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이나 보루(堡壘)에 기대 지키기만 하는 것은 원래 패왕이 즐겨 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정이 뜻과 같지 못하니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 P159
싸움의 양상은 어쩔 수 없이 한왕 유방 쪽이 바라는 대로 광무간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진지전(陣地戰)으로 자리 잡아 갔다. - P160
"대왕, 한왕 유방의 아비어미와 그 계집은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지난번 산동에서 잡아들인 뒤로 군중에 끌고 다닌 지 벌써 두 해째입니다. 왜 그들을 내세워 유방을 불러내지않으십니까?" - P162
패왕이 그런 한왕을 한 번 더 충동질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네놈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면서 여러 번 과인을 성가시게 하였으니, 그 죄를 네 아비에게 물어야겠다. 이제 삶기 전에 칼질부터 하려고 도마에 묶어 두었으니, 어쩌겠느냐? 어서 과인에게 항복해 죄를 빌고 아비를 살리겠느냐? 아니면 아비가 눈앞에서 국거리가 되는 꼴을 보겠느냐?" - P164
국이 다 끓거든 나에게도 한 그릇을 나눠 주기 바란다. - P164
그날 한왕이 비정하게 태공으로부터 등을 돌린 것은 천하를 위해 가족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공리(公理)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게 자신과 태공이 아울러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 P166
바라건대 한왕은 나의 도전을 받아들여 단둘이서 자웅을 가리기로 하고, 애꿎은 천하 뭇 백성들은 괴롭히지 말기로 하자. 우리 두 사람이 저 아래로 내려가 당당하게 겨뤄 보는 게 어떠냐? - P167
장량이 가만히 물었다. "어떠십니까? 홀로 몸을 움직이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오. 꼼짝할 수 없소. 화살이 용케 염통은 피해 갔지만 갈비뼈를 맞춘 듯하오." 한왕이 죽어 가는 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장량이 차갑게 받았다. "그래도 일어나셔야 합니다. - P182
"네가 하도 안달을 부리니 일러 준다. 우리 대왕께서는 지금쯤 성고성에 내려가 시녀들에게 발을 씻기며 쉬고 계실 것이다. 그러니 네 긴히 할 말이 있거든 이 번 아무개 어르신에게나여쭈어 봐라." 그 말에 분통이 터진 패왕은 더욱 소리를 높여 번쾌를 꾸짖었다. - P197
항타와 용저는 모두 오래 싸움터를 누빈 맹장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 둘만을 놓고 보면 용맹에서도 지략에서도 항타는 용저에 미치지 못했다. 한 장수로서 패왕의 신임과 총애를 보다 많이 받는 것도 용저 쪽이었다. 그런데도 항타를 대장으로 삼은것은 종성에 대한 편애라는 패왕의 말기적 증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 P202
"역 선생 이기는 비록 유자였으나, 또한 누구 못지않은 맹사였다. 그를 저리도 참혹하게 죽게 만들었으니, 이 일로 내가 치러야 할 값도 결코 헐하지는 않겠구나." 역이기의 상여가 성문을 나가는 것을 보고 한신이 탄식하듯 말했다. - P205
"천하인의 반열에 들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럼 나더러 우리 대왕이나 항왕과 더불어 천하를 다투기라도 하라는 말씀이오?" 괴철은 그래도 눈 한번 깜빡 않고 한신의 말을 받았다.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아직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닙니다." - P206
한신이 그답지 않게 큰 칼을 빼 들고 앞장서 싸움을 걸었다. "나는 한(漢) 대장군 한신이다. 용저는 어디 있느냐? 애꿎은 군사들은 다치게 하지 말고 나와 단둘이서 자웅을 가려 보자!" - P221
스스로 왕이 된 전횡마저 양 땅으로 달아나자 제나라는 모두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대(代), 조(趙), 연(燕)에 이어 제나라까지 한신에게 떨어지면서, 그 주군인 한왕 유방은 땅만으로 보면 천하의 셋 가운데 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줄곧 패왕에게 유리하던 대세가 비로소 한왕 쪽으로 뒤집힌 셈이었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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