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서쪽 끝, 포르투갈
서양수 지음 / 홍익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업무 출장 때 런던과 리스본에 들렸었는데, 런던보다는 리스본에서 보냈던 시간이 더 정겹게 남아있다. 살짝 낡고 촌스러운 듯한 도시였지만, 무엇인가 끌리는 데가 있었다. 아직도 리스본 하면, 보랏빛 자카란다꽃이 만발하고, 모자이크 타일이 오밀조밀하게 깔린 거리와 트램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느 광장이 책을 읽다보니 호시우(로시우) 광장인 듯하다의 오래된 가게에서 맛봤던 진자 한 잔의 알딸딸함도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미 5년도 더 된 일들인데, 이 책을 읽다 보니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가족여행이라도 여행 중에 다툼과 위기가 있기 마련인데, 일행들의 개성이 다 다른데도 평화롭게 일정을 마무리한 저자의 융화력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글은 다소 가볍게 느껴지지만, 때때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어 나쁘지 않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이보다 더 좋은 글재주를 가지고 있다거나 더 많은 에피소드를 겪었더라도 이만한 여행기로 묶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여행 중의 일들을 목차를 갖춘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다만, 민망함과 어색함, 즐거움, 기쁨 등의 감정들이 글에 녹아나는 것이 아니라 크크’, ‘크하하’, ‘하하하라는 웃음소리 그대로 그냥 버려져 있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물론, 꿰지 못한 추억들과 생각들이 방 한가득인 게으름뱅이가 할 이야기는 아니다.


  책장을 다 덮고 나니 불현듯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코로나19만 아니라면! , 회사만 아니라면! 아니, 매달 적자의 재정상태만 아니라면. , 도대체 언제쯤 떠날 수 있을까? 꿰지 못한 바람과 소망들도 어느새 서 말이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中) - P85

욕심을 앞세우며 계획을 세우다 보면 꼭 가야 할 곳들이 생긴다. 그 장소를 연결하면 선이 되고 그게 바로 여행 루트가 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처음 찍은 점들만이 여행이 아니라 점을 연결한 선들도 모두 여행이다. 나는 이 단순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처음 찍었던 점만 찾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볼거리가 많은 도시에선 그 진리를 알아도 해결이 쉽지 않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진짜 유명한 장소인데, 바로 눈앞에 예전부터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조금 더 가면.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다른 곳을 열망하며 무리하게 공간을 이어간다. 그러다 보면 여행은 그야말로 ‘이동’이 돼 버리고 만다. 과정은 생략되고 점만 남아 안 그래도 짧은 여행이 더 짧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 P93

생각해 보면 이 짧은 하루 동안 참 별일이 다 있었다. 만원 트램에서 소매치기와 고래고래 싸우지를 않았나, 그러다 한국 여배우를 만나 리스본의 거리를 함께 거닐고 있다. 사실 소매치기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도 없었던 인연이었다. 왜 이렇게 운이 나빴나 생각한 날도, 예상치 못한 행운에 감탄한 날로 바뀔 수 있는 게 삶 아닌가 싶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 P137

우리는 이국적인 마을에 취해 한량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아이가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부담스러워 중국집에서 뭘 먹었는지도 모르게 후다닥 먹고 나와 버렸다. "아니, 꼭 아시아인들은 어딜 가나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니까. 숨 막힌다." - P213

우리가 믿고 있는 상식의 탑과 직관의 성이 때로는 얼마나 헐겁게 연결돼 있는지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견고한 세상이 실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우린 또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선입견과 편견의 울타리를 쌓으며 내가 만든 세상이 옳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말이다. 세상에 당연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그 단순한 진리 하나를 배우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의 당연한 모습을 해체시키는 경험이야말로 여행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테니 말이다. - P225

포르투에 익숙해지며, 우린 진화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조금씩 익숙해진다면 이제 여행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날 때부터 익숙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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