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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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도 많고 읽을 것도 많다

올 한 해는 아무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가장 많이 읽었다. 펴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가,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상식적이지 않은 속도로 소설을 발표하는 작가, 대체로 단편소설집보다는 장편소설이 더 좋은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나의 인상은 이렇다. 게이고의 소설은 몰입도가 좋고, 길지 않아서 금세 읽을 수 있다. 대체로 재미있는 편이라 좀 어렵거나 재미없는 책을 읽은 후에 읽으면 머리를 식힐 수 있어서 좋다. 머리가 복잡할 때 아무 생각없이 읽으면 복잡한 일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 길어야 2~3일이면 한 권 읽을 수 있으니 책을 읽었다는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효용성이 굉장히 좋다는 느낌?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아마도 올해 마지막으로 읽는 것 같은 게이고의 소설이다. (아직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이 많아 내년에도 게이고 소설을 몇 권 더 읽을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 東野圭吾 (1958 ~ ) 일본의 소설가. 가장 인기있는 소설가 중 한 명.


가가 형사가 주인공인 5편의 소설, 단편집이라니..

게이고의 유명한 시리즈 중에 하나인 '가가형사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아.. 첫 편을 읽기 시작하면서 살짝 탄식을 내뱉었다. 게이고가 쓴 소설 중 단편집도 몇 권 읽었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재미없었고 설정도 무리가 많았다. 책에 대한 정보를 좀 알고 샀다면 이 책을 고르지는 않았을텐데.. 책이든 영화든 줄거리가 있는건 미리 정보를 확인하지 않는게 보통이라 이번에도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이전에 《악의》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악의》는 내가 읽은 게이고가 쓴 소설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하는 작품 중에 하나로 마치 형사 콜롬보같은 모습에 인상이 깊었다. 큰 키와 덩치, 냉정한 표정, 그리고 피의자에게 반복되는 끈질긴 질문, 사건 해결. 피의자일 때 만나면 뿌리치기 힘든 귀찮은 스타일을 가진 형사다. 물론 모든 형사가 끈질긴 추적을 하고 있겠지만..


《거짓말, 딱 한 개만 더》에서도 가가 형사가 가진 캐릭터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가 형사에게 조사를 받는다. 조금씩 엉뚱한 질문을 던지며 좁혀 들어오는 가가 형사. 애써서 막으려 하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 다섯 편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식으로 사건이 풀린다.


일본 배우 아베 히로시. 가가 형사 캐릭터를 많이 맡아 연기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배우.


가가 형사는 이러하다..

게이고는 가가 형사의 속내를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작가의 시점으로 쓴 소설이지만 작가는 오로지 범인(또는 그에 상당하는 조사받는 사람)이 불안해하는 심리만을 표현한다. 범인의 갈등, 불안감은 자세히 표현하면서 가가 형사는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 불쑥 튀어나오는 행동, 그리고 엉뚱해 보이는 질문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범인과 가가 형사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래서 범인은 더 불안해 보이고 가가 형사는 더욱 더 냉정해 보인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은 심리트릭(이라고 하는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을 사용해서 독자를 더 헷갈리게 만든다. 게이고는 계속해서 범인의 속마음을 보여 주면서도 마치 범인이 아닌 것처럼 표현을 한다. 범인의 속마음을 볼 수 있는 독자는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속이지는 않을테니까. 하지만 가가 형사가 추리하는 과정을 보면서 '어? 이 사람이 범인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큰 반전없이 그 사람이 범인이다. 첫 편을 읽고 나면 다음편부터는 이 수법이 눈에 보이지만 게이고는 세 번째 단편부터는 변화구를 날려서 독자에게 반전이 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본격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범행을 밝히는 과정이 중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이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진행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읽다 보면 범인이 누군인지 비교적 빨리 알 수 있고 가장 중요한 단서는 각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상황을 주욱 보여주고 범인이 누구인지 맞춰보라는 것이 아니고 '범인은 이 사람인데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보여줄께.'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게이고의 소설들이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것이 많은데 가가형사시리즈는 그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최근에 7권짜리 가가형사 시리즈 전면개정판 세트가 나온 것 같다. 탐은 나지만 이러다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만 읽게 될 것 같아서 묻어 두었다. 그런데 이후에 가가형사 시리즈가 또 나왔다. 너무 작품이 많아서 따라 읽을 수가 없다. 게이고 소설만 읽을 수는 없으니..

