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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며칠 전 한 일간신문은 이 책이 발간 일주일 만에 대부분의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 10위권에 든 사실을 놀라워하며, 그 원인을 중장년 남성들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이순신의 내면을 빌려 전하는, 아비가 되고자 하는 자는 치욕에 몸을 담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는 비장한 메시지가 허를 찔러서? 누구보다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586의 정치 감각을 김훈이 대변하기 때문에? 그도 아니라면, 고정팬이라서?’
_ 신준봉 기자, 2019년 4월 6일 중앙일보 ‘소득주도·창조경제…현실개선 없는 슬로건 무의미’
다른 말이야 다 그렇다고 쳐도 진보적인 정치감각을 김훈이 대변한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견의 효과나 전망을 분석하지 않고 ‘친○’이니 ‘반○’이니 하며 누구와 친하고 머냐는 것을 기준으로 편을 가르는 그네들의 프레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해서 알러지처럼 반응하는 김훈에게 과연 그런 수사가 맞는지 의문이다. 물론, 그가 진보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회의가 들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김훈은 한국전쟁의 상흔과 이념으로 인한 갈등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세월호로 가족을 잃은 이들에 대한 슬픔과 위로를 담고 있지만, 그 어디서 진보적인 색채를 찾아낼 수 있는 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저자 스스로 촛불집회에 나가지도 않았거니와 태극기집회도 멀끄러미 바라만 봤다고 고백하는데 말이다. 물론, 광장이 뿜어내는 역사의 동력에 대해 긍정하긴 했지만 그것이 진보적인 정치감각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인지 외려 묻고 싶다. 그네들의 신문사 지하 3층 정도에 세상 만물을 진보와 보수로 재단할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상상해본다. 그 정도는 되야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것 아닐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이 책은 정치적인 논술이 아니다. 주제가 없다. 대부분 일상적인 소재다. 저자 자신도 ‘일상적인 얘기를 중심으로 삼겠다는 기획의도’가 있다고 한다. (예의 기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소재의 일면을 보면 똥, 호수공원, 오이지, 수다 등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상적인 소재도 현학적으로 만드는 특이한 재주가 있다. 마치 의사 같이 실체를 하나하나 해부하고, 근원에 닿을 때까지 해체한 후 분석해서 다시 이어 붙이는 느낌이다. 글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탐구에 대한 열정, 지식욕으로만 충만해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구체적인 데이터와 숫자들에 대한 집착은 일상적인 소재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오이지를 담그는 법에 대한 글을 읽을 때면 정말, 변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김훈은 이순신에 대해서 여러 쪽에 걸쳐 이야기했는데, 특히 ‘사실’을 ‘사실’로 수용하는 태도가 이순신의 본령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런 모습은 김훈이 지향하는 삶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다소 차갑고 비정해보이기까지 한다.
이순신이 남긴 기록에 의지해서 그의 지도력이 작동하는 모습을 헤아리건대, 그는 우선 이 모든 악조건과 그의 정치적 불운을 모두 ‘사실’로 긍정하고 있다. ‘사실’에 정서를 이입시키지 않고 ‘사실’을 오직 ‘사실’로서 수용하는 태도는 그의 리더십에 한 중요한 본질을 이루는 듯하다. _ 117쪽
그의 글의 또 특징적인 부분은 생명과 힘, 근육, 원초적인 생동, 근원적인 것에 대한 동경인데 ‘눈을 치우며’, ‘고래를 기다리며’와 같은 꼭지에서 도드라진다. 남성성에 대한 동경으로 읽혀질 여지도 있는데, 이는 인간으로서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 없다는‘사실’에 대한 김훈스러운 인정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밥벌이의 어려움에 대한 연민, 아버지와 남자로서의 삶에 대한 회한과 동정심, 쓸쓸함 이런 감정들도 강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중장년 남성들이 이 책을 주목하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감정선에 공감해서일지도 모른다.
