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두 얼굴
김태훈 지음 / 창해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간 진정한 영웅이라는 부제를 달고 시작한 저자의 글쓰기는 이글을 읽는 과정 중에서 원했던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 단지 조일전쟁 당시에 관한 서술한 책자들 속에 나타난 순신에 숫자나열만이 보여지고 있다. 즉 제목을 보고 기대했던 만큼의 결과물들은 얻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대작을 저술했다는 것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또한 자신의 관심분야를 나름대로 열심히 파헤쳐 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에는 많은 기여를 할 만한 책이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의 모습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그의 의지가 어떻게 그의 삶을 좌우지 했는가를 난중일기, 징비록, 이충무공열전 등에 나타난 자료를 비교분석해서 저자가 보여줌으로 해서 흐릿했던 그림들이 확연히 드러나는 책이었다.

이순신 그의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유언 "전투가 급하다.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이 말은 그가 살아왔던 삶이 어떻했는가를 확연히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이루고자하는 목적이 우선시 되어야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예사롭지 않은 이순신의 삶은 우리에게 '물러서지 않음'이라는 화두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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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에 요순우탕 시대에도 억지로 만들어서 다스림이 아니라 무위로 위정의 근본을 삼았음은, 삼라만상이 모두 제나름의 귀한 자리를 균등히 지켜서 대동세상을 이루고자 함이었소"  - 박대근 -

 저자 황석영은 장길산을 통해 민중의 힘과 저력과 그들의 삶의 방향과 의지를 보여 주었다. 민중들이 원하는 세상! 대동세상 이것은 균등히 자기가 처한 자리를 지켜 조화를 이루는 세상임을 말해주고 있다. "장길산" 속에 나타난 수많은 인물들!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균등을 거부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타심의 마음을 하찮게 여긴 인물이 있는가 하면, 한갗 작은 미물의 움직임에도 그 소리듣고, 그것의 애증을 가슴으로 쓸어담는 인물이 상존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사는 결코 이 두 부류의 구분이 없는 세상! 무위의 세상을 만들기에는 요원하기만 한듯 하나 깊은 산의 물방울이 끊임없이 흐르면 언젠가 대해를 이룰 수 있듯이 또 하나의, 거듭 또 하나의 장길산이 거듭이어 나온다면 이뤄질 것이다.

 대동세상의 흐름은 끊어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장길산이 최형기에게 던진 말 속에 면면히 보여주고 있다. "내가 장길산으로 허명이 있다 하나 이것은 조선 팔도 방방곡곡의 백성들이 역병과 굶주림에 죽고 싸우며 이룬 이름이지 내 이름이 아니다. 비록 이 작은 육신이 죽어 썩어져버린다 한들 너는 장차 수없이 생겨날 장길산과 활빈도를 어찌할 터인가? 너의 공명심으로는 저자의 왈짜배에게 칼질이나 할 터인즉, 개심하여 집에 돌아가면 유순한 가장으로 여생을 살아가거라, 그 대신에... "

'세상의 소문에는 장길산이 압록강변의 벽동 수백 리의 골짜기 안에 깊이 숨었다고도 하고, 또는 두만강의 하류 서수라의 광활한 숲과 호수 사이에 대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다고 하였지만, 아우도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활빈도의 깃발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

장길산을 몇 번이나 읽으면서 거듭 느끼는 것은 대동세상을 향한 저자 황석영의 의지가 한문장, 한문장 속에 깊이 각인 되어 독자의 가슴에 와닿아 오고 있다.  - 張吉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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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 마니교(敎)
▶영문 Manichaeism
▶내용 :

마니교

(Manichaeism)

마니교는 주후 3세기에 페르시아에서 발생하였던 이원론적인 종교운동이었다. 마니교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이단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사실상 그 자체는하나의 독자적인 종교였다. 마니교는 그 교리들과 철저한 조직 및 제도의 일관성 때문에 그 전체 역사를 통해서 통일성과 독특한 성격을 유지하여 왔다. 더욱이 마니교는 그 성장에 있어서, 특히 그 목적과 초기의 의욕으로 미루어 볼때, 세계적인 종교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실로 마니교는 하나의 교회였으며, 신도들은 그들 자신을 일컬어 '거룩한 종교', '거룩한 교회'라고 하였다.

