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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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뜬금없이 ‘오다 노부나가’를 읽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책 때문이었다. 16~17세기 일본을 개괄하다 보니 좀 더 그 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오다 노부나가’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 책은 그 시기 일본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소 특이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서구, 특히 가톨릭과의 접촉을 굉장히 중요하게 파고든다. 

  우연히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의 세력이 일본을 발견하게 된 것, 그들이 일본에서 동남아에서처럼 무력시위를 하기보다는 무역으로 이득을 취하려고 한 것.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지리적 우연성과 행운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바다라는 창구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종종 접해 왔던 일본인들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와 비교하면서 읽게 된다. 일본과 중국이 세계에 알려진 것은 생각보다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게 된다. 지리적인 영향으로 노출이 빨랐고, 그 접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노출도 어려운 위치에 있었지만, 명분론과 척사론에 입각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실용주의가 아닐는지. 흑백이 분명한 것이 명쾌하고 쉽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지 않나.

유럽이 상업·군사적으로 접근했을 때 명과 일본은 군사적 도전에는 대처하면서도 상업적인 이익은 취하는 방향을 채택한 반면, 조선은 능동적·수동적 측면에서 일체의 교류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_ 145쪽

  재미있고, 시각 자료도 풍부하고, 시각도 새로워서 읽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일본 역사의 주변부의 사실들을 너무 과잉대표한 것은 아닌지 생각도 들었고, 도쿠가와 막부가 가톨릭 신자들을 억압하지 않아서 지배종교나 세력이 교체되었다면 그것이 과연 일본 역사를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었을까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기에, 그동안의 굳건했던 믿음과 사회질서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다시 전국시대와 같은 혼란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 혼란을 틈타 가톨릭 국가들이 군사적인 영향력을 강화했을 가능성은 없을지. 여러 방면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독서였다.



이처럼 막부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접근에 대한 대응을 고민하는 한편으로, 러시아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빼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확인됩니다. 이것은 일본에 찾아온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자, 일본의 미래를 위한 행운이었습니다. 이 행운은 청나라와 일본에 동시에 찾아왔지만, 청나라의 경우 이 행운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에는 다른 문제들이 더 컸고, 일본은 이 행운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같은 시기 조선에는 이러한 위기와 행운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 P39

대항해시대에 유럽이 일본에 가한 군사적 위협과 위기의식, 그리고 난학이라는 준비작업을 통해 일본은 식민지가 되지 않고 거꾸로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행운의 덕을 얻으려면 행운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강렬한 의지를 갖고 끊임없이 준비해놓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정해진 법칙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물론 물질적인 조건에 크게 제약받지만, 때로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주어진 조건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 P49

유럽 세력의 침략을 미리 봉쇄하기 위해 일부러 기술을 퇴화시킨 일본을 스페인·포르투갈 등이 작심하고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행운이었습니다. 유럽이 에도시대 일본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 앞선 전국시대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평판 때문이었으니, 이는 곧 일본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찍이 중화 문명의 성과를 흡수하는 데는 걸림돌이 됐으나 군사적으로 보면 일본을 지켜준 바다는, 이번에도 유럽 문명의 성과를 흡수하는 데는 지장이 된 반면 군사적으로는 일본을 지켜준 셈이었습니다. - P91

유럽이 상업·군사적으로 접근했을 때 명과 일본은 군사적 도전에는 대처하면서도 상업적인 이익은 취하는 방향을 채택한 반면, 조선은 능동적·수동적 측면에서 일체의 교류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 P145

요약하자면 히데요시 정권과 도쿠가와 일본, 명나라와 청나라도 가톨릭 세력이 정치·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유럽과의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중국과 일본은 같았고, 조선은 달랐습니다. - P246

사실상 이 모든 것이 정치입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무조건 밀어붙이는 정치를 펴다가 부하에게 배신당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군사력과 계략을 총동원해서 일본을 차지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히데요시는 조카에게 권력을 물려줄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아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모든 과정이 엉켜버린 상태에서 죽은 것이고, 이에야스는 아들에게 통치권을 물려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히데요시에게는 새로운 세계와 접할 수 있는 통로가 포르투갈과 스페인 두 나라뿐이었지만, 이에야스에게는 네덜란드와 영국이라는 좀 더 입맛에 맞는 상대가 나타나주었습니다. 이것이 이에야스의 행운이었습니다. - P346