의외로 좋은 단편소설집

처음에 밝혔듯이 게이고가 쓴 소설은 대체로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되도록 단편집은 잘 선택하지 않는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그런 면에서 예상을 많이 벗어나는 책이다. 다른 단편집에 비해서 훨씬 낫다. 다섯 편이 모두 깔끔하게 끝이 나고 앞의 두 단편 이후 사건 전개가 익숙해 졌을 때 슬쩍 던져주는 3~5편의 반전도 좋다. 역시 쉽게 읽을 수 있고 몰입감이 뛰어난 것이야 정평이 나 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지금까지 읽어 본 게이고의 단편집 중에서 제일 낫고 좀 떨어지는 장편보다도 낫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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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 게임이론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22
와타나베 타카히로 지음, 기미정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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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론

게임이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여러 책을 읽어 봤다. 어릴 때부터 뭔가 대단한 진리가 게임이론 속에 들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게임이론에 밝으면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게임이론을 좀 체계적으로 알기 위해 들었던 인터넷의 강의는 듣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 복잡한 수식이나 표가 잔뜩 들어간 책도 읽기 귀찮았다. 물론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지식은 사상누각이라는 것은 잘 알지만 내가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될 건 아니니까 단편적인 지식을 남들보다 조금 많이 알고 이해하는 정도라면 충분해 보인다. 《도해 게임이론》은 그런 내 필요에 잘 맞는 책이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게임이론'.. 참 매력적이다 하지만 미리 얘기하자면 겨우 200페이지 남짓, 절반이 그림과 도표인 이 책은 생각만큼 만만한 책이 아니다.


저자 와타나베 다카히로 渡辺隆裕. 수도대학도쿄(도쿄도립대학) 교수. 수도대학도쿄는 일본 최상위권의 공립대학이다.


그림으로 풀어 설명하는 게임이론

이 책은 AK Trivia Book 시리즈 중에 한 권으로, 나는 이 시리즈 책이 몇 권 있다. 잡스러워 보이는 서브컬쳐 분야의 책들이 대부분이라서 《도해 게임이론》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표지도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고 별로 얻을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의외로 《도해 게임이론》은 굉장히 충실한 게임이론 책이다. 본격적인 강의서적도 아니고 가볍게 읽을 책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데 일부분이긴 하지만 '기본 개론 + 일부 심화 학습' 정도 역할을 충분히 한다.


책은 왼쪽에 게임이론에 대한 지식 + 오른쪽에 지식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해'라는 것이 게임이론에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은게, 게임이론을 설명하려고 하면 개인이 선택하는 전략을 표로 작성하여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로 써 있는 것을 도표로 읽으면서 찬찬히 보다 보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게임이론은 다양한 학문을 색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데 특히 경제학 분야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내쉬 균형, 순차적 게임, 역진적 귀납법

