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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ㅣ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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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모르고 읽으면 더 재미있을테니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책을 훔쳐 달아난 소년, 책 속에 빠져 들다
바스티안은 뚱뚱하고 허약하고 공부도 못하는 열한살 소년, 잘하는 것이라고는 상상을 하는 것밖에 없다. 비오는 날, 여느때와 같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피해 눈에 띄는 고서점에 들어 간다.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서점 주인은 바스티안에게 짜증을 내고, 그러던 중 전화가 와서 서점의 안쪽으로 들어간다. 바스티안은 서점 주인이 읽고 있던 책에 마음이 끌리고 순간적으로 책을 들고 서점을 나와 버린다.책들 들고 학교로 간 바스티안은 수업에 들어가기 싫었고, 퀘퀘한 학교의 창고에 틀어 박혀 그 책, <끝없는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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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엔데 Michael Andreas Helmuth Ende (1929 ~ 1995) 독일. 대표작으로 <모모>와 <끝없는 이야기>가 있다. 미하엘 엔데가 <끝없는 이야기>를 쓰기 전에 <모모>를 한국어로 처음 번역한 번역가 차경아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끝없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고서점 주인인 코레안더는 차경아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코리아에서 따왔을 것이라고 한다.
위기에 빠진 환상세계
환상세계는 위험에 빠졌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퍼지면서 환상세계를 잡아 먹고 있어서 세계의 존재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세계의 주인인 '어린 여왕'이 병에 걸렸고, 병을 고치치 못하면 환상 세계는 없어질 운명이다. 어린 여왕은 카이론에게 환상세계를 구할 영웅을 찾으라는 명을 내리고, 카이론은 위기를 해결할 유일한 존재인 초록피부 종족의 아르테유를 찾아 간다. 용맹한 아트레유는 카이론에게서 어린 여왕의 힘의 증표인 아우린을 받아 들고, 환상세계를 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도 모르는 채로 모험을 떠난다.
환상세계의 구석구석을 돌아 다니며 모험을 하던 아트레유는 죽음의 산맥에서 행운의 용인 푸후르를 만나 친구가 되어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 아트레유는 여행 중에 만난 남쪽신탁소에서 우유랄라를 만나 위기의 원인을 알게 된다. 환상세계가 사라지는 이유는 어린 여왕이 이름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고, 환상세계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누군가 어린 여왕에게 새 이름을 지어 줘야 한다. 하지만 환상세계의 존재는 아무도 어린 여왕의 이름을 새로 지어줄 수 없고, 다른 세계의 사람이 환상세계로 넘어와서 이름을 지어 줘야 한다. 아트레유는 구원자를 만나기 위해서 환상세계의 경계선을 찾아 나서지만 바람 거인들로부터 환상의 세계에는 경계선이 없다는 말을 듣고 절망하게 된다. 결국 어린 여왕을 찾아가 환상세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는 보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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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장정이 멋진 <끝없는 이야기>.
구원자 바스티안 환상세계 속으로..
어린 여왕은 아트레유를 보고를 받았지만 아트레유는 이해할 수 말을 한다. 이미 구원자는 어린 여왕의 이름을 알고 있고, 단지 그 구원자가 어린 여왕의 이름을 불러 주기만 하면 된다. 아트레유가 한 모험은 구원자를 찾기 위한 모험이 아니라 구원자가 아트레유의 모험을 따라 가면서 어린 여왕에게 데려 오는 임무였다고 한다. 이쯤에서 책을 읽고 있던 바스티안은 구원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어린 여왕이 등장하자마자 바로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은 '달아이', 구원자는 책을 읽고 있는 바스티안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 여왕은 아트레유와 대화를 하면서 끊임없이 바스티안에게 이름을 불러 줄 것을 요청하지만, 바스티안은 믿을 수도 없고,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용기도 없어서 어린 여왕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어린 여왕은 어쩔 수 없이 '방랑산의 노인'을 찾아가는 마지막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방랑산의 노인은 환상세계의 모든 이야기를 적고 있는 존재인데, 어린 여왕의 부탁을 받아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처음에 바스티안은 방랑산의 새로 쓰기 시작하는 책이 무슨 내용인지 몰랐지만 이야기가 진행이 되면서 그 내용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친구들을 피하기 위해 고서점에 들어간 순간부터 책을 읽고 있는 바스티안, 그리고 아트레유의 모험을 거쳐 어린 여왕은 다시 방랑산의 노인을 찾아 가고, 노인은 또 처음부터 책을 쓰기 시작하고.. 이야기는 마지막이 처음이 되어 <끝없는 이야기>가 끝도없이 이어진다. 바스티안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외친다.
달아이야! 내가 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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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세계라면 빠질 수 없는 용. <끝없는 이야기>에서 하얀 용인 푸후르는 아트레유의 친구로서 아트레유와 함께 모험을 한다.
