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던 지네를 본 개미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나는 발을 여섯 개 내딛는데도 어느 발이 어떻게 먼저 나가는지 생각해보면 신기한데 발이 수십개인 저 지네는 어떻게 헷갈리지 않게 차례대로 발을 내밀면서 기어갈 수 있는 걸까?'

그래서 그 개미는 옆에 기어가는 지네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개미의 질문에 지네는 난감했다. 그 자신이 한 번도 자신의 발 중 어떤 발이 먼저 나가고 뒤에 나가는지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맘먹은 대로 자연스럽게 발이 움직였기에 돌아다녔을뿐이다.

개미의 질문을 받은 지네는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어떤 발을 먼저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이발? 그 다음발은?'

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불행히도 그 지네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스러울 때 가장 아름답다. 우리의 영성이 자연과 깊이 교류될 수 잇는 이유도, 자연과 만남을 통해 성숙될 수 있는 이유도 영성 그 자체가 자연세계만큼이나 인간의 삶 속에서 자연스러운 변화와 움직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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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목회 믿음의 글들 165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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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의 목회>는 이재철 목사가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고, 제나바 한인교회로 떠날 때까지의 10년의 목회사역에 대한 회고록이다.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에서는 이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를 '회복의 목회' 라고 명명한 이후에 회복되기를 원했고, 회복되었던 내용이 제시되고 있다. 2부에서는 이 목사님의 목회 의 모델이다. 이 목사님은 창세기 2장 8절∼17절을 회복의 모델로 삼았다. 그러면서 7가지 구체적인 회복의 범위를 정하고 있다. 3부는 구체적으로 이 목사님이 주님의 교회에서 실천했던 목회에 대한 정체성이다. 무엇보다 이 부분은 한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를 원했던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의 철저한 자기 수련의 모습이 엿보인다. 4부에서는 예배당 건물을 소유하는 것을 처음부터 원치 않았던 주님의 교회가 이후에 정신여고 강당을 건축하게 된 배경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5부에서는 퇴임을 앞두고 퇴임이후에 닥쳐올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준비들을 피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회복의 목회'의 성경적 모델이었다. 이 목사님은 창세기 2장 8절∼17절을 모델로 삼았다. 그것은 에덴으로의 회복이다. 그리고 본문을 중심으로 7가지의 회복의 모델을 찾았다. 다른 어떤 것 보다 필자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3부에 다룬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다. 이 목사님은 철저하다 못해 처절할 정도로 자신이 세운 목회의 원칙에 충실한 실천가였다. 그가 실천한 원칙을 가만히 살펴보면, 목회자는 교회와 모든 성도들에게 철저히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사무실 문을 잠그지 않는다는 것, 손수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것, 문 밖까지 나가서 인사하는 것, 자동차를 탈 때의 원칙, 심방 때의 자리 배석, 당회와의 관계... 등은 이러한 그의 자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좀더 맑은 정신으로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점심을 거르는 노력도 기꺼이 치른 이 목사님의 정신에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

또한 필자의 목회 사역에 귀한 지침을 제시한 부분은 3부 5장 '목회자는 자기관리자' 부분이다. 33가지의 자기 관리 원칙이 그것이다. 원칙에서도 이 목사님의 바른 목회 가치관과 자신을 철저하게 죽이고 성도들을 세우려고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원칙들 가운데서 필자의 관심을 끈 부분은 이러한 것이다. '새벽기도회가 끝난 다음에 집에 가서 자지 말라', '교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목회자이어야 한다. ... 연기를 통해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는다', '자신이 행하지 못하는 것은 교인에게 요구하지 말고, 교인들에게 설교한 것은 무조건 실행하라', '명단을 작성할 때에 교인들의 이름을 먼저 쓰고, 교역자의 이름을 제일 말미에 넣어라', '하관예배까지 다 끝난 후에는 유족의 집까지 따라가서 위로의 기도를 드려라', '좋은 설교는 그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 혹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부목사 시절에 세계문학전집 한 질은 반드시 읽어라', '목회자는 자기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중단 없이 정진해야만 한다' 등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문제는 필자의 사역에 이러한 것들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 또한 평생 목회사역을 위한 지침서를 작성하고자 한다. 물론 그 내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첨가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필자의 연구실 앞에 항상 부착해서 계속적으로 확인하고 실천하고 수정할 것이다. 이처럼 <회복의 목회>는 필자에게 많은 교훈과 감동을 주었다앞으로 필자의 목회사역에 귀한 지침 역할을 할 것이다. <회복의 목회>는 성경적 교회 만들고, 철저하게 성도를 섬기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사람의 목회자의 노력에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게 만든다. 필자의 사역가운데 이러한 목회의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경주하여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의 전 생애가 회복되는 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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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난다. 열 받는다. 무언가 모를 분노가 책을 읽으며 치밀어 올랐다.

