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처럼 살지 않는 방법: 이지 – 분서]
P43.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으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 「속분서續焚書/성교소인聖敎小引」
[집단의 조화로부터 주체의 책임으로: 레비나스 – 시간과 타자]
P127. 과거 사람들은 욕망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금욕禁慾”이나 ‘절욕節欲’이 성숙함의 척도처럼 가능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들이 과거 사람들이 우리보다 성숙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긍정했다가는 살아남기도 힘든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여성이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녀들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원칙을 맹목적으로 지키면서 살았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말에, 결혼해서는 남편의 말에,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남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남성들은 여성을 타자로 경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거나 숨기고 있는 여성에게서 어떻게 낯섦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생각과 욕망에 상대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만 그는 나에게 타자로 드러날 수 있다.
P128. 플라톤 이후부터 사람들은 사회적인 것의 이상을 하나가 됨이라는 이상에서 찾았다. 그래서 사람들을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타자를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고, 마침내 집단적 표상이나 공동의 이상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우리’라고 말하는 집단성이고, 인식 가능한 태양이며, 진리로 향하면서 타자를 자신과 얼굴을 맞댄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과 나란히 서 있는 자로 인식하는 집단성이다.
- 「시간과타자Le Temps et L’autre」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 사르트르 – 존재와 무]
P137~138.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이제야 분명해진다. 조건이 달라졌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버려질 수도 있다면,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거의 노이로제에 가까운 정신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조건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기를, 다시 말해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하기’를 그토록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아닐까? 상대방은 자신의 자유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아니 정확히 말해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현재 나를 사랑하는 것도 그가 자유로운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나를 버리는 것도 역시 그의 자유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다. 상대방이 나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소망 이면에는, 상대방 역시 나와 마친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불길한 직감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타자란 치명적이지만 동시에 멋진 지옥 아닌가? 한때는 즐겨 앉았던 의자도 시간이 지나면 싫증이 난다. 의자는 더 이상 우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상태에 바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의자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반성할 수가 없고, 따라서 이런 불행한 상황을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 반면 자유를 가진 타자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언제든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마침내 우리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다시 그를 붙잡기 위해 고뇌의 나날을 다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사유의 의무: 아렌트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P152~154. 아렌트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히만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이웃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시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이 관여했던 유대인 학살이란 전대미문의 악은 어디로부터 유래한 것일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숙고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문제였다. 그녀의 대답을 들어보자.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는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휸이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주체로 사는 것의 어려움: 바디우 – 윤리학]
P284~285. “선생님, 이상과 현실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인가요?” 잠시 숙고하다가 나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실이란 급류, 그러니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압도적인 강물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급류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이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겁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그 나무토막을 강바닥에 박고 버텨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류의 힘이 너무 강해 질질 끌려가기 쉬울 겁니다. 그렇지만 강바닥에 박은 나무토막이 없다면, 우리는 급류의 힘에 저항할 수도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