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 개정판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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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상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인 줄 알면서도 취하면 내가 꼭 하는 이야기가 이 책의 마지막에 실려있다. 반갑게도 이 책이 재출간되었으니 다시 이야기를 하려면 나는 마지막 페이지부터 시작해야 맞겠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딸과 빵집에 간다. 갓 구운 바게트의 고소한 꽁다리를 먹고 싶다고 딸이 말한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식사할 때 주겠다고 한다. 모든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있을 때 아버지는 잊지 않고 제일 먼저 딸에게 바게트를 건넨다. 딸은 거절한다. 아버지가 아까는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냐고 한다. 딸이 대답한다. 


"아까는 먹고 싶었어요."


클로에의 남편 아드리앵은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아이들과 부인을 남기고 떠난다. '배를 묶는 밧줄이 풀린' 신세가 된 클로에는 무엇을 해야할 지조차 알지 못한다. 평소 두 마디도 잘 하지 않던 시아버지 피에르는 두 손녀와 며느리를 데리고 시골집으로 간다. 시아버지는 괴로워하는 며느리에게 한편으로 미안해 하면서도 아들을 두둔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불쌍하다니.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시아버지는 '떠나는 사람의 괴로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느냐고 되묻는다. 클로에는 그런 시아버지의 말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다. 행복해서 다른 여자와 떠난 남자의 삶까지 그녀가 걱정해야 하는 이유가 어딨는가. 그 때 시아버지가 깜짝 놀랄 말을 한다.


나 말이다. 한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어.. 네 시어머니가 아니라, 다른 여자를 말이야.(p.100)

그는 마틸드라는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피에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혼은 사랑의 그래프에서 최고값을 가지는 이와 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사실 결혼은 그래프의 특정한 구간에서 가장 높은값을 가지는 이와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그래프 전체로 보면 최고값은 다른 시기에 나타날 수 있다. 피에르는 마틸드를 알고 나서 이제까지의 사랑을 압도하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는 사랑에 미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무엇도 버릴 용기가 없었다. 마틸드를 사랑하는 것과 그의 가족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였지만 별개의 일처럼 생각했다. 그는 무엇도 스스로의 힘으로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가끔 비행기를 타면 떨어지기를 기대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건을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클로에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혼란스러워진다. 어떻게 저렇게 비겁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아드리앵은? 권투 영화가 한 편 있다고 치자. 주인공은 한 명이다. 그는 좌절했고 그만큼 노력했으며 강력한 상대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오롯이 그를 응원할 수 있다. 반대로 처절한 두 명의 주인공이 각기 다른 고통을 이기고 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이 결승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누굴 응원해야 할까. 독자는 처음 클로에를 보았을 때는 당연히 그녀의 아픔을 공감하지만, 뒤에 피에르의 비겁한 모습을 보면서 그를 비난한다. 피에르를 비난하는 것과 클로에를 동정하는 것은 병립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작가는 물음을 던진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어떤 것이 진짜 행복한 삶인지 말이다. 한쪽의 삶은 규칙과 신의로 쌓아진 단단한 성이고, 한쪽의 삶은 충동과 욕망이 빚어낸 신기루처럼 보인다. 하지만, 답이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생각할 것도 없다고 섣불리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읽다 보면 과연 어떤 것이 답일까에 대해서는 끝없이 되묻게 된다. 어쩌면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모두 정답일 수도 모두 오답일 수도 있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용기. 우리 인생에서 적어도 한 번은 그런 용기를 내야 돼. 오로지 자기 혼자서 자기 자신과 맞서야 할 때가 있는거라고. '잘못을 저지를 권리', 말은 간단하지. 하지만 누가 우리에게 그걸 주겠어? 아무도 없어. 있다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야.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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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무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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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주의라는 것이 '미'를 최고의 가치로 하는 것은 알겠으나 그래서 그게 어떤 것이냐고 하면 선뜻 답하기가 애매하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모든 예술의 공통분모가 아닌가. 그렇다면 탐미주의는 단순히 공통으로 삼는 정도를 벗어나, 극으로 치닫는 궁극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까.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치면 바로 따라오는 것이 '탐미주의'이다. 소설이 다른 목적에 눈 돌리지 않고 오직 '미'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탐미주의야말로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근본 욕망이므로 진짜 인간을 위한 예술이라고 불러도 될까. 작품에 작가의 신념이나 사회적 인식은 전혀 배제하고 오직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마뜩지 않지만 매력적이다.  