마니(Manes)는 그의 선행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조로아스터교와 석가모니,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이 담고 있는 부분적인 진리들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진정한 '보편적' 종교를 창시하고자 하였다.다른 형태이 영지주의처럼 마니교도 인간이 처한 상황 안에 내재하고 있는 번민에서 발생되었다.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이란 그 인간에게 용납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으며 철저하게 악한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그 자신이 육체와 시간과 세상 속에 노예처럼 속박되어 있음을 느낀다. 또한 그는 악에 휩쓸리고 끊임없이 위협을 받으며 더럽혀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만일 인간이 이와 같이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체험할 수 있다면, 이는 그가 본질적으로 현재 상황보다는 우월한 존재이며, 육체와 시간, 그리고 세상 안에서의 체험과는 무관한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현재 상황은 일종의 타락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인간은 그 자신이 이 세상에 대해 본질적으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 자신도 또한 이 세상과는 무관하신 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오직 선과 진리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이러한 고통과 기만을 원하실 리 없다. 따라서 이런 책임은 악하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원리의 것으로 돌릴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형태의 영지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과 하나님께 대한 이와 같은 지식은 구원의 확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상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아는 것이며, 전에 육체와 물질로 혼합되어 무지와 자의식의 부족으로 가려졌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마니교에서 이와 같은 자아 인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초월세계에서 온 빛의 한 분자로 보며, 또한 현재의 상태가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원하며 내재적인 연결에 의하여 높은 세계와 언제까지나 통합되어 있는 존재로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본질적인 요점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를 분유한다.

즉 영혼은 아래 세상에 내려온 하나님의 일부이다. 이런 관계로 인간은 하나님께서그 자신의 일원들을 구원하는 데 관심을 잃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게 된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회복시켜 그들을 하나님 자신 안으로 통합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그 자신을 구원하신다. 즉 하나님은 구원자이시자 동시에 구원을 받는 존재이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구원받는 구세주'이시다. 인간도 역시 '구원받은 구원자들'이다. 구원받는 요소는 인간의 영혼이며, 구원하는 요소는 영, 즉 이성(nous)이다.

인간을 새로이 발견된 nous와 연결시켜 주는 내적 자각 즉 영지(gnosis)와 예언자들이 인간에게 알려준 현시는 인간에게 그 인간 자신의 현재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인간을 영혼이 타락하기 이전의 과거 상황과 악이멸망하고 인간의 근본적 상황이 복구될 미래의 상태와 연결시켜 줄 수도 있는하나의 과학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지는 인간으로 하여금그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그가 왜 타락했는지, 그리고그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도록 해준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영적 측면 때문에 신성을 공유하고 육체적 측면 때문에 세속적 존재인 까닭에, 인간의본질과 운명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우주의 본질과 운명에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영지는 신화적인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영지는 마니가 여러 이야기와 무수한 인물들 및 상세한 묘사들로 가득 채우고 또한 다소 인위적인 관계들 가운데 모든 요소들을 연결시키는 대칭적인 구성형태를 따라 배열한 복잡한 조직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나 마니교의 신화를 통틀어 살펴볼 때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오직 한 영웅과 한 상황이 있다. 즉 물질 속으로 타락되었다가 nous에 의해 다시 해방되는 영혼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신화는 다음과 같이 세가지 국면으로 나누어진다:

(1) 두개의 근본적으로 별개의것들인 본질들, 즉 영혼과 물질, 선과 악, 빛과 어두움의 분리에 의한 완전한 이원성이 존재하였던 과거의 시기,

(2) 두개의 본질들의 혼합이 시작되어 계속되는 현재에 해당하는 중간 시기,

(3) 미래에 이 본래적인 분리가 다시 일어나는 후기 시기이다.
따라서 마니교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인 교리인 '두 원리'와 '세개의 시기'를 인정하는 것이다.

태초에 두개의 대립적인 본질인 절대적 선과 근본적 악, 즉 빛과 어두움이 있었다. 이 두 본질 모두가 창조되지 않았고, 영원하며, 동등한 것이고 각기 별개의 지역에 존재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북쪽.동쪽.서쪽에 있으며 악의 왕국은 남쪽에 있다. 하나님 왕국의 지배자는 '고귀하신 아버지'이시며 악의 왕국의 지배자는 '어두움의 왕자'이다. 하나님 왕국은 다섯개의 '처소들' 즉 하나님의 일원들(오성.이성.사고.반성.의지)로 이루어지며 또한 수많은 아이온들(aeons)로 차 있다. 악의 왕국은 다섯개의 '지옥들'(연기의 세계, 화염의 불,파괴적인 바람, 역청, 어두움)이 층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괴물의 악마적인모습을 한 다섯 우두머리, 즉 '지배자'(Archon)들이 각 지옥을 관장한다. 이곳에는 또한 각각 다른 다섯 형태의 지옥 생물들로 꽉 차 있다. 지옥의 모든 곳은 무질서와 어리석음과 혐오와 악취로 가득 찼으나 반대로 하나님 왕국은 평화와 이해와 순결과 사랑이 그 특징을 이룬다.

