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도 배우도 그닥 끌리는 요소는 없었으나 감독을 보고 선택한《굿모닝 프레지던트》.
그런데 막상 영화는 기대했던 장진식 유머는 없고 대신 개콘식 유머가 가득하다.
짧게 평을 하면,《내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의 중년 버전쯤 되겠다.
줄거리는 알려진 대로, '이순재(임기말년) - 장동건(퇴임 1년전) - 고두심(당선 이듬해)'로 이어지는 세 대통령의 에피소드를 다룬 옴니버스식 구성.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의 이력답게 시나리오 보다는 희곡적 특징이 더 돋보이는 대본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이중 재미있었던 건 퇴임 몇 달을 앞두고 거액의 로또에 당첨되었으나 당첨되면 모두 사회 환원하겠다고 큰 소리친 과거의 이력 때문에 고민에 빠지는 이순재 편이었고, 보통 사람인 남편의 사소한 실수로 정치적 공세에 몰려 이혼 위기까지 몰리는 고두심 편은 좀 지루했다. 에피소드 탓이 아니라 영화가 전반적으로 잔잔하게 흐르다 보니 마지막 고두심 편에 이를 때쯤엔 심정적으로 지루해진다.
장진의 영화는 조연들이 특히 좋은데 이번 영화에서도 주연들보다 조연들의 역할이 돋보인다. 주방장도, 경호실장도, 대통령 남편(임하룡)도 모두 영화에서 보석같은 존재들(얼마 전부터 내가 볼매!를 외치는 류승용 아저씨도 나온다).
장동건 편에선 북/미/일이 우리 영해에서 군사대치를 하는 정치적 상황을 넣어 나름 긴장감을 조성하지만 영화 자체가 '드라마에 의한 드라마'를 작심하고 있어 이러한 긴장감은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재미없지는 않다. 특히 영화속 유머 코드가 익숙하고 쉬워서 중장년층이 보기에도 부담이 없을 듯하다.
실제로 좌석이 거의 꽉 찬 극장엔 중장년 분들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불편한 상황들이 좀 있었다. 극장에서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극장인가, 어느 집 반상회가 열리는 거실인가 헷갈리는 시츄에이숑이 종종 벌어졌다. 뒷 좌석에 앉은 아주머니들이 어찌나 사이가 좋으신지 영화를 보는 내내 배우의 피부 품평부터, 2초 뒤에 나올 상황을 점치는 시간차 공격에, 웃기는 또 어찌나 잘 웃으시는지 개콘 방청석이 따로 없다.
영화를 본 날이 일요일인데, 목요일에 개봉한 영화를 쏟아지는 극찬만 믿고 일요일에 본다는 게 불안하긴 했다.

같이 본 친구는《국가대표》보다 못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감독의 네임밸류"에 점수를 후하게 줬다.
영화를 보고 온 날, 엄마랑 통화했다. 

"엄마도 극장 가면 스크린하고 대화를 나누세요?"
"아니. 나는 영화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한다."

요즘은 책이든 영화든(하물며 화장품도) 후기를 참고할 때 그 후기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잘 거르는 지혜가 필요하다. 후기이벤트 등을 통해 경품을 걸어놓고 개인 블로그, 커뮤니티 사이트에 후기를 올리도록 유도하는 마케팅이 만연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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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주류일까, 비주류일까.
천재를 알아보는 것과 그가 천재임을 인정하는 것은 과연 같은 의미인가.

숀 코네리와 롭 브라운 주연의 2000년작 《Finding Forrester》는 이 두 개의 질문에 아주 적절한 해답을 제시한다.
단 한 권의 소설을 출판하고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나 돌연 은둔해 버린 작가 윌리엄 포레스터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 샐린저를 모델로 했다. '익명성은 작가 고유의 자산'이라는 이유로 침묵하고 있다는 샐린저. 영화를 보면 미국내에서의 샐린저의 위치를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데 영화속 포레스터가 과연 샐린저의 어디까지 형상화한 것일까 궁금해지는 것은 영화에도 등장하듯 '우상을 향한 어쩔 수 없는 경외심' 때문이다. 