그동안 각주에 해당하는 게임이론에 관한 책만을 읽어 왔다. 게임이론 전반을 훑어보지 않은 것인데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비어있는 구석이 많다. 그런데 처음 우습게 생각한 《도해 게임이론》을 읽으면서 내가 비워 놓은 곳이 어떤 부분이고 무엇을 더 이해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이 게임이론을 모두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 역시 저자가 관심을 가진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집중해서 비어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도해 게임이론》의 저자는 특히 순차적 게임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관심있던 것은 죄수의 딜레마같은 동시게임이었는데 이 책은 게임이론에 대한 나의 관심과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었다. 순차적 게임에서 최적의 해를 찾기 위해 수행하는 '역진적 귀납법'은 그동안 어렴풋이 퀴즈문제에서 접해보기는 했지만 이 책에서 그 방법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깨달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순차적 게임에서 내쉬균형을 찾고 그 과정에서 경제학의 이슈를 게임이론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도해 게임이론》이 순차적 게임에서 중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은 내쉬 균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내쉬균형은 게임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게임 당사자들의 이익이 최대화되어서 전략을 바꾸지 않는 고정전략이라고 대충 이해하면 된다. 《도해 게임이론》에서는 기본 정보만 가지고 내쉬 균형을 찾는 방법으로부터 시작해서 확률에 의해서 찾는 법, 정보가 없을 때 내쉬균형을 찾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 인센티브, 신호보내기 게임 등 경제학의 주요 논제들을 게임이론으로 설명하고 그 해법을 제시한다. 이 과정에서 가정에 의해 제시된 간단한 숫자와 표를 주고 설명을 하는데 대충 봐서는 안되고 꼼꼼하게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이게 기본적인 내용이라서 이해가 되지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만만치 않겠다는 느낌이다. 도표를 보다 보면 수학공부하는 것 같다.


존 내시 John Forbes Nash, Jr. 1928 ~ 2015. 미국의 수학자이자 경제학자. 수학에서는 편미분 방정식과 리만가설의 다양체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고, 경제학 분야에서는 비협력게임과 내시 균형의 개념을 제시했다. 1958년 필즈상 수상후보에 올랐으나 나이가 너무 적어서 다음에 기회가 있다고 하여 수상에 실패했다. 1994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고, 2015년 아벨상을 수상했으나 수상 후 귀가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리만 가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조현병을 앓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만든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2)'로 더욱 유명해졌다.


생각보다는 만만치 않다

겨우 200 페이지를 넘는 책이고 그나마 한쪽은 설명, 다른 한쪽은 그림 및 도표이기 때문에 굉장히 짧은 책이다. 하지만 이 100여 페이지의 설명이 처음 게임이론을 보는 사람에게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차근차근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연속적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나 베이지언 내쉬균형같은 개념은 밑바탕이 되는 지식이 없으면 몇 페이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해서 여러가지 게임이론의 이슈를 살필 수 있는 것은 좋은 점이다.


번역의 아쉬움

일본학자가 쓴 이론서적을 읽을 때, 번역자가 그 분야에 대해 지식이 부족할 경우 용어 번역이나 이론 부분에서 문제가 생긴다. 일본어 한자를 그대로 한글로 읽기만 한다고 번역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후통첩게임'은 책 속 96페이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처음 봤다. 그리고 138 페이지에서 할인율 설명할 때 '할인율이 낮으면'은 거꾸로 생각한 듯하다. D=0.8을 할인율이 크고 D=0.5가 할인율이 작다고 설명하는데 0.8, 0.5가 남는 가치이므로 0.8이 할인율이 작은 것이고 0.5가 할인율이 큰 것이다. 따라서 '할인율이 작으면 장기간 교섭을 계속하면 손실이 작다'고 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이게 일본에서 사용하는 용법이 다른 것인가 싶기도 하고 번역자가 잘못 번역한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설명이 애매해서 이후 할인율 관련 설명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추측으로는 번역자가 게임이론과 경제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따로 감수를 받은 것 같지도 않아서 중요한 부분 용어와 이론에 오류가 생긴 점은 너무 아쉬운 부분이다.


게임이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회학이론 두 개 중에 하나이다.