왜 저자는 태백산맥에 이어 민초들의 밟힘을 적나라하게 그렸는가?

그의 소설 속에는 '정의는 승리한다'라는 명제는 어울리지 않으며 끝간데 없는 인간의 인내 속에 피어나는 풀꽃들의 춤사위만 존재하는 것 같다. 



한강은 인간을 평하는 선악, 가짐과 못가짐, 빈부, 권력의 유무를 도외시한 채

도도히 흘러 '민족' 이라는 대해를 이루었다.

아니 이루려고 작가는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마치 태백산맥의 '김범우'를 통해 본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10권을 마치며 해본다.

작가가 내비친 화두는 인류의 보편성의 옳곧은 회복이다.

 

인류의 보편성 - 그것은 강대국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한 유희의 언어가 되게

방치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가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토대 위에서 피어나는 꽃이듯이 인류보편성이라는 것을

모든 민족들의 존재가

공평해질 때 비로소 빛나는 보석으로

제 모습을 갖출 수 있다.

한강을 마치며  p.321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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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가쁘게 주인공들은 인류의 기원을 찾아 달려 한 동굴에 이르러 그것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 모습은 돼지 발이 였을 때 순간적인 숨막힘, 허탈, 역겨움 까지 느꼈다. 어떻게 우리의 기원을 돼지로 삼다니 ...
 


그러나 이어진 반전 그것은 자살을 한 아드레앙의 작품이 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안도의 한숨의 쉬게 된다. 인류의 기원을 알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전부를 걸며 달려온 그들에게 결국 그것은 치열한 아귀다툼밖에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결국 주인공들은 인류의 기원을 찾아나선 발걸음을 돌려 일상에서의 즐거움을 누리며 그것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러 새롭게 탐험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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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에 물음! 다음 장을 펼칠 수 밖에 없게 하는 글의 전개!  베르나르의 글쓰기는 독자로 하여금 책을 놓치 못하게 만들고 있다. 타나토노트, 뇌와 같이 이 작품도 이중적 구조의 글전개로 주인공의 사고와 호기심을 서로 한 꼭지점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고 있다.  한쪽은 인류의 기원을 묻는 물음의 시작으로 글이 전개되며, 또 한쪽은 이들의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몸짓들이 표현되고 있다. 한 꼭지점을 향해.... 뤼크네스 넴로드, 이지도르!  한 고생물학자의 의문의 죽음에서 시작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대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한 팀이 되었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답들이 그들이 앞으로 밝힐 해답의 단초가 되고 있다. 별똥별, 라마르크의 설, 다윈의 자연도태설, 해양 기원설....

그 해답의 실마리는 점점더 복잡하여지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2권은 무슨 내용을 담을 것인가/ 기대된다.,

전혀 닮은 점이라곤 하나 없는 상반된 두 주인공이 의문사된  학자의 물음을 쫓아 그 답을 찾으려고 한걸음, 한걸음 걸으며 때론 뛰면서 마주 보며 달려가고 있다. 두 개의 다른 듯한 삶의 형태, 물음과 해답이 동시에 펼쳐지는 글쓰기!! 베르나르의 고유한 글쓰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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