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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읽다가 조금이라도 현실적이지 않다고 느껴지면 몰입이 ‘파지직’하고 깨진다. 소설뿐만 아니라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다. 나에게 ‘트랜스포머’나 ‘어벤져스’의 세계는 익숙하지도 않고, 선망의 대상도 아니다. 어느 때는 내 앞에 주어진 삶이, 괴수에 의해 파괴된 도시보다 더 난장판이고, 내 앞의 상사가 조커보다 더 악랄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구태여 그렇게까지 멀리 나가야 하나? 어느새 ‘더럽게’ 합리적이고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소설을 읽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정말 단숨에 읽었다. 이야기 속 인물들과 하나가 되어서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었다. 나도 ‘책장이 넘어가는 게 아까웠다’는 세간의 평가들에 ‘좋아요’를 누른 1인 중 하나다.
이 책은 8개의 짧은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가 2~30대 직장인들에게 무척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이다. ‘익숙함’과 ‘공감’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다. ‘내가 아는 이야기’, ‘나에게 익숙한 이야기’는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시함을 유발한다. 친숙하게 느껴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미 아는 이야기’,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리는 듯하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극찬을 받기도 하고, 깍쟁이 직장여성의 깊이 없는 일기 정도로 비하되기도 한다.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전자의 평가에 가깝다. 올해 가장 뜨거웠던 책은 ‘90년생이 온다’가 아닐까 하는데 이 책도 그 비슷한 흐름 속에 있다. 사회로 새롭게 진입한 젊은 세대들이 추구하는 바와 충돌하는 지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수평적인 조직을 추구한다지만 기존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조직문화, 원칙 없이 오너의 기분에 따라 추진되는 일들 등 직장에서의 불의(不義)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시대 직장인들은 일과 삶의 균형을 꿈꾸고, 정치의 ‘민주화’만큼 일상에서도 정의가 충만하기를 꿈꾸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과 부딪친다. 우리들은 더 이상 직장과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러 거대한 성공을 얻게 되기를 꿈꾸지 않는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 _ 73쪽(e-book)
“전 막 열심히 하기도 싫고, 막 성공하고 싶지도 않은데요.” _ 135쪽(e-book)
우리의 분노는 사회체제나 구조에까지 번지지 못하고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주변의 직접적인 인물과 현상에 꽂히곤 한다. 기업의 지배 구조, 자본의 본질이 어떤가보다는 오너의 언행불일치를 비웃고, 축의금을 내지도 않으면서 받으려고만 하는 직장 언니의 뻔뻔함에 분노하며, 잘해준다고 생각했지만 불성실함으로 대응하는 가사도우미에 화가 난다. 사실 이것이 우리 세대의 한계이기도 하다. 소소한 불의에는 분노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거대한 불의의 구조에 대한 의문이나 고민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위태하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이 서바이벌 게임의 생존자가 되기를 원하지 ‘돈키호테’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수습 기간이 끝나고 정직원이 되면서 회사에서 가족 의료비도 지원해주었다. 아빠는 그 돈으로 수술할 수 있었다. _ 247쪽(e-book)
그럼에도 나는, 2019년을 살아가는 2~30대 직장인의 일상과 생각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타임머신에 단 하나의 물건을 담아야 한다면, 이 책을 넣고 싶다. 우리와 가장 가까이 근접한 소설이다. 회사일과 글쓰기를 병행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작가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이 많고 많은 유혹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공유하는 직장인으로서 작가의 앞날을 기대하고, 또 응원하고 싶다.
“이 사람아. 잘 생각해야 돼. 요즘은 그냥 순간이야, 순간. 딱 한 곡이라고. 이 많고 많은 유혹이 넘쳐나는 세계에서 삼분 정도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그걸로 된 거야. 최선을 다한 거야.” _ 131쪽(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