주인공 소노코가 선생님(작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형식의 소설이다. 그녀는 따분한 생활에 활력을 주고자 여자기예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기로 한다. 하루는 모델을 세우고 관음보살을 그리는데 교장이 와서 아무래도 소노코 씨의 그림은 모델을 그리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별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평소 흠모하던 옆반의 미쓰코를 떠올리던 소노코는 한번 더 그 소리를 교장에게 듣자 기분이 확 상해서 교장에게 따진다. 학교 내에서는 소노코와 미쓰코의 동성애를 의심하는 소문들이 있었고,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실제로 친해진다. 둘의 관계는 처음에 괜찮다고 하던 남편의 의심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러, 어느 날 미쓰코가 오사카의 어느 집에서 옷을 도둑맞았다며 옷을 가져다 달라고 전화를 한다. 오직 자신만을 향해 있을 것이라 믿었던 미쓰코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소노코는 미쓰코와 연락을 끊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이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미쓰코를 향한 사랑을 눈을 뜨고, 또 하나의 인물 미쓰코의 남자친구 와타누키가 등장한다. 소설은 이 둘의 미쓰코를 향한 사랑과 욕망을 중심으로 각각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계속 뒤바뀌면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가서는 소노코의 남편까지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이 세계문학으로 고전 형식으로 출판되었고, 탐미주의니 유미주의니 하는 이미지를 업고 있어서 소설이 꽤 추상적이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특히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덤불 숲(라쇼몽)'의 구성처럼 등장인물이 말을 할 때마다 관점이 바뀌고 스토리가 달라지는 점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한다. 첫 번째 화자가 이야기 할 때 이야기를 독자가 믿고 있으면, 두 번째 화자가 나타나 사실 그 사건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앞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이야기들이 모두 하나의 완벽한 '미'의 존재, 미쓰코를 중심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객관적일 수 없는 때는 감정에 휘둘릴 때이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 중에서도 사랑에 빠졌을 때 거의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미쓰코의 말을 완전히 믿어야 하는 지 마는지도 모르는 채 흔들리는 소노코를 중심으로, 미쓰코의 남자친구이면서 성불구자인 와타누키, 미쓰코의 남편까지. 등장인물들은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미', 미쓰코를 향한 욕망을 가지고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그들이 하나의 욕망을 좇는 동안 끝없는 의심과 경쟁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스스로 인간의 바닥을 드러낸다. 우리가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것을 소유하려 한다면 인간은 한편으론 그만큼 성장하면서도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고 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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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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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실린 사례 중 크리스티너라는 27세 여자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특이하다.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자기 몸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팔이 머리 밑에 있고, 다리가 하반신에 붙어 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너무 당연해서 '인식'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크리스티너는 그런 인식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발과 땅을 보고 있어야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주변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끝없이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인식하는 몸에 대한 감각을 보완하기 위해 그녀는 끝없이 청각과 시각을 이용해야만 했다. 어떤 것의 정도를 알 수가 없을 때 우리에게는 '기준'이 필요하다. 


기준이 매번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 후루쿠라의 경우는 신체적인 무감각이 아니라 정신적인 무감각이 문제였다.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초등학교 때 이미 사람을 삽으로 내리쳐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죽은 새는 구워 먹는 것이 아니라 묻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루쿠라는 그것을 선천적으로 구별할 수 없었다. 후루쿠라는 학창 시절을 겪으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함께 자기 생각을 그대로 밝히는 것은 항상 좋지 않은 반응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리스티너의 경우처럼 '당연하게' 할 수 없다면 방법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동생이 알려준 대로 '아프다'고 하거나 다른 이유로 적절히 자신이 결코 비정상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편의점을 만나서 첫눈에 사랑에 빠진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전까지 나에게 "이것이 평범한 표정이고 목소리는 이런 식으로 내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천장과 침대가 그 자리에 있고 몸이 거기 있으므로 크리스티나에게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 지 가르쳐줄 생각을 못하는 것처럼, 상대가 앞에 있고 내 생각대로 표정을 짓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므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후루쿠라가 편의점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첫 번째 이유가 '매뉴얼' 때문이었다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균질해지고, 정형화 되었으며,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편의점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편의점 인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18년을 일했다. 서른 여섯이지만 다른 어떤 직장에도 나갈 자신이 없었다. 오직 편의점과 사랑에 빠져 그만 보고 살았는데 다른 만남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겨우 일차 관문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서 '티'나지 않게 서 있을 수 있게는 되었지만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사람들은 틈만 보이면 정규직 일자리는 왜 구하지 않느냐, 남자는 안 만나느냐, 결혼은 언제 할거냐 등을 들이대며 공격해댄다. 