매력적으로 연결된 현실과 판타지
현실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어린애가 있다. 우연히 읽게 된 책 속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세계와 여왕과 영웅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아이는 매력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가고 그 세계의 창조자가 되고, 영웅이자 주인이 된다. 대략적인 내용만 보면 전형적인 이세계 판타지물이다. 하지만 <끝없는 이야기>는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를 이어가는 방법이 굉장히 독특하다.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매력적인 환상 세계에 푹 빠져 읽긴 하지만 왜 바스티안이 그 책을 읽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씩 현실 세계의 일들이 책의 내용에 영향을 끼치고 아트레유는 거울 속에서 바스티안의 모습을 보기까지 한다. 급기야 책 속의 어린 여왕은 빨리 바스티안에게 오라고 독촉하기까지 한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미하엘 엔데가 쳐놓은 <끝없는 이야기>의 덫을 알게 되고, 끝없이 이야기에 빨려 들어 가게 된다. 줄거리를 모르고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내용이 신선하게 다가올 것이다.
바스티안이 스스로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며 구원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망설이는 장면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이름 한 번 부르면 되는데 그걸 하지 않아 어린 여왕이 방랑산의 노인을 찾아가게 만들고 환상세계가 끝없이 순환되는 장면에서는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바스티안이 눈물을 흘리며 어린 여왕의 이름을 부를 때,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아마도 어릴 때 이 책을 읽을 때 나도 어린 여왕의 이름을 따라 외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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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는 <Neverending Story>라는 제목으로 1984년에 영화로 만들어 졌다. 같은 제목의 주제가도 굉장히 유명했다.
동화같은 전반부, 그 이상을 담고 있는 후반부
<끝없는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에서는 바스티안이 책을 손에 넣고 학교 창고에서 책을 읽는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로 되어 있다. 위기에 빠진 환상세계를 구하려는 아트레유를 바스티안의 시선으로 쫓아간다. 아트레유의 모험을 따라가면서 작가가 만들어낸 기기묘묘한 환상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어린 여왕, 갖가지 환상세계의 생물들, 판타지라면 빠질 수 없는 용 등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생물들과 이야기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펼쳐진다.
동화같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는 바스티안이 책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후반부에 이르러 분위기가 많이 바뀐다. 책을 읽으면서 환상세계에 깊은 애정을 느낀 바스티안은 그 속의 인물들의 바람을 듣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영웅이 되고 칭송을 받는다. 이제 임무를 마친 주인공은 위인이 되어 역사에 남고 멋지게 현실세계로 돌아가면 될 일이다. 하지만 <끝없는 이야기>는 그런 예상을 비틀어 버린다. 바스티안은 칭송을 받을수록 교만에 빠지고, 환상세계 속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트레유와 사이가 멀어진다.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바스티안은 크사이데의 꼬임에 빠져 황제가 되기 위한 대관식을 거행하다 아트레유의 공격을 받아 제위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환상 세계에서 바라는 것을 하나씩 이룰 때마다 현실 세계를 잊게 되고, 늙은 황제들의 도시에 가서는 바스티안 이전에 환상 세계를 만들어 냈던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까지 보게 된다.
전반부가 재미를 선사한다면, 후반부에서는 깊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보여 준다. 환상에 사로잡혀 몰두하게 되면 현실을 잊게 된다고 경고한다. 운이 좋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위치를 차지했을 때 교만하면 어떤 결과를 빚게 되는지도 보여 준다. 자신을 진정으로 걱정해 주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잘 살펴보라고 충고하고, 달콤한 말만을 일삼는 사람을 곁에 두고 그의 말을 들었을 때 당할 수 있는 처지에 대해서도 보여 준다. 멋지게 금의환향을 할 바스티안을 기대했는데, 점점 나쁜 길로 빠지는 바스티안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노골적으로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충고를 하지만, 이미 소설 속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유치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외에도 책을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가 굉장히 많다. 어릴 적의 꿈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꿈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지는 어릴 적 상상의 세계, 장자의 호접몽과도 연관이 있어 보이는 구성, 우로보로스, 카이론, 스핑크스 등 곳곳에 등장하는 신화와 상징체계 등도 함께 생각하면서 읽으면 의외로 지적인 흥미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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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보로스 Uroboros. 우로보로스는 원래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으로 그려지며 영원한 회귀와 끊임없는 재생을 상징한다. <끝없는 이야기>에서는 희고 검은 두 마리의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책의 표지와 어린 여왕의 펜던트인 아우린에 새겨져 있다. 마지막에 바스티안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통로의 역할도 함으로써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상징물의 역할을 한다.
어릴 때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감동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하도 어릴 때 읽었기 때문에 대략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만 세세한 내용은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야기라는 것, 주인공이 책 속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 낸다는 것, 나중에는 어떤 문제가 생긴다는 것 정도만 기억을 하고 있었다. 기억 속의 <끝없는 이야기>는 재미있는 동화책이었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기 때문에 다시 읽어 보려고 책을 샀는데, 무척 두껍다.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데다가 양장본이라서 들고 다니기 부담스러워서 한참을 읽지 않고 놔두었었는데, 다시 읽으니 정말 재미있다. 간혹 추억보정으로 재미없는 책을 재미있다고 기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그런거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어린 아이 때 읽으면 정말 좋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트레유와 함께 모험을 하고, 바스티안과 함께 환상 세계를 만들어 내는 신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좋은 조언도 얻을 수 있다. 어른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특히 후반부에서 바스티안의 잘못된 선택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책이 두꺼워서 한 번 읽으려면 큰 맘먹고 달려 들어야 할 수도 있지만 일단 손에 잡으면 페이지는 금세 넘어가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강력하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