★★★☆

게임이론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특히 도표를 꼼꼼히 살펴 보면서 읽으면 내쉬균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게임이론 전반을 설명한다고 하기는 힘들다. '순차적 게임에서 수학적 방법으로 내쉬균형 찾기'에 특화되어 있는 책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번역이 좋지 않아서 기존 게임이론 지식을 어느 정도 동원해서 용어와 이론을 조금씩 바꿔 가며 읽어야 한다는 점은 썩 좋지 않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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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자(振子)를 본 것은 그때였다.
교회 천장에 고정된, 긴 철선에 매달린 구체(球體)는 엄정한 등시성(等시性)의 위엄을 보이며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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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 -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이동원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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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죽은 이유를 밝혀야 하는 열외 병장

나(이필립)은 수색대다. 군에 오면서 남자다운 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훈련 중 무릎이 망가진 이후 광주통합병원에 4개월씩 2차례, 총 8개월을 치료받는 사이에 자대에서는 열외취급을 받게 되었다. 계급은 병장이지만 아무도 나의 말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몸은 고달프지만 마음만은 편한 탄약고 근무를 말뚝서면서 제대할 날만을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기무대 박대위가 찾아왔다. 나를 광주통합병원에 다시 보내 주겠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얼마남지 않은 군생활을 환자로 편하게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붙지 않는 혜택이 있을 리 없다. 박대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발자국'은 내가 광주통합병원에서 뭔가 조사해 주기 원한다. 곰곰히 생각하던 나는 친하게 지냈던 정성한에게 무슨 일어났는지 추리해 냈고, 정성한이 죽은 것까지 알아챘다. 이미 공식적으로는 자살로 결론이 난 정성한 병장의 사망. 두 사람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정확히는 기무대의 상관인 '낯선 발자국'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위해 박대위가 움직인 것이다. 두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대보다 익숙한 광주통합병원으로 돌아온 나는 정선한이 죽은 이유를 캐내기 시작한다.


이동원 1979 ~ . 소설가. 2014년 《살고 싶다》로 세계문학상 수상


노골적인 제목, 예상과 다른 내용

처음 읽은 이동원의 소설이다. 사실 누군지 잘 모른다. 제목이 노골적이다. '살고 싶다'. 제목만 봐서는 누군가 주인공이 고통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칠 것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내용이 많이 다르다. 주인공은 군대에서 짬밥대접 받지 못하는 찬밥 신세이고, 자대보다는 병원에서 자기 자리를 잡고 있는 군대 부적응자이다. 소설의 배경은 군병원이고 주요 등장인물들은 환자다. 모두가 최소한 부대내에서는 '쓸모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쓸모없는 존재들 속에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고 권력관계에 따라서 다른 환자를 억압하는 사람도 등장한다. 최고 권력자의 편의에 따라서 을 사이의 권력관계가 생기는 것을 보니 씁쓸한 느낌이다.


군대라는 장소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군대는 터무니없는 폐쇄성 때문에 존재 자체로 두려움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최근에 휴대폰 반입이 가능해져서 폐쇄성이 많이 약화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더구나 사고의 책임이 지휘관에게 지워지기 때문에 부대내의 각종 사건, 사고는 축소, 은폐되거나 그렇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게다가 어지간한 남자는 모두 군대를 경험했고 많은 남자들이 군대내의 부조리를 목격했기 때문에 군 관계자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주인공 보정이 너무 강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선한이 자살을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자명한데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 임무가 이필립에게 주어졌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이필립이 정성한과 가장 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필립은 대단한 사람이다. 굉장히 찌질하게 찌그러져 있었던 이필립은 엄청난 추리력의 소유자다. 처음 사건조사를 의뢰하는 박대위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병원으로 되돌아가서 할 일이 있다는 말만 듣고서 정선한의 신상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을 미리 알아채고, 정성한이 죽은 것까지 스스로 추리해낸다. 첫 추리 이후에도 그의 추리는 거침이 없다. 항상 빈틈이 없고 죄있는 자의 의표를 찌르고 결정적인 순간에 진실을 밝혀낸다.


게다가 담력도 어마어마하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을 때, 병실내에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병실장에게 엉겨붙어서 승리를 거둔다. 상대가 대위 정도 되면 긴장같은 건 하지 않는다. 특히 기무대 대위 정도의 명령쯤은 무시하고 농담을 던지는 대담함을 가졌다. 설득력은 또 어떤지.. 누구든지 이필립이 궁금해서 물어 보면 모두 말해 준다. 그것도 토씨하나 어긋남이 없는 진실만을 토로한다. 자기 때문에 병사가 죽어 죄책감에 자살하려던 대위는 말할 것도 없다. 특별한 이유없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병사도 다 털어 놓는다. 마치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님같다.


