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이곳 저곳 돌아다니고 있다. 친구도 만나고, 그리웠던 풍경도 마음에 새기고, 무거운 가방, 거친 가방끈에 어깨를 혹사시키면서 지칠때까지 돌아다닌다. 이번 여행에서는 뭐, 언제나 그랬듯이 카메라와 핸드폰의 밧데리가 모두 방전되어 있는 상태였던 바람에 풍경을 글로 묘사하는, 전혀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무모한 시도를 해보았다.
숨이 트길 기다리는 씨앗과 그 씨앗을 품고 있는 흙.
정돈된 논밭을 가로지르는 강줄기
경북 지방의 수북이 피어난 포도나무 위의 하얀 눈송이 꽃
불규칙적으로 드문드문, 또는 홀로 덩그러니, 또는 마구잡이로 저마다의 꽃을 피워내는 꽃나무들.
유년기의 연약한 연두빛 나뭇잎
서울 거리의 규칙적인가로수 배열이 지겨웠음을 알게 해주는 불규칙의 미학.
사진찍기를 습관화, 취미화 한 뒤로 풍경 묘사는 부질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책에서 읽는 풍경 묘사 역시 띄엄 띄엄 읽었다. 그러나 내가 보는 풍경에 비해 사진은 순간적이고 단편적인 것일 뿐이라는 걸 카메라 없는 이번 여행에서 알았다. 바라보는 이의 감정이 담겨 더 아름다운 이 풍경은 글로 남겨질 때 지속적이고 포괄적이며 사진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영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언제나 빠지지 않는 술. 술.. 술......
좋았던 피부는 아련한 옛 시절의 추억일 뿐이고, 식도염은 아무리 약을 챙겨 먹어도 더 심해질 기세. 술이 덜 깨어 하는 면허 강습은 거의 음주 운전 수준. 술김에 내뱉은 헛소리는 누군가의 기억에 아로새겨질 뿐이고. 나의 기억은 그에 비례하여 사라져만 간다. 술을 마시지 않아면 우울하고, 마시면 몸이 견딜 수 없다. 몸이 견딜 수 없음보다 마음이 견딜 수 없음을 더 괴로워 하는 나는 마실 수밖에.
요즘 들어 나는 친구들의 웃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시리다. 극도의 조증이 찾아온 것만 같아 보이던 친구의 높은 목소리는 평소의 우울함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그것이 슬펐고, 드디어 부모님을 설득하여 제 갈길을 찾은 친구의 뿌듯한 미소 뒤에는 그 동안의 스트레스와 앞으로의 불안감이 엿보여 그것이 슬펐고, 이별의 아픔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한 친구의 깔깔거림에는 아직도 예전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그것이 슬펐으며 겨우 겨우 시간을 맞추어 만난 친구의 반가운 미소에는 삶의 피로함이 엿보여 슬펐다.
이것은 나의 마음이 슬프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들을 다시 또 언제 볼지 모르겠는 결심을 해버린 무모한 나의 결심에 대한 후회인지, 정녕 우리 모두가 힘든 시간을 감내하며 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