원석에 가까운 재능을 가진 자말은 갓 열 여섯살의 흑인 소년으로 말하자면 낭중지추의 인물. 우연히 자말의 습작 노트를 읽은 포레스터가 자말의 재능을 알아보고 노트에 첨삭을 해서 돌려주는 것으로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된다. 까다롭고, 괴짜에 병적으로 은둔 생활을 하는 포레스터가 누구인지 몰랐던 자말은 그와 교류하면서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두 주인공을 제외하고 시선을 끄는 인물은 자말이 장학금을 받고 옮겨간 사립학교의 국어(=영어) 교수 크로포드(F.머레이 에이브라함)다. 그는 자말의 작문 숙제에서 자말의 재능을 발견하지만 자말이 천재라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않는다. 자말은 자신이 흑인에 브롱스(Bronx)출신이라 차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소설가로서 재능이 없음을 알고 나서 남에게 글쓰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된 것이 크로포드의 내력이고 보면 자말의 천재성에 대한 크로포드의 끊임없는 의심은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편견보다는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열등감에 가까워 보인다. 열등감이 이제 고작 열 여섯인 어린 소년의 재능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 하게 하는 것. 

천재는 천재를 아끼지만 범재는 천재를 시기하는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포레스터와 자말이라는 두 천재 사이에 놓인 크로포드는 천재를 위협하는 악역이라기 보다는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자말이 좀 더 성장하고 그래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인간을 포용하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면 자말은 수업 중에 크로포드에게 수치를 주었던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크로포드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 전반에 걸쳐 주옥 같은 대사들이 많지만 특히 간간히 커다랗게 웃게 만드는 포레스터식 유머가 즐겁다. 이를 테면, 

- 학교 작문 대회 얘기 중에 자말이 포레스터에게 그런 종류의 대회에 참가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포레스터는 참가한 적도 있고 당연히 1등을 했다고 으스댄다. 자말이 다시 그에게 1등 상품이 뭐였느냐고 묻자 포레스터는 너무도 태연한 얼굴로 "퓰리처 상"이라고 대답한다.
- 예전에 포레스터의 소설을 읽었던 사람들이 소설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는지 궁금해하는 자말을 보는 포레스터의 표정이 재미 있다. "예전에 읽었던?" 이라고 반문하는 포레스터. 이어지는 다음 장면은 학교 도서관에서 자말이 포레스터의 소설을 대출하는 장면이다. 결국 자말은 스물네 권이나 되는 책들이 모두 대출 상태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 두 장면은 재미있지만 동시에 중요한 지적을 하는데 포레스터의 소설이 시대를 거슬러 널리 읽히는 고전소설이라는 점, 포레스터의 소설이 대중적/비평적으로 모두 찬사를 받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보통 고전소설 혹은 본격소설 하면 재미없다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구체적으로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 포진해 있는 내 사촌들) 거기다 노벨상이니 퓰리처상이니 하는 수상작이라고 하면 이런 편견은 더욱 강해진다. 소설 입장에서 보면 이건 굉장히 억울한 누명이다. 이들 소설이 모두 재미있다는 것이 아니라 장르소설이라고 모두 가볍고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듯 본격소설 역시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호밀밭의 파수꾼』출간 50주년(2001년) 기념을 앞두고 그 1년 전인 2000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몇 년이나 지나서야 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샐린저에 대한 애정이 지나치게 깊어서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보기를 잘 했다는 것. 소설로 읽고 싶어서 검색했으나 소설은 없는 듯 하다. 

- 덧. 미국과 우리나라 교육 방식의 차이인데(이건 내 경험에 한정된 얘기이므로 지극히 주관적이고 별 근거 없는 얘기일 수도 있다), 작문 수업으로 범위를 좁혔을 때 미국은 주제를 다루는 학생의 사고(思考)가 확장되도록, 우리나라는 학생의 사고가 주제에 집중되도록 하는 경향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나름 일장일단이 있는 듯.