이리하여 도쿠가와 막부는 ‘네 개의 교역 창구’ 시스템을 완성했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망상에 빠져서 망쳐놓은 국가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습했다기보다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치세 덕분에 한껏 넓어진 일본의 국제적 활동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제한함으로써 무사 집단의 이익을 지키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외적으로는 무역이 번성하고 일본인들이 화교처럼 일본 바깥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경제성장에 따라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피지배민들이 무사 집단에 도전하는 상황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끝내려 한 것입니다.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배 엘리트인 무사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장을 중단시켰습니다. - P392

16~17세기의 일본이 경험한 유럽과의 접촉은 그 후 일본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한때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중화문명이, 이제는 일본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문명들 가운데 하나로서 상대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에도시대 일본이 아무리 유럽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길을 택했다고 해도, 한 번 열린 세계관이 다시 예전처럼 닫히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 P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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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7 - 혼노 사의 변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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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가 삼국지만큼이나 재미있다고들 한다. 개성이 강한 인물들도 많고, 그들의 이합집산이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물론, 자기네들의 혼란을 마무리 짓는 과정이 우리의 아픈 역사와 맞물려 있어 마냥 즐기기에는 불편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을 빼고라도 삼국지와 가장 큰 차이는, 죽음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길고, 상세하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도 할복과 가이샤쿠로 이어지는 무사들의 죽음에 대해 최대한 비장하게,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여 그리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자결하는 인물이 있었던가? 있었다고 해도 이처럼 그 과정을 자세히 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자결했다' 한마디로 표현해도 그 비극성이 충분히 드러날 텐데, '죽음의 미학'이랄까, 이런 부분은 아무리 접해도 참 생경하기만 하다. 삼국지를 읽을 때, 배고픈 유비를 위해 자기 아이를 내다바치는 산골 농부(?)가 나오는 부분을 볼 때의 불편함, 매스꺼움이 들었다. 물론, 그들의 문화에 대한 나의 몰이해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이 소설의 특징이라면, 승자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한 시대의 천재 또는 풍운아로서 일본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맞지만, 그의 성격적 결함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작가는 오다 노부나가의 모든 행동의 그의 혜안과 계획에서 나온 것인 양 그리고 있다. '그니까 그럴 수 있다'라는 관점이다. 하지만 패배자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하다. 노부나가의 계획, 웅대한 포부, 천하인으로서의 자기희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패배의 원인이 있는 양 그려진다.

가령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는 미쓰히데가 홧김에 에이잔을 불태웠다면 그것은 단순한 폭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경우가 달랐다. 그는 진실로 일본의 평정을 한 걸음 전진시켰으니까... _ 165쪽

  아직 직장의 말단에 있어서 그런지, 나는 오히려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공감이 가면서 읽었다. 까마득한 부하들이나 동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다면, 알 듯 말 듯 한 지시를 해놓고 결과물에 대해 꾸짖음을 당한다면, 나라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세상의 천재 중에 괴팍한 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작은 성취를 얻은 그들 모두 막돼먹게 행동할 '노부나가의 권리'를 획득했다고 믿는다면 그 얼마나 꼴불견인가. 박정희와 김재규도 떠올랐고, 크고 작은 CEO들의 갑질들도 떠올랐다. 아, 진짜 밥벌이의 어려움이란.

  지나치게 비장한 결말, 그리고 '죽음 이상의 죽음'과 같은 할복에 대한 레퀴엠이 몰입을 헤친다. 좀 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전국시대를 그린 소설은 어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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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공무원에게 묻다 - 당신이 꿈꾸는 사회는 무엇인가? 어떤 일, 어떤 삶 5
윤기혁 지음 / 남해의봄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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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출근하기 싫었던 것 같긴 하지만, 요새는 특히 심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어떤 일이든 이런 식으로 하면 욕은 안 먹던데.’라는 요령만 늘었다. 상사는 그놈이 그놈 같고, 별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 짜증스럽다. 이 책에 있는 말대로 '초심'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그들을 평가하기 위한 잣대(7)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살다가 정말 그저 그런 아저씨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진작에 잃어버린 열정이란 것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읽었다.