중기는 격변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두움이 빛의 왕국을 침범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은 '생명의 어머니'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그 자신으로부터 불러낸 그 자신의 아들 가운데서 인간화된 그 자신의 영혼에 의해서 그 위험과 싸우고자 하였다. 그의 아들은 '최초의 인간'이었다. 최초의 인간이 그의 전신갑주인 다섯 아들(다섯개의 빛의 요소: 공기.바람.빛.물.불)과 함께 지옥의 심연으로 내려가자 악마들은 그의 아들들을 멸망시켜 삼켜 버렸다. 이리하여 빛의 본질 중 한 부분은 물질의 본질에 혼합되고 물체에 종속되었다. 그때 이후로 하나님은 신성한 본질을 분리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데 스스로 전력을 다하고자 하였다.

최초의 인간은 그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이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귀하신 아버지'는 두번째 창조를 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빛의 친구', '위대한 건축가', 그리고 '생명의 영'을 불러내었다. 생명의 영은 그의 다섯 아들(빛의 장식, 명예의 왕, 빛의 아다마스, 영광의 왕,아틀라스)들을 데리고 어두움의 지역 경계에 이르러 통곡하며 외치자 타락한 인간의 열렬하고 확신에 찬 응답이 울려 퍼졌다. 이러한 부름과 응답은 두 거룩한 실체, 즉 위격이 되었다. 생명의 영은 다시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내부에까지 들어왔다. 그는 바른손을 내밀고 최초의 인간으로 하여금 그 손을 잡게 하여(이 악수가 마니교회 내에서 의식적이고 상징적인 몸짓이 되었다)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그를 들어 올렸다. 최초의 인간은 빛의 낙원인 그의 하늘나라를 되찾았다. 즉 그는 맨 처음으로 타락하였다가 이처럼 처음으로 구원받았는데,이는 인간의 타락의 모델이자 구원의 모델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영혼을 어두움 속에 남겨둔 채 떠나 왔다.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만드셨다. 이 일을 맡은 자는 역시 생명의 영이었다. 그는 그의 다섯 아들들의 도움으로 악의 통치자들을 벌하였는데, 그들의 피부를 벗겨 하늘을 만들었고, 그들의 뼈로 산을 만들었으며, 그들의 살과 배설물로 땅을 만들었고, 열개의 하늘과 여덟개의 땅으로 된우주를 건설하였다. 그는 물질과 혼합되어 있는 빛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세개의 부분으로 나누었다. 물질과 전혀 접촉이 없었던 부분은 해와 달을 형성하였고, 물질이 약간 혼합된 부분은 별을 발생시켰으며, 나머지는 해방시키는데 많은 기술과 시간을 요하는 제3의 물질이 되었다.

이것은 특히 제3의 창조, 즉 '제3의 전달자'로부터 파생되는 실체들과 관련된 작업이었다. 제3의 전달자는 그 자신이 어두움 속에 갇혀진 빛을 이끌어 내고 다듬어서 순화시켜 나가는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도까지 이 세상을 구원하였다. 우주의 기계는 바람과 물과 불 그리고 특히 태양과 달의 '바퀴'들로 만들어졌다. 매달 첫 15일 동안, 해방된 본질-모두 영혼들인 빛의 미립자들-은 '영광의 기둥'에서 달에 이르도록 치솟아 오르는데, 달은 이 힘의 팽창으로 보름달이 된다. 매월 마지막 15일 동안 이 힘은 달에서 태양으로 옮겨 가고 태양에서 다시 '새 낙원'으로 옮겨 간다. 그러나 제3의 전달자는 또한 덜 기계적인 해방수단을 실천하였다. 그는 태양 가운데서 나신으로 나타났다. 즉 남성지배자 앞에서는 여자의 모습으로, 여성 악마에게는 남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그는 남성 통치자들로 하여금 음욕을 품어 사정케 함으로써 그들이 삼켰던 빛을 정액과 함께 땅에 떨어지도록 하였다. 물 속으로 떨어진 씨앗은 바다 괴물이 되었는데, 빛의 아다마스가 칼을 들고 달려들어 이 괴물을 찔러 해치웠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다섯 그루의 나무가 되었는데, 이들로부터 모든 식물들의 싹이 돋아난다. 유산한 여자 악마들과 그녀들의 유산한 아이들은 땅에 떨어져 나무의 싹들을 집어 삼킴으로써 정액과 방출된 빛을 융합시켜 더욱 많은 악마들을 번식시켰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빛의 일부는 이렇게 땅 위에 함께 모여 있다가 흩어져서 식물과 악마의 몸 속에 갇히게 되었다.

구속과정을 방해하기 위하여 물질은 아샤클룬과 남라엘로 하여금 유산된 자들의 모든 자손을 집어 삼키버리도록 촉구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몸 안에 빛이 증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이 한쌍은 성교하여 아담과 하와를 낳았다. 아담은 애초에 구세주이신 영광의 예수에 의하여 운명지어졌던 동물적인무의식의 상태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예수는 아담의 의식을 일깨워 주었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영혼이 신적 기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최초의 인간'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한 것으로서 영지에 의하여 얻어지는 구원의 전형적인 예로서 간주되었다.

