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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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잘쓰는 사람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본인의 경험을 잘 연결시킨다. 자신의 경험과 유리되어 있는 글은 읽기도 힘들지만, 글 자체에 매가리가 없다. 이 책에 실린 짧은 글들은 글쓴이의 삶과 밀착되어 있다. 자신의 경험과 일화를 들어 하고 싶은 말을 하니 글이 재미있지 않을 수가 없고, 글에 힘이 없을 수가 없다. 문장 하나하나에 뽐을 내서 밑줄을 긋게 만드는 부분은 없다. 하지만 글을 풀어내는 솜씨, 그 안에 담긴 사상과 생각들이 아름다워서 통째로 옮겨적고 싶은 부분은 많다. ‘매일 쓰는 삶‘이 다다르고자 하는 글쓰기의 경지 중의 하나가 이 책에 담겨져 있지 않나 싶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 P12

유희와 노름은 늘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삶과 노동은 이미 이루어놓은 결과에 줄곧 얽매여야 한다. - P16

도시 사람들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도 없다. 도시민들은 늘 ‘자연산‘을 구하지만 벌레 먹은 소채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자연에는 삶과 함께 죽음이 깃들어 있다. 도시민들은 그 죽음을 견디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 P21

대학에 입학한 남학생들이 한두 해를 방황 속에 허송하다가 ‘복학생 아저씨‘가 되고 나서야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군대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 P23

우리에게 과거의 상처는 너무 악착스럽고, 미래에의 걱정은 갈수록 두터워질 뿐이다. 그래서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고 눈앞의 삶을 깊이 있게 누리는 것이 용서되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걱정거리로 확장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은 지금 이 자리의 삶에 자신을 자유롭게 바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다. 대학의 목적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자유의 시간과 공간 없이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구실아래 그 자유는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거의 폐기되기까지 했다. - P42

이 유례없는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조금씩 지쳐 있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때 그 무거운 마음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 P54

과거를 영예롭게도 비열하게도 만드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 P63

눈앞의 참혹한 광경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마주 볼 수 있다 해도, 옛날의 마음 아팠던 기억에는 손발이 묶여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 P105

청계천 복개는 내가 ‘덮어 가리기 근대화‘라고 부르는 것의 전형적인 예이다. 박정희 이후 오랫동안 우리의 근대화는 눈앞에 문젯거리가 있으면 그것을 올곧게 해결하기보다는 덮어서 보이지 않게 했으며, 구질구질하다고 여겨지는 삶은 그것이 성장하고 개화하기를 돕고 기다리기보다는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몰아냈다. 이명박 시장 시절에 덮었던 청계천을 다시 열었지만, 사정이 많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개천의 양안과 바닥을 시멘트로 덮어 단장하고 수돗물로 냇물을 연출하게 하였으며, 시민들의 삶과 깊이 연결된 복잡한 가게들을 멀리 내보냈으니, 조금 세련된 ‘덮어 가리기’에 불과하다. - P111

일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닌 시간과 공간에서 지지부진하게 힘을 소비하는 일은 많아도 자신을 풀어놓는 데는 늘 실패하는 사람이 자신을 반성하는 일에 서툴 수밖에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내가 자극 없는 사고를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혐오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겁내고 힘겨워한다고 말하는 편이 아마 옳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런 시간이 내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늘 옛날의 기억 속에만 있다. - P155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 P212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기계 뒤에도 사람이 있고 기계 속에도 사람이 있다. 내가 버린 쓰레기도 사람이 치워야 하고 내가 만들어낸 소음도 사람의 귀가 들어야 한다. 골짜기에 댐을 막으면 사람의 집이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개펄에 둑을 쌓으면 그만큼 사람의 생명이 흙속에 묻힌다. 사람은 큰 집에서도 살고 작은 집에서도 살고 집이 아닌 것 같은 집에서도 산다. - P244

물질문명의 시대란 역설적이게도 몸이 물질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이다. 이제 육체가 물질을 접촉하는 순간이란 저 스냅 동작의 짧은 순간뿐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단추를 누른다. 옷을 입을 때도 옷고름을 매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 위층에 올라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단추를 누른다. 우리의 육체가 물질과 교섭할 때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각들은 이제 누름단추의 탄력으로 통일된다. 물질로부터 듣게 될 모든 소리는 이제 딸가닥에 그치는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로 통일된다. 흙도 물도 불도 나무도 돌도 모두 손가락에 한 번 튕겨오르는 탄력과 딸가닥으로 추상화된다. - P277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애들은 그 시간에 학교 성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소설이나 만화를 보기도 할 것이며, 내가 알고는 제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난잡한 비디오에 빠져 있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보게 될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보는 편이 낫다고 본다. 아내는 그런 시간에 노래방에 갈 수도 있고,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 내 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늘 되풀이되는 생활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 P281

유진오 선생이 세상을 버리기 직전에 썼던 <양호기>에는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우리는 국권을 남의 손에 넘겨주었던 한말의 위정자들과 관리들이 매우 무능한 사람들이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철저히 공부를 했고, 어려운 과거 시험을 통해 등용된 관리들은 능력도 출중했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강해서 일본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열정적으로 조리정연하게 사안을 따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 "구미 제국의 예를 볼작시면"이라는 한 마디만 내뱉으면, 우리 관리들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주눅이 들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사용하던 잣대가 달라지니 사태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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