 

짧은 인터뷰 모음집이라 금세 읽었다. 정신이 번쩍 뜨이게 하는 부분은 없었다. 그래도 요즘 젊은 친구들은 어떻게 직장생활을 하는지 간접경험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쉽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니, 이 책은 누구를 위한 책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공무원이 되고 싶은 지망생을 위한 정보와 현직 공무원들이 공감하는 경험담 사이에서 길을 잃어 어중간해졌다. 둘째는, 날 것의 인터뷰가 아니라 지은이가 나름대로 정리하다 보니, 간이 너무 세진 것이 아닌가 싶다. 글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오히려 읽기 어색해지는 부분이 많다. 대화는 생각보다 너무 짧고, 글쓴이가 덧댄 부분이 많다 보니 재료는 잘 우러나지 않았는데, 국물이 좀 짜다.


그래도 바쁜 일상 속에서도 책을 쓰는 열정, 나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그가 부럽기만 하다.


특히 업무로 고민할 때면 ‘서무(庶務)‘가 되지 말고 ‘주무(主務)‘가 돼라‘고 합니다. 서무는 제출된 자료를 합쳐서 상사가 볼 수 있게 정리하는 거예요. 주무는 작성할 자료의 방향을 정하기도 하고, 때론 필요한 자료를 받아서 자신이 직접 최종 마무리하죠. ‘서‘에서 ‘주‘로 한 글자 바꾼 것이지만 꼼꼼하게 주도하는 업무 태도는 엄청난 차이를 불러옵니다. - P120

"승진하고 부서장이 되면 좋겠다고, 그러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곘죠.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많은 부서장을 보며 성공했다고 인정하지 않잖아요.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P147

나는 공무원의 실력은 태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행정복지센터에서 가서 민원 신청을 한다고 해 보자. 대다수 공무원은 시민의 물음에 대답한다. 규정에 따라 서류도 발급해 준다. 그런데 시민들은 공무원이 불친절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잦다. 왜 그럴까? 바로 민원인을 대하는 공무원의 태도 때문이다. 뚱하거나 화난 표정, 무뚝뚝한 말투, 상대에 대한 배려 없는 행동이 찾아온 주민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 거다. - P181

이런 일을 담당하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난처한 상황에 놓인 거니까. 힘들겠지만 그냥 견디는 것 외에 특별한 방법이 없다. 혹여 공직 생활 중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업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감정적으로 빠져들면 더 힘들어진다. 엉킨 실타래를 한 번에 풀지 못해도, 그걸 자를 수 있는 가위가 내 손에 없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거다. - P187

미국 저널리스트 헨리 루이스 멩켄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의 생의 길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넓이와 깊이에 대해서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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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 타산지석S 시리즈
이순미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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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조선이라는 자조가 무색하게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꽤 높아진 듯하다. 세계적인 감염병 유행 속에서도 극단적인 통제 없이 헤쳐나가고 있는 모습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헬조선을 구성하던 문제들이 일거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높은 청년 실업률, 성긴 사회안전망, 떨어진 성장 동력 등의 사회 문제는 여전하다. 단점이 없어지고, 장점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새삼 우리 사회의 밝은 면을 발견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이상사회로 생각했던 나라들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도 알게 됐다. 어느 사회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게 마련이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최근 허둥대고 있는 것을 보면 지상낙원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재작년인가 싱가포르로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 읽을 요량으로 보관함에 담아뒀던 책인데, 이제야 읽게 된다. 코로나19로 여행을 떠나지 못해서인지 이런 책들을 통해서 떠나고 싶은 욕구를 대리만족하고 있다. 이왕이면 한 장소에 오래 살았던 사람의 경험담이 더 진국일 것이라는 기대로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여느 여행자의 에세이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 꽤 있다. 싱가포르의 춤 문화나 메이드의 희생으로 일궈낸 남녀평등이라는 소재는 여행책자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야기다. 싱가포르 여행지에 대한 소개는 없다시피 하지만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지은이는 싱가포르를 유리벽안에서 행복한 나라라고 정의한다. 기가 막힌 비유다. 누군가 유리벽 안에 있으면, 외부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게 되고, 행동도 제약을 받는다. 저자의 비유대로 싱가포르는 나의 자유의 일부를 국가에 반납하는 대신, 정부의 통제와 보호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진 자연농원이다. 시끄럽지 않은 세상, 각자 자기 위치에서 ()다이 신()다이 민()다이사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다소 숨 막힌 삶이다. 그 유리벽의 존재를 몰랐을 때야 괜찮지만, 유리벽의 답답함을 느꼈을 때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섬나라를 세계적인 도시국가로 만든 리콴유 수상과 싱가포르 사람들의 노력은 경탄할만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는데, 한 번 성공한 공식이 다시 통할 수 있을지. 다양한 경륜을 가진 정치가들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국부로 여겨지는 사람의 아들이 세습통치하는 구조가 과연 21세기에도 효과적일지.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이 하부구조를 떠받치는 데에 따른 위기나 변수는 없을지. 몇 가지 의문은 있지만, 현재의 성공신화 속에서 이러한 의문들은 힘을 잃을 때가 많다. 싱가포르가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지, 아니면 반면교사가 될지 계속 지켜봐야 할 것이다.


