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말은 많아졌는데, 키보드 앞에 앉기가 두려운 내가 생겼다. 떠벌떠벌 내가 꽤나 안이 꽉 찬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글을 쓰려고 하면 머리가 빈다. 명상을 할 땐 그렇게나 지우고 싶어하는 잡생각들이 지금은 온데 간데 없어서 앞으로 명상 대신 글을 써야 하나 싶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 좌우명을 정했을 때, '후회하지 말자.'라고 했다. 별 생각은 없었다. 하도 병신같은 짓을 잘해서, 이미 저지른 일인데 어쩔 수 없으니 괜히 에너지 낭비 말고, 잊고 다른 일 벌이자, 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지금껏 후회라고는 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후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살면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일을 나의 선택때문에 또 겪어야 했고, 자신감 있었던 나의 선택 덕분에 나는 또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후회를 할까. 하지 않는다면 합리화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테지만, 합리화가 뭐 나쁜건가. 살면서 자기합리화 말고, 자기비하의 길로 빠지지 않는 최선이 무엇이 있겠나. 

작년 4월에 '당신의 표류하는 인생을 응원합니다.'라는 작은 메모가 담긴 다치바나 다카시의 [청춘표류]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친구에게 내가 평생 표류하며 살았으면 좋겠냐는 원망섞인 투정을 했더니,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인생'은 '청춘'의 오타였노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다시 이 글귀를 읽어보니, '인생'이 '청춘'보다 오히려 좋다.  

   
 

 실패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대담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결국 무모하게 살았을 뿐이다. 실패의 가능성을 침착하게 바라보면서 대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청춘을 제대로 산 것이다. 

(중략) 

 이제까지의 경력을 포기하고 새로운 직업을 가진 적이 두 번 있으며, 언제 돌아갈지도 모를 여행길을  나선 적도 두 번 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여행지에서 병을 얻어, 돈도 떨어지고 치료할 방법도 없기에, 싸구려 여인숙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안 되겠구나.'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조차 후회하지는 않았다. 인생이 여기서 끝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라며, 나도 모르게 묘하고 차가운 체념의 기운이 퍼져나왔다. 이제까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왔기에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판단 때문이다.

 
  [청춘 표류] 中

작가처럼 나 역시도 후회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뭐가 남았나. 지금 손에 쥔 결과물이라던가, 앞으로의 희망이라던가, 그런것들이 작년 이맘 때보다도 훨씬 더 없다. 하지만 1년 동안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아무도 몰라주더라도 나만 알면 됐다는 마음이다. 지금의 내 상태를 알고 다시 1년 전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떤 행위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과거 또는 과거의 행위를 수정하는 일이다.  
  [만리장성과 책들] 中

보르헤스의 책을 읽으며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수많은 잡다한 지식을 한 권의 책에서 모두 섭취할 수 있다는 것인데, 위의 인용문은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이다. 요즘 '후회'라는 화두에 대하여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책을 읽으면서도 이런 것만 보이나본데, 내가 요즘 하는 생각들과 지금 줄줄 늘여 쓰고 있는 이 글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벌써 대리가 된 친구, 학위를 딴 친구, 결혼을 하는 친구들을 하나씩 만나며 나는 이미 다른 길목에 놓여있구나. 우리는 이제 같은 길을 갈 수 없겠구나. 라고 느낀다. 나도 그 길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지금 해야하는게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바다 한 가운데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고 해서, 언제 길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울음이 삐져나올 것 같다고 해서, 나는 다시 돌아가 나의 선택을 수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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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5-2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로만 듣던 디지털 유목민이 뽀님이셨군요. 뽀님의 이런 글을 보며 우와 난 나이 처먹으며 뭘한거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여기요 여기)

Forgettable. 2011-05-25 14:42   좋아요 0 | URL
전 디지털 유목민이 뭔지도 몰라서 검색해봤네요. ㅋㅋㅋㅋㅋ
응원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게요!!!!! ^^

버벌 2011-05-26 15:15   좋아요 0 | URL
어..어떻게 해. 저도 ... 검색을.. 디지털 유목민.--> 웬지 좋아보이는 단어라서. 움 좋네요.

Forgettable. 2011-05-26 16:33   좋아요 0 | URL
ㅋㅋ 그 안에도 뭔가 여러 종류의 디지털 유목민이 있더군요.
신종단어들이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기는 현상이 전 마냥 신기해요..
(작년까지만 해도 저 얼리어덥터란 소리 들었는데 1년동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변한거죠!!!!)

Joule 2011-05-25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그거 하나는 말할 수 있어요, 전. 1년 전에는 포게터블 님이 이런 글을 쓰지는 못했어요. 사람들은 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상을 얻어야 만족할까요. 직업, 승진, 결혼, 학위, 기타등등 기타등등. 아무렴 그들이 나인투파이브하는 동안 포게커블 님이 내내 잠만 자고 있었다고 해도 그만큼의 숙면으로 인한 기억력 증진과 미모 향상이 있었을 텐데(잠을 잘 자면 머리도 좋아지고 살도 빠지고 피부도 좋아진다는 게 저의 오랜 지론이라) 왜 내 손 안에 뭔가 쥐어져 있지 않다고 어깨가 축 쳐져 계세요. 제가 보기에는 한두 뼘은 월등히 키가 자란 포게터블 님이 보이는고만.