불행하게도 아담의 후손은 물질의 계획에 따라 결합과 출산의 유형을 계속 보존해 가고 있다. 절대적인 금욕을 지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빛나는 영혼을 강압하는 육체적 어두움 안에 부끄럽고 고통스럽게 연속적으로 종속된 상태는 종말에 가서야, 즉 신화의 제3 운동 직전에 가서야 끝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묵시적 재난기와 최후의 심판이 끝나게 되면 지구는 1,468년 동안 불타게 될 것이다. 아직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빛의 분자는 하늘로 올라가며, 이 세상은 전멸되고, 물질은 악마와 함께 광대한 지옥에 갇히고 말 것이다. 빛과 어두움의 절대적인 분리가 다시 확립될 것이다.

이 우주개벽설의 결과는 인간이 그의 누스, 즉 살아있는 자의식의 덕택으로 신성을 분유하게 된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구원은 인간 자신 그리고 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식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영지 특히 마니와 그의 교회의 계시에 의하여 성취된다. 인간은 죽어서 본래의 빛의천국으로 돌아간다. 만일 인간의 영혼이 계속해서 육체의 더러움 속에 빠져 있고 물질적 욕구의 노예가 된다면, 그는 스스로 육체로 다시 태어나는 운명을 받게 된다. 따라서 간음, 출산, 소유, 경작이나 추수, 살인 및 육식이나 음주를 금하라. 이들은 모두 자아를 오염시키는 것이며, 육체 안에 갇혀진 빛을 더럽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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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 론

죄에 대한 견해로는 일반적으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이 있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자와 죤 낙스가 있다. 노자는 인간이 태어 날 때에는 죄 없이 선하게 태어 난다는 견해를 표방했으며, 죤 낙스는 인간에게는 죄가 없고 백지에 흠이 들어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후자의 대표적 인물로는 순자가 있는데, 인간은 본성이 악한 것으로 태어날 때에 가지고 온다고 말했다. 한편 기독교의 견해는, 인간은 죄 없이 창조되었으나 범죄 함으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기독교의 견해가 성악설과 성선설을 종합해 놓은 듯이 보이지만, 기독교의 견해는 세상 사상의 종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는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죄의 문제가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이 생각해 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사고의 주제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죄의 문제는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접근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철학적 도구를 사용하여 죄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시도까지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고에서는 이러한 죄 문제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던 철학자 중 칸트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사상 중 본고에서는 근본악에 대한 그의 이해를 살펴보면서 죄와 근본악과의 관계를 고찰해보고, 이를 기독교의 견해와 비교, 평가해보고자 한다. 특별히 기독교의 죄론과 관계된 내용만으로 정리함으로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재창조의 필요성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칸트에게 있어 근본 악(惡)의 문제

(1) 악에 대한 성벽(性癖)