  ※ 밑줄긋기의 쪽 수는 e-book 화면에 표출된 것을 기재한 것으로, 단행본의 실제 쪽수와 다를 수 있습니다.


유리벽 안에만 있으면 싱가포르는 멋진 나라, 볼 만한 나라, 즐길 것이 많은 나라다. 유리벽 안에서는 세계 어느 곳보다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싱가포르에 한번 발을 디딘 서양인은 절대 싱가포르를 떠나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 P8

싱가포르 정부는 벌금, 조선시대에나 있었던 태형, 비밀경찰 따위의 몇 가지 협박을 교묘하게 내놓았다 감췄다 하면서도 외국인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신경 쓸 필요 없이 그냥 즐기라고 한다. 별일 아니다, 애써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먹으면 안 되는 사과 몇 알 외에는, 싱가포르 정부의 통제는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굳이 그 그늘에서 벗어날 이유를 못 느낀다. 저항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맥없이 묻힐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싱가포르는 인간이 만든 모조품 에덴일지도 모른다. - P11

리콴유 수상의 클린 앤 그린(Clean & Green) 정책이 ‘가든 시티’라는 명성과 ‘가든스 바이 더 베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준 반면, 벌금의 도시(Fines City)와 보모국가(nanny state)라는 오명도 줬다. - P79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초에 가능성과 희망이 잘리는 무력감과 더위까지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최악의 상황을 제공한다. 내가 만났던 느리고 게으른 상점의 점원이나 일꾼들은 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무력함에 길들여져서 게을러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수한 인력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젊은 나이에 10년 후에도 현재 만들어진 내 모습으로 쭉 나아갈 수 있다는 안일함. 싱가포리안이 그처럼 밋밋한 것은 교육적인 환경 때문이 아닌가 싶다. - P114

사람에겐 죽는 날까지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싱가포르에서는 너무 빨리 인생이 결정된다. - P115

두리안이 그 고약한 냄새를 잃는다면, 과일의 왕좌를 내놓고 그저 단맛 나는 열대 과일쯤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가끔은 내 부족한 점들이 오히려 나를 더 매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기분 좋은 생각을 해도 될 것 같다. - P178

손에 묻은 두리안 냄새를 말끔히 없애는 방법은 두리안 안에 있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자기 안에 있듯이 그 골칫거리인 두리안의 냄새를 제거하는 방법은 두리안 껍질 속에 든 물로 씻는 것이다. 껍질 속에 있는 성분이 두리안의 냄새를 감쪽같이 제거해준다. - P178

고작 국경일 행사나 왈츠가 그들의 오락거리였으니, 싱가포르에서의 삶이 밍밍하다고 하소연하는 싱가포리안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밍밍하게 살 능력이 없으면, 싱가포르로 이민 갈 생각을 말아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 P206

찰나의 마주침이었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에 잔영을 남기는 사람이나 장소, 음악이 있다. 잔잔한 듯, 별 힘이 없는 듯하면서도 마음속에 오래 파동을 남기는 그런 부류들, 은근히 사람 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알 수 없는 위력을 가진 그 존재 앞에서는 거부 의사를 표하기가 쉽지 않다.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석양이 아름다운 것 외에는 조건이 맞지 않는 콘도였는데, 부부가 나란히 뭐에 홀린 듯 저항하지도 못하고 월세 계약을 했다. 흠이 한두 가지뿐인 아파트들을 다 제쳐두고, 존재하지도 않는 석양이 감동적인 것 빼고는 좋은 점이 거의 없는 집을 고르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 P290

싱가포르의 더위는 한마디로 말해 매력 없는 더위, 재미없는 더위다. 에어컨, 빌딩, 아스팔트…그런 도회적인 환경에서 나오는 지루한 더위다. - P293

