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반장 추억 수첩 - (19)
: 너무 빳빳해서 부러질 것 같던
사단마크가 약간 닳고 좀 흐물흐물해졌을 때.
질기디 질긴 전투복 바지가 너무 닳아
무릎 쪽이 찢어졌을 때.
나도 약간 이나마 군생활을 하긴 했구나 하는 걸 느낀다.
이등병 시절 정영훈 병장이 닳고 너덜한 자기 사단마크와
빳빳한 내 사단 마크를 비교하며 짬밥 이야기 했던 것이 생각난다.
: 99년 2월 9일 내 첫 분대장이었던 B병장이 전역을 했다.
너무 초라한 전역식이었다.
헹가래 쳐주자고 했지만 사람들이 모이질 않았다.
평판이 좋진 않았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했다.
그래도 자기 할 일은 칼 같이 잘했고
분과원들을 나름대로 확실히 챙기는 것도 있었다.
한 때 정말 미워했고, 싫어할 때도 있었지만
막상 전역하니 섭섭하다.
역시 사람 마음은 모질지 못한가 보다.
군대 와서 깨달은 것 =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어렵다.
아무튼 전역 후 앞날에 축복이 있기를...
/* 제가 신교대에서 퇴소하기 전날
내무실장(조교 대빵이라고 보면 됩니다)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만약 너희가 전쟁터에서 다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을 때 너희를 끝까지 끌고 가는 사람은
평소 너희를 가장 못살게 굴고, 가장 갈구는 고참일 꺼다.
라구요.
전 첨에 그 소리 듣고 무슨 X소리인가 했습니다.
어떻게 못살게 굴던 고참이 끝까지 다리 다친 후임을 끌고 가느냐구요.
옳구나 라며 바로 버리고 갈 거라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교대 내무실장이 했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더군요. ^^;
그나마 마음이 있으니 싫은 소리라도 하는 거죠.
마음이 없으면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제가 처음 전입 왔을 때 그 B병장한테서 갈굼을 많이 받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갈굼 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갈굼 받았지 이유 없이 갈굼을 받았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네요.
.......
한 때는 정말 그 사람을 미워했는데....
만약 기회가 되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술 한 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
: 99년 2월 11일
구름 낀 맑은 날씨였다.
흐려지면서 구름 사이로 해가 좀 보이는가 싶었는데
15시 반 쯤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눈이 펑펑 내리는 게 아닌가???
내심 "X됐다"를 연신 입에 달며 하늘을 원망했다.
그나마 야간에 근무가 있다는 것을 위안 삼았다.
// 야간에 근무 있는 사람은 따로 일어나서 눈을 치우지 않아도 되거든요.
포상에 위장망을 걷으러 갔다, 다 걷으니 언제
눈이 내렸냐는 듯 다시 햇볕이 쨍쨍 비치는 게 아닌가?
엄청 눈이 쌓일 것 같은 기세였는데...
그냥 부담 없이 눈 내리는 풍경을
감상하라고 하늘나라 선녀님이 내려준 선물인가? --;
오늘 주희 졸업식이다
언제까지 어리광만 부릴 막내 같았는데...
주희한테도 이제 '아가씨'라는 호칭을 붙여야겠다.
어제 전화를 했는데 큰누나가 졸업 선물로
미용실에 데러가서 머리 깎고 '염색!!!'을 시켜 줬다나???
염색을 했다는 말에 충격 받았다.
내가 너무 보수인가?
나중에 집에 가면... 쩝....
그냥 잔소리 보다는 예쁘다는 말을 해줘야겠다.
시대가 시대이니까...
/* 염색가지고 뭘 그러냐고 하실 텐데....
이 글을 썼을 그 당시에는 생각과 사고가 아주 옛스러웠거든요.
99년 2월 11일이라~~~
헤~~~ 정확하게 6년 전 오늘이군요.
시간 참 잘~~ 갑니다. */
: 99년 2월 13일
저녁에 집에 전화를 했다.... 여느 때처럼...
그런데 주희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닌가.
"오늘 엄마 생일인거 아나?"
앗!!! 속으로 뜨끔했다.
오늘이 음력 12월 27일... 엄마 생신일 줄이야.
평소 아버지 환갑만 생각했는데.....
다시 엄마를 바꿔 생신 축하드린다는 말을 했다.
엄마는 오히려 돈을 못 부쳐 주는 게 미안하다며
돈을 부쳐 준다고 했는데 겨우 말렸다.
다행이다... 그냥 지나쳤으면... 흐....
/* 처음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B병장이 부모님 생신을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대답을 못했지요.
그 때 욕을 엄청 먹었지요.
나이 스물을 넘긴 놈이 부모님 생신도 모르냐구요.
당장 알아오지 않으면 군생활이 꼬일 거라는 으름장에
부랴부랴 집에 전화를 해서 작은 누나한테
아버지, 엄마 생신 날짜를 물어봤죠.
그 때 작은 누나는 한 숨을 쉬더니 술술술
바로 날짜를 알려주더군요.
...... 얼마나 부끄럽던지.....
최신 유행가 가사는 몰라도
요즘 잘나가는 여자 탤런트 이름은 몰라도
애인하고 만난지 언제 100일이 되는지 몰라도
부모님 생신은 꼭 알도록 합시다. (^_^)a */
: 99년 2월 14일 04:00...
또 눈이 와서 포상 위장망을 걷으러 갔다.
왜 하필 설 연휴 첫날부터 이러나...
작년에는 새해 첫날부터 눈이 내려 사람 엿을 먹이더니
올해는...
정말 하느님은 무심하시다.
너무 무심해서 욕도 나오지 않고 무덤덤해진다.
사회 있는 이들은 모를 꺼다 아마
눈이 오면 그 광경에 좋아 히히덕거리겠지...
안 경험해보면 모른다.
눈이 싫다, 정말 싫다
전역하고 나서 얼굴만 잘 생기고 성격이 뭐 같은
사람을 만나면 아마
"이 눈 같은... 함박눈 같은 놈아!"
라는 정말 심하고 모욕적인(?)욕을 해 줄 꺼다 -_-;
// 눈은 항상 쉬는 날, 빨간 날에만 내립니다.
//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 군인들 쉬는 꼴을 못 보는 국방부가 기상청과 짜고 벌이는
// 음모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헐 헐 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