그때 그녀를 구원할 적절한 대상인 시하라가 나타난다. 시하라는 세상은 여전히 조몬시대(일본의 선사시대)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가부장적인 사고로 뭉쳐진 이상한 인간이다. 그는 결국 빈틈없이 완벽한 '편의점'의 세계에서 쫓겨난다. 시하라가 볼 때 사냥을 못하면 대접 받지 못하고, 부족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족원을 배제하는 사회와 지금이 어찌 달리 보일 수 있겠는가. 같은 논리로 그는 후루쿠라에게도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는 간섭받고 강요당하고, 결국 무리에서 추방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둘은 결정한다. 결혼하기로. 

과연 둘은 결혼(형식상일 뿐이지만, 세상은 형식만 갖추면 공격하지 않으므로)을 통해 세상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전에 우리는 어디까지 자유스러운 것일까. 우리는 선사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발전을 한 것일까. 같은 질문들이 짧은 소설에서 계속 던져진다. 어찌 보면 이 책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현대 버전 같은 느낌도 든다. 내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서있고, 남이 원하는 얼굴로 표정 짓는 '인간'이 될 수 없다면, 우리의 인생에는 언제든 '실격'의 철퇴가 내려진다. 인간실격의 요조든 이 소설의 후루쿠라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는 편의점의 매대를 벗어날 수 없는 부속품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붙어 있는 가격표와 상품명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즉각 교체되고 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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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 전2권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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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가 어떤 책인가를 잘 설명해주는 글은 '무지개를 풀며'에 실린 서문이다. 그 첫머리에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어떤 출판인은 이를 다 읽고 사흘 밤잠을 설쳤다고 하고, 어떤 선생님은 학생 한 명이 눈물을 흘리며 그 책이 그의 인생을 공허하게 만들었다고 울먹였다고 했다. 이에 대해 도킨스는 그의 동료 피터 앳킨스의 이와 같은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겪는 변화의 가장 심오한 구조는 붕괴이다. 근원에는 오직 부패, 거스를 수 없는 카오스의 파도만이 몰아친다. 모든 목적은 사라지고 방향만 남는다. 우주의 심장부를 깊고 냉정하게 들여다볼수록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냉엄함이다.' 변화의 가장 심오한 구조가 '붕괴'라는 말은 모든 과학자에게 잘 들어맞는 말이겠지만, 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인생을 압축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과학적 진실에 접근하는 대신 달콤한 논리에 현혹당한 사람들은 도킨스의 직설들을 매우 불편해한다. 신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그가 비난받는 이유는 너무 당당히 무지의 핵심에 당도하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은 인간은 유전자의 보존체에 불과하며,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유전자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예상할 것도 없이 엄청난 비난과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책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수정할 내용이 없이 항상 베스트 목록에 올라있을 정도로 영향력과 인기가 여전하다. 이기적 유전자의 논리는 SF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상상의 모태가 되어, 인공지능이 인간을 공격하는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도킨스는 그 연장선상에서 2006년 '만들어진 신'을 펴내며, 논쟁의 불구덩이에 기름을 안고 들어갔다. 종교와 과학이 양립하기 위해선 각각의 영역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 출발점인 '신'의 존재를 양보할 수 없으니 과학이 밝혀낼수록 종교는 맹렬히 공격할 수밖에 없다. 도킨스가 소년 시절 아운들에 다닐 때를 보면 그도 처음에는 절대적인 설계자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특히, 그가 신처럼 숭배하던 엘비스 프레슬리가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인생의 소명처럼 신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 논증의 기초적인 오류, 즉 설계자가 있기 위해서는 설계자를 설계한 자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여섯 무렵에는 이미 전투적 무신론자가 되었다.


도킨스의 가족사도 관심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이론이 발생하게 된 사소한 배경들이 흥미로웠다. 특히 이기적 유전자의 집필이 시작된 계기가, 단순히 정전 때문에 전기에 의존한 귀뚜라미 연구를 할 수 없었던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가 칭찬해마지 않는 옥스퍼드(대학의 환경에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그다지 못 봤으므로)의 생활과 그의 엑설런트한 친구들 혹은 제자의 이야기까지. 사이먼 배런 코언이나 제인 브룩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 등 도킨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궁금해할 법한 사건들로 꽉 차있다. 런던대학의 대학원생인던 W.D.해밀턴의 이타주의에 대한 설명은, 유한한 개체 안에서 대대로 살아남는 '이기적 유전자'의 시작을 잉태하게 한 씨앗이 되기도 했다. 