칸트의 종교론인 “순수이성의 한계 내의 종교(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ß Vernunft)는 4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편은 ”인간본성의 근본악"이고, 제2편은 “선 원리와 악 원리의 싸움"이다. 이 중 “순수이성 한계내의 종교"중 그 첫 번째인 “근본악"은 그가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악의 근거를 이미 단순히 경향성에 의한 의지의 타율적 규정에서가 아니라 의지의 주체 내로 향해서 자유의지의 자유행사 자체에서 구하고 있다. 사람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악한 행위를(범을 어기는 행위)하기 때문에 악하다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행위들이 그 사람 속에 있는 악한 준칙(準則)에서 나오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범법 행위들을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또한 (적어도 행위자체에 있어서) 이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법을 어겼다는 사실까지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준칙을 결코 관찰할 수가 없다. 심지어 인간 자체 안에서도 결코 관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인간을 악하다고 하려면 몇몇 행위를 오히려 단 한가지 의식적으로 악한 행위로부터 선험적으로 이 행위의 근저에 놓여있는 어떤 악한 준칙을 추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또한 이 준칙으로부터 주체 내에 보편적으로 놓여 있는 모든 특수한 준칙들의 근저에서 추론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인간이 악하다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낱낱의 가시적인 악한 행위나 그와 같은 낱낱의 악한 행위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는 내면의 악한 낱낱의 준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악한 모든 준칙의 선험적 근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선천적 의지가 이렇게 낱낱의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근거를 문제 삼는다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본성’이라는 표현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표현이 자유로부터 나오는 행위의 근거와 정반대의 것을 의미한다면, 도덕적으로 선하다든지 도덕적으로 악하다든지 하는 술어들과 또 전적으로 모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본성으로부터 선하다 혹은 그가 본성으로부터 악하다 할 때, 그것은 그가 선한 준칙을 혹은 반 법칙적 준칙을 채용하는 제1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칸트에 의하면 인간이 이렇게 본성으로부터 악한 것은 어떤 특정한 인간에게 있어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보편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성격'이라고 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이렇게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성벽(性癖)이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악에 대한 성벽’이라고 했고 또 그것이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속해있는 것이라고 하여, 그것을 '악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성벽'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하여 칸트는 도덕법을 위반하는 악한 준칙을 채용할 가능성에 대한 주관적 근거인 ‘악에의 성벽’이 보편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태어나기 전부터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칸트가 악에의 성벽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다,  혹은 인간이 본성으로부터 악하다고 할 때 그것은 결코 정신적, 육체적, 소질이나 생리, 심리학적, 유전학적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자연소질로서의 성벽에 의한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것으로써, 그것은 행위의 주체인 인간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도덕적 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자연적 죄악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성벽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것이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는 실천적 자유의 임무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에게 있어 이러한 성벽 자체가 도덕적인 악으로 관찰된다. 즉 자연적 소질로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책임을 지는 그 무엇으로 관찰된다. 따라서 이 성벽은 의지의 불법적인 준칙으로 인해 존립한다. 그러나 이 의지의 준칙은 자유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준칙에 있어 주관적인 최고의 근거가 인간성 자체 속에(그것이 무엇을 통과하려고 하든지 간에) 얽혀있지 않고, 또한 그 속에 뿌리 박혀 있지 않다면 인간의 도덕적 악은 이 악의 보편성과 또 다시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가장 높은 주관적 근거를 악에 대한 자연적 성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것 자체를 인간의 본성 속에 있는 근본악 내지는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는 악’(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유발시킨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있어, 악의 보편성 측면에서 본다면 악에의 성벽은 인간성자체 속에 섞어져 있으면 인간성 속에 뿌리박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으나, 그것은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것으로써,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한 것이요 따라서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적 생구적(生久的)-악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종교론에서 자유의지가 선의 법칙 즉 도덕법을 의식하면서도 오히려 부도덕적인 동기에 중점을 두는 준칙, 즉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도덕적 심술의 근저에 있는 부패와 도덕적 질서의 전도가 모든 반(反) 법칙적 행위의 형식적 근거가 되는 악의 근원이며, 그것이 적극적이며 의도적인 악에 대한 의지의 사역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악에의 성벽과 관련해서 악을 다음과 같은 3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2) 악에 대한 성벽의 3단계

1단계는 인간 본성의 유약성인데,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탄식에 표현되어 있다. 즉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나 그 성취가 결여되어 있다. 즉 나는 신을 나의 의지의 준칙 속에 채택한다. 그러나 이 선이 객관적으로 이념에 있어서의 정복될 수 없는 동기이지만 주관적으로 준칙이 수행되어야 할 때에는 보다 악한 동기(경향성과 비교하여)가 된다.

이것은 선, 즉 도덕법을 자기의 의지의 준칙 속에 수용하면서도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이념에 있어서는 도덕법을 어쩔 수 없는 동기로 삼고 있으면서도, 주관적으로 정작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서는 여기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으로, 이것은 의지적 결여에 의한 악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도덕적 유약(幼弱)이라고 할 것이며, 차라리 적극적인 선에 대한 무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칸트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라고 이렇게 말한 사도 바울의 탄식이 바로 인간성의 이 같은 도덕적 유약성을 말한 것이라고 했다.

제2단계는 "인간심정의 불순"인데 "인간의 마음의 불순성"이란 것으로서 준칙이 객관적으로 볼 때, 의도한 법 이행에 있어서 선하고 아마도 그것을 수행할만한 능력을 충분히 지녔을 지라도 순수하게 도덕적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사실 준칙은 법만을 충분한 동기로 자체 내에 채택하여야 한다. 그러나 준칙은 이렇게 하지 않고 의무가 요구하는 것임에도, 의지를 규정하는 데 있어 대부분 저 동기(법)이외에 다른 동기를 필요로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의무적인 모든 행위가 순수하게 의무로부터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의무와 자애의 원리의 밀회에 의한 사생학적 도덕 내지 혼합의 윤리로서 준칙이 도덕법을 준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또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도덕법만을 의지 규정의 동기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의 다른 동기를 받아들이는 경우를 말한다.