친애하는 자말에게.
한 때 난 꿈꾸는 걸 포기했었다. 실패가 두려워서, 심지어는 성공이 두려워서.
네가 꿈을 버리지 않는 아이인 걸 알았을 때, 나 또한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지.
계절은 변한다.
그래, 나는 인생의 겨울에 와서야 삶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네가 없었다면 영영 몰랐을 거다. - William Forre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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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플롯과 내러티브 모두 이렇게 단순한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적이 언제였더라... 였다.
《사랑》은 사랑이 전부인 한 남자의 사랑 얘기다. 스토리만 보면 얼핏 예전에 TV에서 방영했던《남자의 향기》(하병무 원작)와 비슷한 것 같지만 혁수에 비하면 인호는 훨씬 단선적이고 직선적인 인물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동선도 당연히 단선적이고 직선적일 수밖에.
영화가 시작한 직후부터 후회가 밀려들었다. 왜 이 영화를 볼 생각을 했을까. 일어나서 극장을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자리를 지키고 끝까지 본 이 영화는, 보는 내내 내 정서를 불편하게 했고 거의 1/3정도의 장면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었다. 실제로 서너 장면에서 눈을 감고 스크린을 외면했다. 영화적 공포는 피가 낭자하고 신체가 잘려나가는 시각적 효과 없이도 단순히 이야기만 가지고도 관객의 정서를 불편하게 하는 유사 효과를 낼 수 있다. 이것이 드라마(劇)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내러티브가 중요한 이유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설적인 대화법을 고수한다. 나는 이런 대화법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나같은 사람에겐《사랑》은 착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영화다. 봐서는 안 될 타인의 사연을 몰래 훔쳐 본 것 같은 기분이란 참…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이야기가 단순하고 인물들이 정형화되어 있다보니 감정 이입, 몰입이 쉬워서 딱히 어떤 사건이 없어도 그들(인호, 미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 눈물이 났다.
인호가 왜 미주를 사랑하는지, 왜 미주를 버리지 못하는지 궁금해 할 필요가 있을까.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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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는 물론 지금도 난해하다고 소문난 악성의 대푸가와 함께 시작하는 영화의 앞 부분이 특히 좋다. 전기영화의 경우 늘 그렇지만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 안정된 연출, 안정된 극본이 영화의 기본적인 재미를 보장한다. 다만 악성으로 우뚝 선 베토벤의 대표적 전기영화가 되기에는 팩션의 특성상 사실 관계와 관련, 약간의 연대기적 오류가 있다.

《카핑 베토벤》은 전성기에 청력을 상실해간 베토벤이 작곡자로서는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악조건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미스테리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베토벤에게 아마도 뛰어난 필사가(copyist)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바탕으로 한다. 베토벤에게 어느 날 우수한 필사가인 안나가 찾아오고 베토벤은 그녀의 도움을 받아 9번 교향곡을 완성할 뿐 아니라 초연 무대에서 지휘까지 무사히 해낸다는 내용이 영화의 줄거리.

베토벤의 전기영화라는 점에서《불멸의 연인(Immotal beloved)》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이 임종 직전 남긴 유서에 등장한 베토벤의 연인을 찾는 과정과 베토벤의 이야기가 교차편집의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세 명의 여인이 그 대상에 오르지만 결국 그 연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의 연서'는 맥거핀 효과 같은 것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영화적 상상력과 사망 이후 알려지지 않은 악성의 인간적인 일면을 재조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불멸의 연인》에선 게리 올드만이 주연을 맡았는데 화면을 압도하고 영화의 전반을 지배했던 강렬한 그의 카리스마는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카핑 베토벤》의 애드 해리스는 자막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변신은 놀랍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게리 올드만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베토벤의 이미지 즉, 베토벤 하면 막연히 그리게 되는 괴팍하고 까다롭고 은둔적인 이미지와 게리 올드만의 베토벤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기 때문.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만이 지닌 광기가 '베토벤적인' 것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해야할까... 배우 자체가 품고 있는 아우라는 열심히 연기하는 것과는 또다른 문제인 모양.
또한《카핑 베토벤》에서 에드 해리스가 커다란 보청기를 귀에 꽂고 피아노를 치는(친다기 보다는 두들기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아무래도《불멸의 연인》에서 게리 올드만이 그랜드 피아노 위에 귀를 대고 진동을 느끼면서 '월광'을 치던 장면에는 비할 수가 없다.

《불멸의 연인》이 전적으로 게리 올드만에 의한 영화였다면《카핑 베토벤》은 또 다른 히어로인 안나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베토벤 악보의 필사가이자 말년의 베토벤과 정신적인 영감과 교감을 나누는 아름답고 재능 있는 아가씨 안나는 다이앤 크루거가 열연했다. 영화《트로이》에서 그녀가 세기의 미인 헬레나를 맡았을 땐 '세기의'라는 단어의 무게 탓인지 "에게~" 했었는데《카핑 베토벤》에서 다시 만난 다이앤 크루거는 재능 있고 아름답고 매력 있는 배우였다.