Forgettable. 2011-05-25 14:5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매일 술로 상하는 몸이 매일 잠으로 회복되고 있는 요즘이랄까요. 저도 잠 예찬론자에요! ㅋㅋ

그냥 오자마자 이래저래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받아서 그런가봐요. 원랜 참 씩씩하게 잘 사는데! 가끔 이럴 땐 지푸라기 하나만 잡고 있어도 그걸 위로 삼아 안심이 되는게 사람 마음인데, 저한텐 그 흔한 지푸라기 하나 없다는게 그만 기운빠져버려서. 심지어 노는 동안 블로그에 글도 많이 안써놨더라구요???

쥴님. 항상 고마워요. 힘들 때마다 쥴님이 해주신 말들이 항상 어둠 속의 빛처럼 놓여 있어요.

레이 2011-05-25 22:2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오면 온다 알려주면 좋잖아요.
전화라도 한번 안하면 후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 해보는 기회가 생길것으로 사료됨

Forgettable. 2011-05-26 10:19   좋아요 0 | URL
레이님 방가 ㅋㅋㅋ
오늘 하루는 어제보다 나은 하루가 되길?!!!

하이드 2011-05-26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놀고 와서 왠 투정이야. 그거, 어디 안 가더라. 계속 남아서 사는 동안 툭툭 튀어나오니깐, 후회 안해도 됨.
그리고 자네의 그 나이도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술이나 한 잔 하자. 연락하삼. (아직 거기 살아? 나는 주거지가 흑석으로 바뀌어서 사당에서 보면 좋겠다! ^^ )

근데 나 청춘표류는 좀 싫음. 일등인생만 모아 놓았잖아. 일등만 표류한건 아닌데, 그건 진정한 표류가 아님.

Mephistopheles 2011-05-26 09:13   좋아요 0 | URL
사당은 제 구역이에요 통행세 내세요.=3=3=3=3

하이드 2011-05-26 09:28   좋아요 0 | URL
방배 아니구 사당이에요? 맛집 좀 알려주세요!!

Mephistopheles 2011-05-26 09:38   좋아요 0 | URL
방배를 포함해 사당 설대입구와 신림까지가 제 구역이에요~맛집...이요? 뭘 드실려고요?

Forgettable. 2011-05-26 10:24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그러더라구요. 한국왔다고 해서 다 없어지는거 아니라고. 다행이에요. 난 벌써 다 잃어버린 것 같아서 전전긍긍했거든요.

언니 폰번호 바뀌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바꼈으면 저한테 연락좀. 전 번호 그대로거든요. 가물가물. 전 사당이 훨씬 좋죠!!

전 처음에 일등인생을 보고 열등인생으로 읽고, 아니 이 언니 뭐????!!!! 막 이랬는데 ㅋㅋㅋ 일등인생이었군요 ㅋㅋㅋㅋㅋ 맞아요.. 저 서문만 읽고 엄청 좋아하다가 괴리감느끼고 있어요 ㅠㅠㅠㅠ

Forgettable. 2011-05-26 10:24   좋아요 0 | URL
메피님, 통행세 받으러 나오세요 ㅋㅋㅋㅋㅋㅋ 이왕 나오시는 김에 맛집도 좀 알려주시구요. 흐흐

Mephistopheles 2011-05-26 10:31   좋아요 0 | URL
그니까..일단 뭘 드시고 싶은지 말씀을 하셔야 범위를 좁혀도....좁히죠...^^

Forgettable. 2011-05-26 10:41   좋아요 0 | URL
하이드 언니랑 말해보고 카톡할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이드 2011-05-29 02:30   좋아요 0 | URL
방배와 사당, 설대와 신림은 잘 안 가고, 별로 가고 싶지도 않구요 ㅎ

맛집... 맛있는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며) 술안주 나오는 집이여-

아이리시스 2011-05-26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님은 노는 동안 친구를 많이 만들었죠. 글은 안썼어두요. 저 포함,ㅋㅋ
어쨌거나 글은 많이 써줘요. 날잡아 뽀님 옛날 글도 읽어야겠다..^^

Forgettable. 2011-05-26 10:26   좋아요 0 | URL
제가 또 친구를 그렇게 많이 만드는 스타일은 아닌데.. 많이 좋은 친구들은 조금 만들긴 했어요 ㅋㅋㅋ

죽이되든 밥이되든 어쨌든 하루에 글 하나씩은 쓰고 싶어요. 옛날 글은 뭐;; 날잡으실 것도 없어요. 별게 없어서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