주인공인 이필립이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주인공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꼭 셜록 홈즈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의 단서만 봐도 전체를 파악하고 전투력도 뛰어나다. 그래서 홈즈가 추리를 시작하면 독자는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위협에 빠져도 별로 긴장되지 않는다. 우리의 명탐정 홈즈 선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위험을 빠져 나갈테니까.. 이필립 병장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부대에서 투명인간 취급을 당했어도 앞으로 인생이 막막해도, 친구가 죽은 이유를 알 수 없어도 심장 두근거리는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국군광주통합병원. 소설 속 약칭 광통. 현재는 장소를 옮겨 함평병원으로 이름도 바뀌었다. 사진 출처: 광주in  http://www.gwangjuin.com/

흥미로운 설정에 비해 아쉬운 전개

시작은 재미있다. 폐쇄적인 공간인 군대, 의문스러운 자살을 한 친구, 권력을 지닌 알 수 없는 존재, 작은 권력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병사들. 이 모든 매력적인 요소들 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뻔 했다. 사실 이필립이 처음 병실에 와서 병실장을 꺾을 때는 속시원함도 느꼈다. 그런데 계속해서 어려움없이 모든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해 버리니 흥미가 떨어진다. 긴장의 풍선이 끝까지 부풀어 올라 터지는게 아니라 중간 어디쯤에서 구멍이 뚫려 피식 바람이 빠지는 것 같다.


밑줄긋고 싶은 문장이 굉장히 많은 책이다. 명문장,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 많다. 그런데 그 좋은 문장들이 이 책과 어울리는지, 또는 적혀있는 그 곳에 꼭 있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멋있는 말이 많았다. 따로 떼어 놓으면 참 좋은 말인데..


★★★☆

아직은 몇몇 좋아하는 작가를 제외하면 한국소설을 고르는 눈이 없어서 대충 아무 소설이나 닥치는대로 사서 읽고 있다. 이미 너무 많이 모아 놓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책을 읽는데만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 무슨 문학상을 받은 책 위주로 읽고 있고 있다. 《살고 싶다》는 게중에 딱 중간정도 되는 책이다.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는데 조금 아쉽다. 지루하지는 않아서 금세 읽을 수 있다. 어렵지도 않다.


딱 별 3.5개만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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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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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왜 읽지?

일년이면 대략 70~80 권의 책을 읽는다. 아예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많은 양일수도 있지만 정말 많이 읽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리 많지도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 만족할만큼 읽지 않고 있어서 항상 더 많이 읽을 것을 다짐하곤 한다. 읽는 책의 종류도 잡다하고 구태여 가리지 않는다. 손에 잡히는대로 읽는 편이다. 최근에는 주로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다.


이런 나에게 책을 왜 읽는지 물어 보면 둘 중에 하나다. 지식을 넓히는 것이 첫 번째고, 재미를 위해서가 두 번째다.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 읽는 책들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재미'라고 한다면 결국 내가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표는 '재미'이다. 나에게 재미있는 책은 좋은 책이고 재미없는 책은 나쁜 책이다.


내가 구태여 책에 대한 감상 앞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으면서 내 독서 행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봤기 때문이다.


앤드루 포터 Andrew Porter 1972 ~ . 미국 소설가. 영문학 전공. 예술학 석사. 현재 트리니티 대학 문예창작과 조교수.


우연히 읽은 소설

전혀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아마도 읽을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했을 책이다. 출근을 하면서 읽고 있던 책을 두고 집을 나섰고,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알라딘도서관에서 눈에 띄는대로 책을 골랐다. 책을 고를 때는 양자론이나 상대성이론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목을 보고 예상한 바와는 달리 소설책이었다. 게다가 어지간해서는 잘 읽으려고 하지 않는 단편 모음집. 별로 끌리지 않았으나 이왕 빌린 것,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다.