주먹도끼의 손잡이에는 그 도끼로 사냥을 해서 처자식을 벌어먹이던 사내의 손바닥 체온이 남아 있다. 그는 이 손바닥으로 짐승을 때려잡고 아내를 애무했을 터이다. 주먹도끼의 손잡이는 사람의 손아귀에 닳아져서 반들반들하다. 나는 석장리박물관의 주먹도끼를 들여다보면서, 짐승의 머리를 치다가 일격이 빗나가서 짐승에게 먹힌 사내들, 하루종일 허탕치고서 배고픈 처자식들에게 빈손으로 돌아오는 사내들, 비가 오고 또 눈이 와서 나가지 못하고 움막집 안에 웅크리고 앉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내들을 생각했다. _ 312쪽
이 꼰대 같은 김훈이 구구절절 이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정말 재수 없을 텐데, 그의 실수와 가끔씩 터져나오는 농담에서 인간미가 발휘된다. 그냥 쉽게 하면 될터인데 남의 결혼식에 주례서러 가서는 쓰잘데기 없는 소리를 하고, 젊은이들의 키스에 헤벌쭉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씩하니 웃으며 바라보는 모습에서 김훈은 비로소 괴물을 벗어나 사람이 된다. 그의 글들은 엄한 아버지가 술을 잔뜩 드시고 와서 늘어놓는 잔소리 같지만, 그가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비로소 들을 가치를 가진다. 세상에 꼰대들은 넘쳐 난다. 저마다 논리를 세워 기득권을 방어한다. 하지만 김훈의 잔소리는 건강하다. 그는 평화롭고 뜨거운 공동체를 열망할 뿐이다. ‘꼰대’지만 ‘꼰대짓’을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김훈처럼 쓰지 마라고 했다. 공감한다. 김훈처럼 쓰려고 작정하면 그 출발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사실에 집착하는 수집광이어야 하고, 누가 보던 말던 쓰고 싶은대로 쓴다. 비유도 여기저기로 이격하여 종잡을 수 없다. 이 책의 첫 페이지만 봐도 알 수 있다. 특이하게도 ‘서문’이 아니라 ‘알림’이다. ‘주인백’으로 끝나는 이웃집 경고문 같다. 역시 김훈이다. 김훈은 김훈이기 때문에 김훈이다. 나는 김훈을 따라할 수 없다. 나는 심지어 그처럼 연필로 쓸 수도 없다. 컴퓨터로 쓰지 않으면 글을 쓰기가 어렵다. 손글씨로 쓰다보면 글자가 점점 삐뚤빼뚤해지고, 그런 글씨가 미워서 생각이 멈춘다. 그저 나는 나대로 쓸 뿐이다. 그래도 마무리는 김훈의 말을 빌리자.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나의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에 당당하려 한다. 나의 이야기가 헐겁고 어수선해도 무방하다. _ 5쪽
나는 여론을 일으키거나 거기에 붙어서 펴을 끌어모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나의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에 당당하려 한다. 나의 이야기가 헐겁고 어수선해도 무방하다.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이 책의 출간으로, 나의 적막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전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 P5
결혼의 추동력은 사랑이지만, 사랑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밥을 벌어야 먹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영위는 물적 토대(material basic) 위에서만 가능하다. 물적 토대 없이도 지고지순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말도 있다는데, 그런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구태여 결혼할 필요 없다. 재물을 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쓰라. 재물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다. 현세적 가치를 함부로 폄하하지 말라. 결혼은 사랑을 생활로 바꾸는 사업이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결혼은 부부가 스스로 확보한 물적 토대 위에 생활을 건설하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다. 결혼은 놀이가 아니다. - P82
결혼이란 오래 같이 살아서 생애를 이루는 것인데, 힘들 때도 꾸역꾸역 살아내려면 사랑보다도 연민이 더 소중한 동력이 된다. 불같은 사랑, 마그마 같은 열정은 오래 못 간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대개 이기심이 섞이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은 그 안에 지겨움이 들어 있어서 쉽게 물린다. 연민은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연민에는 이기심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이 식은 자리를 연민으로 메우면, 긴 앞날을 살아갈 수 있다. 오래 연애하다가 결혼한 부부가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연애를 오래했으면 서로 성격을 잘 알터인데,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은, 이른바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이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말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면서 살아라. - P83