제3단계는 인간의 마음의 악성 혹은 더 잘 표현하면 부패성은 도덕법으로부터 나오는 동기를 보다 더 좋아하는 의지가 준칙에 대한 성벽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마음의 강팍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의지의 동기에 관한 한 도덕적 질서를 뒤덮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있어서 아직 법적으로 선한 행위들이 있을 수가 있으나 이미 그로 말미암아 사고방식이 그 뿌리에 있어서 부패했으며, 이런 까닭에 인간은 악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제3단계는 이미 언급된 바 이것은 도덕법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도덕법에 배반되는 악한 준칙을 채용하는 것으로써, 칸트는 이것을 도덕적 질서의 전도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칸트의 말대로 모든 악한 준칙 채용의 주관적 제1근거로써 근본악이라 할 것이다. 제3단계에 있어서는 고의적인 악이요, 의지의 의도적인 적극적인 악이다. 이것은 도덕적 자각의 최고 차원적 단계에 있어서 발생하는 악으로서 그것은 고차원적인 책임 따르기 때문에, 악의 심각성의 측면에서도 보아도 과연 근본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겠다.

심술이 부패되었고 그것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본질에 있어서 위태롭게 된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가 현상으로 나타난 모든 특수한 악과 제 아무리 열열한 싸움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도덕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온갖 양상의 행동의 보이지 않는 어떤 밑바닥에 주목할 필요가 있고, 인간 심술의 혁명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 근본악 극복의 문제가 절실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3) 근본악의 극복의 어려움

근본악의 극복의 어려움이 어려운 과제이면서 절실한 문제임을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본악의 사상을 가지고는 적이 눈에 보이는 적대자로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그 적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아무런 기술적, 심리학적, 내용적인 지시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대상적(對象的)으로 알 수도 없고 유의적으로 눈 앞에 볼 수도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절실하게 다음과 같은 두번째 근본문제가 제기된다. 즉 우리는 악의 올가미로부터 혹은 저 전도(傳導)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야스퍼스의 말과 같이 근본악은 밖으로 나타난 낱낱의 악한 행위나 혹은 낱낱의 악한 준칙을 제거함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예지적(叡智的) 차원에 속하는 것이요, 모든 악한 준칙 성립의 제1근거로써 자유 자체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영원히 암흑 속에 가리워져 있는 것이요, ‘눈에 보이지 않게 이성의 배후에 숨어있는 적’으로써 인간의 자유가 지니고 있는 깊은 비밀이 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칸트에게 있어서도 역시 이 악은 근본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준칙의 근저를 부패시키기 때문이다. 동시에 또한 그것은 자연적 성벽으로써 인간적인 힘을 가지고는 근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오직 선한 준칙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준칙의 최상의 주관적 근거가 부패하고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칸트는 악에 대한 성벽은 "자연적 성벽으로서 인간의 힘에 의해서는 근절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보다 선한 인간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칸트는 “인간이 그의 준칙의 근저에 있어 부패하고 있을 때, 그가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해서 심술의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하나의 선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칸트는 “그것은 준칙의 기지가 불순한 상태로 있는 한 점차적 개혁에 의해서는 이루워 질 수 없고 인간 심술의 혁명, 즉 ‘심술의 신성’이라는 준칙에의 이행에 의해서 이루워 질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일종의 ‘재생’이라고 했고 또는 새로운 창조라고 했으며 ‘심정의 변화'라고 했다. 여기에 있어서 칸트는 새로운 창조를 신약성서 에베소서에 나오는 "새사람을 입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

사실 칸트가 말하는 심술의 혁명은 부패한 심술로부터 선한 심술에로의 전회(轉回)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인격적 혁명을 의미한다. 여기에 있어서 칸트는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다시 사는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율과 인간에 있어서의 선에 대한 소질(素質)의 본원적 초월을 믿는 그는 이 혁명의 해결을 다시 인간의 도덕적인 자율적 결심에 의한 전회력(轉回力)으로 돌리고 있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Sollen(도덕적 의무)은 Können(가능)이 대응할 때에만 그 의의를 가진다. 인간 이성의 도덕적 자율에 의한 확신이야말로 그의 진보적 철학을 일괄하고 있는 신념이다. 따라서 그는 선한 인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써 도덕법이 우리가 지금 선한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Sollen)고, 명령하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Können)는 것이 따라온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의무가 그것(스스로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을 명령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인간 자력에 의한 심술의 혁명은 어떻게 해서 이루워질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악인이 된 그의 준칙의 최상 근거를 단 한번의 불퇴전(不退轉)의 결심에 의해서 전회될 때에 이루워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 인간은 그와 같은 불퇴전의 결심에 의해서도 당장에 현실적으로 완료적인 의미에 있어서 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의지의 최상의 준칙으로 수용하는 원리의 순수성 및 그 원리의 견고성에 의해서 악인으로부터 선인에로의 부단히 노력하는 선한 길(좁은길이기는 하지만)에 있음을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도덕심술의 내적혁명을 위한 일대결의를 함으로, 사고방식과 기질에 있어서 혁명을 준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결코 악을 완전히 극복한 완성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다. 선에의 일대결의를 기점으로 해서 무한히 노력하고 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선인(善人)에 대한 희망적 근거를 붙잡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심술에 있어서 혁명된 인간은 심정(의지의 모든 준칙)의 예지적 근거를 통과하는 자 이다. 따라서 자신과 일체로 하는 신이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선한(신의 뜻에 합당한) 인간이다고 말하고 있다. 심술에 있어서 혁명된 인간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하는 신성한 법칙으로 보아, 현상적으로는 그의 선 다시 말하면 행위에서 본 그의 선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법칙에 적합하려는 무한한 진보가 그 진보를 이끌어 내는 초감각적인 심술 때문에, 그것을 관통하고 있는 신에 의해서 그 순수한 예지적 직관이나 행위로 보아서도 완성된 전체로서 평가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끝으로 칸트는 악인으로부터 선인에로의 부단한 진행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을 자기 보다 더 높은 것에 협력함으로써 보완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기독교 신앙이 은총의 세계로 가까이 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도덕적 자율과 도덕적 당위를 강조하는 칸트가 은총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이러한 협력이 어떤데서 이루워지는가를 안다는 것은 결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며 또 실제로 하였는가? 하는 것은 본질적인 질문으로 아무에게도 필연적으로 알려질 수는 없으나, 아마도 도움을 받을 만 하게 되기 위하여 그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알려질 수 있으리라 고 말하고 있다. 이같이 칸트는 은총의 문제에 있어서도 기독교 신학의 은총개념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도덕적 자율의 입장을 고수했다.


