놓을 것을 권한다. (나왔을 때 사놓지 않아서 후회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모프의 우주 3부작도 그 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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