그들의 기다림과 여유, 느림은 더운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습득되는 삶의 형태였다. 자연에서 얻어지는 본능이었다. 자연이 제공해주는 느릿함이었다. 사람이 자연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 땅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적당히 느리고 게으름을 부릴 줄 알아야 했다. 갓 발령을 받고 온 신참내기 한국 주재원들은 더운 싱가포르에 와서 한국에서처럼 파닥거리다가 한 차례씩 큰 열병을 앓고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천천히, 천천히…." - P304

많이 변해버린 고향에 와서 보니, 나도 모르게 싱가포르의 통제 속의 자유를 용납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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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
서양수 지음 / 홍익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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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무 출장 때 런던과 리스본에 들렸었는데, 런던보다는 리스본에서 보냈던 시간이 더 정겹게 남아있다. 살짝 낡고 촌스러운 듯한 도시였지만, 무엇인가 끌리는 데가 있었다. 아직도 리스본 하면, 보랏빛 자카란다꽃이 만발하고, 모자이크 타일이 오밀조밀하게 깔린 거리와 트램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느 광장이 책을 읽다보니 호시우(로시우) 광장인 듯하다의 오래된 가게에서 맛봤던 진자 한 잔의 알딸딸함도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미 5년도 더 된 일들인데, 이 책을 읽다 보니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가족여행이라도 여행 중에 다툼과 위기가 있기 마련인데, 일행들의 개성이 다 다른데도 평화롭게 일정을 마무리한 저자의 융화력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글은 다소 가볍게 느껴지지만, 때때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어 나쁘지 않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이보다 더 좋은 글재주를 가지고 있다거나 더 많은 에피소드를 겪었더라도 이만한 여행기로 묶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여행 중의 일들을 목차를 갖춘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다만, 민망함과 어색함, 즐거움, 기쁨 등의 감정들이 글에 녹아나는 것이 아니라 크크’, ‘크하하’, ‘하하하라는 웃음소리 그대로 그냥 버려져 있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물론, 꿰지 못한 추억들과 생각들이 방 한가득인 게으름뱅이가 할 이야기는 아니다.


  책장을 다 덮고 나니 불현듯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코로나19만 아니라면! , 회사만 아니라면! 아니, 매달 적자의 재정상태만 아니라면. , 도대체 언제쯤 떠날 수 있을까? 꿰지 못한 바람과 소망들도 어느새 서 말이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中) - P85

욕심을 앞세우며 계획을 세우다 보면 꼭 가야 할 곳들이 생긴다. 그 장소를 연결하면 선이 되고 그게 바로 여행 루트가 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처음 찍은 점들만이 여행이 아니라 점을 연결한 선들도 모두 여행이다. 나는 이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처음 찍었던 점만 찾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볼거리가 많은 도시에선 그 진리를 알아도 해결이 쉽지 않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진짜 유명한 장소인데, 바로 눈앞에 예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조금 더 가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다른 곳을 열망하며 무리하게 공간을 이어간다. 그러다 보면 여행은 그야말로 ‘이동’이 돼 버리고 만다. 과정은 생략되고 점만 남아 안 그래도 짧은 여행이 더 짧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 P93

생각해 보면 이 짧은 하루 동안 참 별일이 다 있었다. 만원 트램에서 소매치기와 고래고래 싸우지를 않았나, 그러다 한국 여배우를 만나 리스본의 거리를 함께 거닐고 있다. 사실 소매치기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도 없었던 인연이었다. 왜 이렇게 운이 나빴나 생각한 날도, 예상치 못한 행운에 감탄한 날로 바뀔 수 있는 게 삶 아닌가 싶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 P137

우리는 이국적인 마을에 취해 한량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아이가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부담스러워 중국집에서 뭘 먹었는지도 모르게 후다닥 먹고 나와 버렸다. "아니, 꼭 아시아인들은 어딜 가나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니까. 숨 막힌다." - P213

우리가 믿고 있는 상식의 탑과 직관의 성이 때로는 얼마나 헐겁게 연결돼 있는지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견고한 세상이 실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우린 또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선입견과 편견의 울타리를 쌓으며 내가 만든 세상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말이다.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그 단순한 진리 하나를 배우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의 당연한 모습을 해체시키는 경험이야말로 여행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테니 말이다. - P225

포르투에 익숙해지며, 우린 진화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조금씩 익숙해진다면 이제 여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날 때부터 익숙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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