첫 번째 소설인 <구멍>은 12년 전 3.65m 구멍에 빠져 죽은 친구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써 놓았다. 두 번째는 <코요테>, 어머니와 점점 멀어져 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 <아술>은 자녀가 없는 부부의 집에 하숙하는 교환학생인 고등학생에 대한 감정... 책을 읽으면서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그런데 뭐? 이게 도대체 어떤 얘기지? 어쩌라는 거야?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앨범을 펼쳐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듯한 1인칭 시점으로 쓴 소설이다. 단편 소설 열 개가 실려 있다.


오래된 사진첩을 펼치고..

열 편의 소설은 모두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어떤 순간의 기억과 감정을 1인칭의 화자가 '담담한' 필치로 써내려가고 있다. 마치 앨범의 한 부분을 펼쳐 놓고 '맞아. 이 때 이랬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열 명 있는 것 같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나만의 별난 경험, 혹은 나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 경험들은 한 사람의 인생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치고 오랫동안 기억속에 각인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경험한 것,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친구들과 얘기할 때 아무리 내가 열심히 얘기해도 상대방의 반응이 시큰둥할 때가 있다. 은근 부아가 치밀 수도 있지만 대체로 얘기하는 사람의 전달하는 기술이 떨어질 수도 있고, 상대방은 아예 관심도 없고 흥미도 못 느끼는 얘기를 할 때 그렇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으면서 내가 책을 읽는 방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너무 담담하다

나에게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딱 그런 느낌이다. 소설 열 개의 소재는 하나하나가 굉장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읽는 동안은 전혀 충격적이지 않았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벌어진 별거 아닌 일처럼 담담하게 느껴진다.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담담하게 써낸다'는 건 어떻게 들으면 굉장히 고급스럽고 감성적인 것 같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사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 친구의 죽음, 서른 살 차이가 나는 연인, 강간사건이 담담한 추억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작가인 앤드루 포터의 글쓰는 솜씨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 얘기를 재미있게 쓸 줄 모르는 작가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책을 잘못 읽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일년 내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앞에 있는 두 편을 읽고 책에 대한 서평을 좀 찾아 봤는데 대부분 호평 일색이다. 어떤 SNS 친구는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았다고 한다. 이쯤 되니 나의 독해력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재미없게 읽었던 책이 몇 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어차피 읽는 건 나니까..

음악이든 미술작품이든 문학이든 예술작품을 볼 때 전문가의 눈이 아닌 내 눈으로 보고 싶고 나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싶다. 대체로 일치하는 편이지만 심하게 다를 때는 아무래도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서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이런 나의 불안감이 가장 컸던 소설이다. 그리고 나에게 문학에 대한 감성이 부족하고 말초적인 재미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봤다. 하지만 어차피 판단은 내가 하는 것. 수많은 호평 속에 그렇지 않은 의견 하나쯤 있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지루하고 재미없다. 단편소절집이면 한 편씩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너무 몰입이 되지 않는다. 담담한 필치 속에 감성을 건드리는 것도 모르겠고 공감도 되지 않는다. 그냥 사건의 한 순간을 재미없게 담아놓은 것에 불과하다. 서평을 읽던 도중에 이 책이 원래 출판되었다가 절판되고 소설가 김영하가 소설을 읽어 주는 팟캐스트에서 낭동한 후 재출간되어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전형적인 미디어셀러 아닌가? 사실은 재미없는 소설인데 '김영하'가 읽어 줬기 때문에 뜬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아니면 명작의 재발견이었는데 내가 몰랐던 걸까?


★★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 특히 나처럼 책 속에 면면히 흐르는 섬세한 감정을 잡아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지루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사실 그런 섬세한 감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없는 책을 많은 사람들의 호평에 압도되어 재미있다고 착각하고 싶지는 않다.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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