사족. TV드라마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끌던 사극 장르가 요즘은 판타지가 어우러진 팩션 장르로 이동하는 사례를 심심찮게 본다. 하지만 특히 실존 인물이 배경이 되는 팩션은 잘못된 역사(=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픽션보다 더 진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치밀하게 이야기를 다루어야 하는 장르다. 고리적 얘기지만 다음 중 가구가 아닌 것은? 이라는 시험 문제에 '침대'에 동그라미를 쳤다는 초등생들의 이야기는 그저 웃고 넘길 얘기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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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반 10분, 후반 20분은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었다. 결국 이야기보다 액션과 그래픽이 돋보였다는 얘기.

2. 영화를 보면서 세 번 울었다. (내 눈물은 어찌하여 이렇게 흔한 것인지...)
- 소화가 칼을 맞은 이곽을 위해 약초를 빻으면서 울 때
- 이곽이 잡혀간 소화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서 "소화!!!!!!!!!!!!" 라고 외칠 때
- 이곽이 소화에게 "꽃에서 향기가 나..." 했을 때.

3. 오랫동안 소재 검열에 갇혀있었던 후유증인가. 우리나라 어른 영화인들이 만드는 판타지 영화는 어떻게 된 일인지 소설보다도 그 상상력이 못하다. 상상력이 부족한 판타지가 재미없는 건 당연한 일. 일단 제목이자 영화의 배경인 중천의 세계가 너무 평범하다. 간단한 예로 중천 세계의 물이 현세의 물처럼 사람을 똑같이 적신다면 이건 너무 심심하지 않은가? 김태희의 연기력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배우에게 가혹한 일이다 싶다. 몇 가지 이유에서, 소화의 캐릭터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것은 배우보다 작가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연기를 논하려면 정우성이 도마에 올라야 한다. 오랜 세월 연기했는데도 연기가 늘지 않는 배우는 욕을 좀 먹어도 된다. 그러나 이곽 자체는 말할 것도 없이 멋있고 매력있는 캐릭터였다. 참고로 나는 대의명분 때문에 여자 가슴에 대못을 박는 남자를 '매우' 싫어한다.  

《중천》은 영화 줄거리인 '이야기'보다 중천 세계를 다루는 '빈곤한 상상력'이 더 큰 문제로 보인다. 시나리오를 누가 썼을까, 참 궁금해지는 대목. 그런데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각본에서《타짜》의 감독인 최동훈을 발견했다. 검색해 보니 71년 생이다. 국내산 진짜 판타지 영화를 보려면 머그게임과 함께 성장한 멀티미디어 세대이자 영상세대인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겨야 하는 걸까.
그래픽은 볼만하다. 이곽이 3만 귀신대군과 일전을 벌이는 장면은 손꼽을 정도로 잘 찍었다. 문제는 늘 그렇듯이 '이야기'인데, 일단 과도한 편집이 아쉽다. 영화를 보다 보면 영화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편집의 독소를 느낄 정도. 한 마디로 이 영화는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언젠가 우리나라 TV만화의 성우와 관련해 들은 얘기 하나. 모 성우가 만화속 인물이 어른이어서 성우가 어른의 발성을 했더니 위에서 시정 지시가 내려왔는데, 이유인즉 '애들 만화에 어른 목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했다고...  
- 이런 얘기를 듣고 나면 자국못지 않게 성우들의 캐스팅이 훌륭했던《카우보이 비밥》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애들 만화'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같지만《원더풀 데이즈》를 보면 그 편견이 새로울 것도 없다. 기술의 발달로 그래픽은 일취월장했으나 도무지 웃음도 나오지 않는 그 유아틱한 스토리라니. 요즘 애들, 똑똑하다. 치밀한 스토리와 섬세한 연출로 무장한 저패니메이션과 웬만한 판타지소설 못지 않게 기승전결이 잘 짜여진 스토리가 재미를 더하는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그들을 언제까지 '애들'이라고 치부할 건가.
      

한편으론 이러니 저러니 해도 훌륭한 원작을 제대로 말아먹은《퇴마록》에 비하면 그래도 이 장르가 나름 발전은 하고 있군, 싶기도 하고...  

 

 


결론은. 빈곤한 상상력이 참으로 아쉽지만 어차피 영화는 종합예술 아닌가.
먹다만 단무지처럼 잘려나간 줄거리는 그만하면 즐기는데 부담이 없고(긍정적으로, 상상하는 즐거움은 있으니까) 그래픽은 좋았고 카메라의 시선도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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