도킨스와 '新무신론자'로 불리며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써낸 바 있는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암에 걸려서 죽기 전에 쓴 책이 있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인데 그는 이 책에서 종교인들의 일말의 기대를 무참이 무너뜨린다. 평생을 신을 비판하는데 힘을 쏟았던 사람이라도 마지막엔 신의 품으로 귀의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신이 내린 벌이라는 것이 불규칙한 생활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암 정도라면 그의 무기고는 텅 비어 있음에 틀림없다며 마지막까지 독설을 쏟았다. 리처드 도킨스 또한 종교인들의 비난에 대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한 자세를 견지한다. 나는 그들의 이런 당당함을 존경한다. 실험과 연구를 통한 과학적 근거와 수많은 증거를 통한 자신감이 없다면 이내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신비주의자들에게 독설을 내뿜으며 그가 70번째 생일에서 낭독한 시가 리처드 도킨스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정말로 늙어서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까지는

시간의 날개 달린 전차가 예고하는 그곳에.

아직은 내게 어두운 밤을 순순히 길들일 시간이 잇다. 

세상을 환히 밝힐 시간이 있다. 

또 하나의 새 무지개를 풀어버릴 시간이 있다. 

영원한 안식에 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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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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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차를 주차시킨 후에 밖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영상은 끝없이 움직이지만 바깥의 소리는 이불로 덮어놓은 스피커처럼 나지막이 들릴 뿐이다. 그 순간 나의 세계는 오직 차 안의 공간이 전부이고, 밖의 세상은 스크린처럼 나와 무관한 다른 차원으로 느껴진다. 영화 '밴드 왜건'에서 잭 뷰캐넌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쇼 안에서도 모두 일어난다.'(p.99)고 했던 노래처럼, 세상은 한 발 떨어져 보면 한 편의 영화 같기도 하고 쇼 같기도 하다. 나는 언제든 그 거리감을 느낄 수 있도록 살짝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건 내 생각 뿐이다. 내가 문을 열고 한 발만 내딛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성능 좋은 컴퓨터처럼 순식간에 머릿속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 그것들이 나를 소유하고 있다. 누가 어떤것을 소유하고 있든간에 불변의 사실은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때 악마가 와서 내 귀에 속삭인다면. 

'너는 내일 죽어, 대신 네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를 없애면 너는 하루를 더 살 수가 있어.'

그렇다면 나와 연결된 이 모든 것들 중에서 무엇을 버려야 할까.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주인공이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집에서 악마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악마는 '나'에게 당신은 내일 죽는다며, 다만 '이 세상에서 한 가지만 없애면, 하루의 생명을 얻는다.'고 말한다. 괜찮은 제안이긴 한데 그 물건은 악마가 정하는 것이 문제다. 제목이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순간에 가면 악마가 '고양이'를 지목할 것이 뻔하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기도 전부터 마음이 슬퍼질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항상 '한 가지를 얻으려면, 한 가지를 잃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진리다. 이 책은 그 진리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잃은 것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것인가를 묻는다.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억울한 점이 있다면, 인간은 그것이 곁에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있을 때 잘하면 좋으련만 인간은 또 그렇게는 못한다.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잃어봐야 하는데, 잃어버리면 아무리 소중함을 알았던 대상이라도 다시 찾아올 수가 없다. 그것이 소중한 모든 것들의 아이러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소중함을 아는 것이 제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지옥에 간다고 해도, 그것을 기억한 채 돌아와 다시 삶을 살 수 없는데 그 얼마나 무용한 필요인가. 마찬가지로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위해 잃어버려야 한다면 그 '알게됨'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소설은 뒤로 갈수록 이러한 의문의 순환고리에 빠져든다. 시계가 없어지고, 휴대폰이 없어지고, 영화가 없어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앞의 것들이 사라졌을 때는 장점도 있었고, 자신이 놓쳤던 것들을 다시 되돌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교감을 하고 같은 기억을 가진 고양이가 사라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 소설이 던지는 물음은 이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것을 없애 버린다면 진짜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더 나아가


'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진짜 '나'로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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