2. 근본 악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

칸트의 근본악은 얼핏보기에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원죄론과 동일한 것 같은 느낌을 주며 근본악이라 하는 말은 기독교의 신앙 내용과 대단히 친근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칸트의 이 종교론이 나왔을 때, 당시 신학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칸트는 어디까지나 철학적 사색자체를 임무로 삼았기 때문에 핵심적인 기독교 신앙과 관련시켜 볼 때, 그 내용에 있어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그는 왜 우리 속에 악이 있는가? 어째서 최상의 준칙이 부패하는가 하는데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정녕 우리들 자신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본성에 속하는 하나의 근본 특징이라는 것밖에는 그 이상 원인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루이스 벌코프도 그의 죄의 기원과 본질에 있어서 "大 철인 칸트도 인간에게 근본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였으나 그 기원을 설명하지 못했다"고 말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깊이 접근해오지 못한 사상으로 남겨 둔 것 같다.

 혹자는 근본악에 대하여 인간의 본질적 신성을 믿고, 칸트가 '순수 이성의 한계내의 종교'를 출간했던 당시의 소란과 항의를 말하며,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실망과 절망을 도덕적으로 준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근본악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첫째, 우리가 보다 선한 행위를 가능케 하는 어떤 지식을 얻기를 기대하거나 현재의 악을 시정하고 악의 발생원인을 제거하고 어떤 방도를 기대한다면 칸트의 근본악은 우리에게 선망(先望)을 줄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악의 발생 원인을 조건율(條件率), 윤리학, 심리학, 사회과학 등으로 규명하고 제거한다고 할 수는 있으나, 인간의 마음이 부패된 그대로 있는 한, 우리는 근본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인간 심술의 밑에 자리잡고 나타내지 않는 모든 악의 발원처(發源處)에 수술을 가해야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악의 철학은 의지자체의 혁명과 변화를 문제삼는 것이라 하겠으며 칸트의 근본악은 인간에게 속해있는 하나 하나의 악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주체로의 인간 자신이 선해지는 것, 심술자체에 있어서 혁명적인 심정의 정화(淨化)를 문제로 하고 있다.

둘째는, 인간의 자유 자체 속에서 부패를 보는 칸트는 인간이 도덕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인 자기의 선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칸트에게 있어 인간이 현실적으로 완성된다는 의미는 선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인간에로의 부단한 진행을 의미한다. 인간은 초월적이면서도 유한하고 자유로우면서도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진리나 정의는 일시적 성격을 면치 못한다.