사회 공공성의 문제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재수없는 소수(the unlucky few)로 몰아서 고립시키는 공작은 ‘안보와 경제’가 문제를 회피하는 오래된 방식인데, 세월호 참사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도 어쩌다가 재수 좋아서 안 죽고 남아 있는 꼴이 되었고, 삶은 견딜 수 없이 무의미한 우연의 장난으로 느껴졌다. 쓰러진 세월호는 한국 현대사의 괴로운 자화상이다. 그 녹슨 고철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이 괴물은 고통스러운 질문과 회한을 한꺼번에 들이대고 있다. - P96
이순신이 남긴 기록에 의지해서 그의 지도력이 작동하는 모습을 헤아리건대, 그는 우선 이 모든 악조건과 그의 정치적 불운을 모두 ‘사실’로 긍정하고 있다. ‘사실’에 정서를 이입시키지 않고 ‘사실’을 오직 ‘사실’로서 수용하는 태도는 그의 리더십에 한 중요한 본질을 이루는 듯하다. - P117
이순신은 사실을 기록했을 뿐 첨삭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가 받아들이고 긍정했던 ‘사실’들은 압도적으로 열세인 군사력, 물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부하들의 이탈과 명령 불복종, 전쟁을 지원해야 할 행정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짓밟혀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불운과 같은 시련과 역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자된 자질은 이 절망적인 역경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서 그의 리더십에 가장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대목은 이 전환의 국면 속에서 작동되었다. 후인이 전환의 내면을 말하는 일은 두렵다. - P123
민주적이고도 참여적이고 온정적이고 여론 수렴적인 리더십이 현대사회의 만인이 요구하는 리더십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민주적 성격만으로 리더십의 내용이 모두 충족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하여 이순신의 생애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리더십이란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싫어하고 회피하려는 방향과 목표를 향해 다중을 거슬러가면서 그 다중을 다시 몰고 나갈 수 있는 덕성까지를 포함해야 온전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 같은 리더의 자질은 국가 존망의 관건이다. - P138
이 ‘애국’은 스포츠가 아니고 이념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애국’의 비장한 정조는 정치권력의 압제와 비리를 정당화하는 당파성으로 변질되면서 후세로 전승되었다. 권력은 애국의 깃발 밑으로 결집되면서 억압을 형성했고 그 대척점에서 또다른 저항적 당파성이 형성되면서 태극기의 보편성은 훼손되어갔다. ‘애국’을 생업으로 하는 세력이 등장해서 일상의 자유를 억압해가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고귀함을 역설했다. - P229
그는 연평도 포격이 시작되자 지체 없이 대한민국 정부가 준 상장을 불질렀다. 나는 그의 이 정확한 생존술을 긍정한다. 이 민첩한 생존술은 그가 한국 현대사 속에서 겪어낸 모든 광기와 야만성,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작동되는 생물적 조건반사였다. 이 조건반사는 이념이 아니고 당파성이 아니다. 애국이 아니고 매국이 아니고 혁명이 아니고 반동이 아니다. 이것은 충성이 아니고 배신이 아니다. 총칼을 들이대면서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이념의 폭력 앞에서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훈장을 태워버리는 행위는 정직한 삶의 길이다. - P289
주먹도끼의 손잡이에는 그 도끼로 사냥을 해서 처자식을 벌어먹이던 사내의 손바닥 체온이 남아 있다. 그는 이 손바닥으로 짐승을 때려잡고 아내를 애무했을 터이다. 주먹도끼의 손잡이는 사람의 손아귀에 닳아져서 반들반들하다. 나는 석장리박물관의 주먹도끼를 들여다보면서, 짐승의 머리를 치다가 일격이 빗나가서 짐승에게 먹힌 사내들, 하루종일 허탕치고서 배고픈 처자식들에게 빈손으로 돌아오는 사내들, 비가 오고 또 눈이 와서 나가지 못하고 움막집 안에 웅크리고 앉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내들을 생각했다. - P312
자연으로서의 시간은 다만 전개될 뿐, 그 전개의 방향에 도덕적 목표가 없고 진화의 충동이 없다. 그 진행의 궁극에 관하여 인간은 영원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생명은 그 자비 없는 시간에 쓸리면서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저 자신을 전환시키는데, 저 자신을 전환시키지 못하는 것들은 모조리 멸종해서 그 생명을 미래에 전할 수 없다. 이 전환이 건너뛰기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고, 수백만 년의 시간 속에서 수많은 멸종들의 무덤을 딛고 서서히 이루어진다. - P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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