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 타산지석S 시리즈
이순미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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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조선이라는 자조가 무색하게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꽤 높아진 듯하다. 세계적인 감염병 유행 속에서도 극단적인 통제 없이 헤쳐나가고 있는 모습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헬조선을 구성하던 문제들이 일거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높은 청년 실업률, 성긴 사회안전망, 떨어진 성장 동력 등의 사회 문제는 여전하다. 단점이 없어지고, 장점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새삼 우리 사회의 밝은 면을 발견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이상사회로 생각했던 나라들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도 알게 됐다. 어느 사회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게 마련이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도 최근 허둥대고 있는 것을 보면 지상낙원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재작년인가 싱가포르로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 읽을 요량으로 보관함에 담아뒀던 책인데, 이제야 읽게 된다. 코로나19로 여행을 떠나지 못해서인지 이런 책들을 통해서 떠나고 싶은 욕구를 대리만족하고 있다. 이왕이면 한 장소에 오래 살았던 사람의 경험담이 더 진국일 것이라는 기대로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여느 여행자의 에세이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 꽤 있다. 싱가포르의 춤 문화나 메이드의 희생으로 일궈낸 남녀평등이라는 소재는 여행책자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야기다. 싱가포르 여행지에 대한 소개는 없다시피 하지만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지은이는 싱가포르를 유리벽안에서 행복한 나라라고 정의한다. 기가 막힌 비유다. 누군가 유리벽 안에 있으면, 외부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게 되고, 행동도 제약을 받는다. 저자의 비유대로 싱가포르는 나의 자유의 일부를 국가에 반납하는 대신, 정부의 통제와 보호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진 자연농원이다. 시끄럽지 않은 세상, 각자 자기 위치에서 ()다이 신()다이 민()다이사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다소 숨 막힌 삶이다. 그 유리벽의 존재를 몰랐을 때야 괜찮지만, 유리벽의 답답함을 느꼈을 때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작은 섬나라를 세계적인 도시국가로 만든 리콴유 수상과 싱가포르 사람들의 노력은 경탄할만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는데, 한 번 성공한 공식이 다시 통할 수 있을지. 다양한 경륜을 가진 정치가들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국부로 여겨지는 사람의 아들이 세습통치하는 구조가 과연 21세기에도 효과적일지.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이 하부구조를 떠받치는 데에 따른 위기나 변수는 없을지. 몇 가지 의문은 있지만, 현재의 성공신화 속에서 이러한 의문들은 힘을 잃을 때가 많다. 싱가포르가 우리 사회의 귀감이 될지, 아니면 반면교사가 될지 계속 지켜봐야 할 것이다.


  ※ 밑줄긋기의 쪽 수는 e-book 화면에 표출된 것을 기재한 것으로, 단행본의 실제 쪽수와 다를 수 있습니다.


유리벽 안에만 있으면 싱가포르는 멋진 나라, 볼 만한 나라, 즐길 것이 많은 나라다. 유리벽 안에서는 세계 어느 곳보다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싱가포르에 한번 발을 디딘 서양인은 절대 싱가포르를 떠나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 P8

싱가포르 정부는 벌금, 조선시대에나 있었던 태형, 비밀경찰 따위의 몇 가지 협박을 교묘하게 내놓았다 감췄다 하면서도 외국인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신경 쓸 필요 없이 그냥 즐기라고 한다. 별일 아니다, 애써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먹으면 안 되는 사과 몇 알 외에는, 싱가포르 정부의 통제는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굳이 그 그늘에서 벗어날 이유를 못 느낀다. 저항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맥없이 묻힐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싱가포르는 인간이 만든 모조품 에덴일지도 모른다. - P11

리콴유 수상의 클린 앤 그린(Clean & Green) 정책이 ‘가든 시티’라는 명성과 ‘가든스 바이 더 베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준 반면, 벌금의 도시(Fines City)와 보모국가(nanny state)라는 오명도 줬다. - P79

그러나 한편으로는 애초에 가능성과 희망이 잘리는 무력감과 더위까지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최악의 상황을 제공한다. 내가 만났던 느리고 게으른 상점의 점원이나 일꾼들은 더위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려서부터 무력함에 길들여져서 게을러진 것일지도 모른다. 우수한 인력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젊은 나이에 10년 후에도 현재 만들어진 내 모습으로 쭉 나아갈 수 있다는 안일함. 싱가포리안이 그처럼 밋밋한 것은 교육적인 환경 때문이 아닌가 싶다. - P114

사람에겐 죽는 날까지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싱가포르에서는 너무 빨리 인생이 결정된다. - P115

두리안이 그 고약한 냄새를 잃는다면, 과일의 왕좌를 내놓고 그저 단맛 나는 열대 과일쯤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가끔은 내 부족한 점들이 오히려 나를 더 매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기분 좋은 생각을 해도 될 것 같다. - P178

손에 묻은 두리안 냄새를 말끔히 없애는 방법은 두리안 안에 있다.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 자기 안에 있듯이 그 골칫거리인 두리안의 냄새를 제거하는 방법은 두리안 껍질 속에 든 물로 씻는 것이다. 껍질 속에 있는 성분이 두리안의 냄새를 감쪽같이 제거해준다. - P178

고작 국경일 행사나 왈츠가 그들의 오락거리였으니, 싱가포르에서의 삶이 밍밍하다고 하소연하는 싱가포리안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된다. 밍밍하게 살 능력이 없으면, 싱가포르로 이민 갈 생각을 말아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 P206

찰나의 마주침이었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에 잔영을 남기는 사람이나 장소, 음악이 있다. 잔잔한 듯, 별 힘이 없는 듯하면서도 마음속에 오래 파동을 남기는 그런 부류들, 은근히 사람 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도무지 떨쳐낼 수 없는 알 수 없는 위력을 가진 그 존재 앞에서는 거부 의사를 표하기가 쉽지 않다.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석양이 아름다운 것 외에는 조건이 맞지 않는 콘도였는데, 부부가 나란히 뭐에 홀린 듯 저항하지도 못하고 월세 계약을 했다. 흠이 한두 가지뿐인 아파트들을 다 제쳐두고, 존재하지도 않는 석양이 감동적인 것 빼고는 좋은 점이 거의 없는 집을 고르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 P290

싱가포르의 더위는 한마디로 말해 매력 없는 더위, 재미없는 더위다. 에어컨, 빌딩, 아스팔트…그런 도회적인 환경에서 나오는 지루한 더위다. - P293

그들의 기다림과 여유, 느림은 더운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습득되는 삶의 형태였다. 자연에서 얻어지는 본능이었다. 자연이 제공해주는 느릿함이었다. 사람이 자연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 땅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적당히 느리고 게으름을 부릴 줄 알아야 했다. 갓 발령을 받고 온 신참내기 한국 주재원들은 더운 싱가포르에 와서 한국에서처럼 파닥거리다가 한 차례씩 큰 열병을 앓고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천천히, 천천히…." - P304

많이 변해버린 고향에 와서 보니, 나도 모르게 싱가포르의 통제 속의 자유를 용납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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