Ⅲ. 결 론

이상에서 처럼 칸트는 도덕성을 넘어 종교적인 방법에서의 악의 해결을 논하였다. 웨스트민스터고백서는 인간은 죄로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는 영적 선을 전적으로 잃어 버렸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2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는 인간으로 하여금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었는데, 인간은 거역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진노의 대상은 도덕적 죄악이다. 종교가 참되지 못할 때 모든 도덕적 죄악이 나오게 된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도덕적 죄를 얼마든지 범하게 된다. 이 죄들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요, 결국은 멸망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칸트의 악의 성벽 중 제1단계에 도덕적 심정의 유약성과 제2단계인 불순성 그리고 3단계인 도덕법에 대한 반역을 준칙으로 삼는데, 인간은 이 악을 끊임없이 선에 대한 노력으로 전환 가능케 할 수 있을 것인가? 펠라기우스가 말하기를 인류는 원죄의 오염 없이 세계에 출생되어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다 행할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을 죄 없이 생활할 수 있고, 또 다수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한 심술자체의 혁명, 그리고 선한 인간에도 부단한 진행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러한 인간들의 문제에 예수님은 자신의 품으로 돌아와야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 받는 것인데, 곧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때에 성립된다. 사도 요한도 이것과 관련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세상의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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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가슴에 쓰는 낙서
고창수 지음 / 다산글방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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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낙서들은 대부분 시민들의 가슴의 가식없는 표현"  를 인용하며 저자 자신 속의 가식없는 글 전개를 할 것이라는 말머리를 꺼내온다. 인생의 목적은 이순간 주어진 이순간 주어진 일에 고맙게 생각하여 마음껏 즐기면서 사는 것이다. 장자의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덕이 없으며, 성인은 이름이 없다"  이 화두는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배운다는 목적때문에 모여서는 서로 물고 뜯고 툭탁거리며 싸우는 저 위선자들의 아우성들을 .. " 입다물게 한다.

창세기 1:28, 시 8의 이 인간에 대한 사상은 헤브라즘의 산물이다. 장자"천하가 태평하지 않은 까닭이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마2:45.눅 6:3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무한하시다고 말하지 않은가? 거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 분명한 것이 아닌가? 하늘 아버지의 조건 없는 사랑고 순종의 도를 가르치기 위해 생명까지 희생하셨다.

[종교에서 말하는 죄인] 단지 인간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우리를 파괴하는 무서운 독소인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 앞에는 깨우침이 필요한 무지는 있을 수 있으나 형벌을 받아야 할 죄인은 없다.

[하나님의 능력] 철저히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죽일 수있는 이것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를 버린자들만의 곳이다.

[성 어거스틴과 소년]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 가장 진실한 대답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지식은 그를 알 수 없는 분임을 아는 지혜이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자요,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도덕경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 계십니까? ] 나는 오래전부터 지금은 신앙의 시대는가고 알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주장해 왔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믿음이란 사실은 항상 그 한편에 의심을 동반하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 낳은 욕심에 의한 꿈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니체" 확고하다는 믿음은 진리를 위해서는 거짓말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안다는 것은 주체와 알려진 객체 사이의 관계의 일치를 나타내는 말이다.{기노스코}

토마스 제퍼슨 "인류는 그 시초부터 지금까지 그들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지상적일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위해 서로간에 정상적인 인간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심한 투쟁과 전쟁, 그리고 잔인한 고문과 화형들을 일삼아 왔다.  추상적인 개념을 저자는 잘못된 종교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종교의 5M : Man, Movement, Manual, Machine, Monument

예수님은 인간은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는 그 신성을 일깨워 주셨는데 교회는 정반대로 인간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로 몰아세우고 최후 심판 운운하며 겁주어 이들을 혹사하며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사도바울에 의해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대한 새로운 복음은 히브리 사상의 헌 푸대에 담게되었다. 그 증거로

1.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와 사도 바울의 하느님은 전혀 다르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2. 바울은 그의 회심 이후에도 그의 깊은 죄의식의 갈등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잇다. [근본주의로부터 성서를 구하자] rescuing the bible from fundamentalism , 히브리 사상에서도 소위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원죄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기적의 의미] "그런데 당신의 나라에서는 신이 사람들이 바라는 일을 하는 것을 일러 기적이라고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사람이 신이 원하시는 일을 할 때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한답니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의미 말이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를 행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한다.

저자가  쓴 낙서의 핵심은 자기 목숨을 잃는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그들의 가슴속의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행하기 위한 자기 버림의 적극적인 모습이 바로 죽음이었다. 자기 목숨을 잃는다 말은 집착하지 않고 섭리에 따라 기꺼이 죽을 수 도 잇는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너희 안에 있다. 그 하나님 나라를 보기 위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를 제대로 찾는 마음을 절차탁마하는 그곳에 있는 것이며, 그 때에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임하는 것이다.  

저자는 작금의 모든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관, 잘못된 인간관, 잘못된 믿음을 고발하며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이것을 바로 잡으려는 예수의 모습을 닯기 원하고 있다. 

나를 풀어 다오, 나를 풀어다오

이제는 나를 풀어다오

나도 사람이다. 너희 같은 사람이다.

나도 하늘 아버지의 형상을 입은

사람의 아들이다.

이제라도 우리 함께 손잡고

다정한 친구되어 진리와 자유의 나라

그곳으로 나를 따라오지 않으려는가?

지금 바로 지금 여기에 임하신

너와 나,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섭리하시는

그 하늘 나라, 우리들의 삶의 현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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