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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오는 날, 밖에 나가길 싫어하는 이유는 바지 밑단이 젖어서, 신발 속으로 물이 들어와서, 요즘 우산들이 다 허술해서 비가 새서도 아닌 지렁이를 밟을까봐- 이다.
나는 왜인지 지렁이를 매우 두려워하고, 그를 밟는 것은 더 두려워하는데 생각만 해도 몸이 움츠러든다. 거의 phobia 수준이다.
타조에게는 빠른 다리를, 사자에게는 용맹한 이빨을, 고양이에게는 높은데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법을, 개에게는 애교를, 바퀴벌레에게는 번식능력을, 뱀에게는 독을 주었으면서 도대체 왜! 지렁이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을까?
그저 비가 오면 좋다고 스물스물 땅 위로 기어나와서는 밟혀 죽거나,
너무 많이 기어나와버려서 햇빛이 나왔을 때 미처 다시 기어들어갈 흙구덩이를 발견하지 못해 말라죽어 개미의 먹이가 되는.
이런 최후밖에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는?!!
도대체 그들에게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만, 지렁이는 내가 가장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동물이기때문에 공부해보기엔 약간 자존심이 상한다.
심지어 기생충조차 숙주를 조종하기 위해 프로그램되어 있다는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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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셋]
예기치 않게 추천을 받아서 보게 된 영화.
[비포선라이즈]의 속편인데, 이 영화도 같이 받아두었는데, [비포선라이즈]는 95년도, 내가 초딩일 때 나온 영화라 제목이 익숙치 않아서였던건지, 뭐 아주 당연스레 [비포선셋]을 먼저 보기 시작했다. 익숙한 걸 먼저 보기위한 당위성으로 sunrise가 sunset보다 먼저 아닌가? 아니지, sunset이 먼저일 수도. 라는 생각을 0.0000000001초 정도 한 것 같다.
오, 이런 거구나- 하면서 빠져서 보다가 중반쯤에, 이거 설마 속편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는데, 아니겠지(도대체 왜?!) 하곤, 영화가 끝나고 찾아보니 이것이 속편이었다. Rs님의 서재에서 알고, 혹은 모르고 2권부터 본다는 이야기와 그에 달린 하이드님의 댓글을 읽으며, 후후 바보입니까? 하며 속으로 웃던 바로 며칠전 내모습이 오버랩되며 슬퍼졌다.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비포선셋]을 보기 전에 [비포선라이즈]를 보고싶다.
영화는 1시간 반가량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실시간의 대화와 실시간의 산책. 실시간의 물 끓이는 시간까지- 지루할 법도 한데, 점차 솔직해져가는 그들의 모습이 매력적이어서 전혀 지루하지는 않다. 이 여자, 꽤나 많은 여성관객의 공감을 받았을 듯. 대부분의 여자들이 연애할 때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순차적으로 1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다 보여준다. 그러고보니 대단하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