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무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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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주의라는 것이 '미'를 최고의 가치로 하는 것은 알겠으나 그래서 그게 어떤 것이냐고 하면 선뜻 답하기가 애매하다. 미를 추구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모든 예술의 공통분모가 아닌가. 그렇다면 탐미주의는 단순히 공통으로 삼는 정도를 벗어나, 극으로 치닫는 궁극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까.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치면 바로 따라오는 것이 '탐미주의'이다. 소설이 다른 목적에 눈 돌리지 않고 오직 '미'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탐미주의야말로 오직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근본 욕망이므로 진짜 인간을 위한 예술이라고 불러도 될까. 작품에 작가의 신념이나 사회적 인식은 전혀 배제하고 오직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야기는 마뜩지 않지만 매력적이다.  


주인공 소노코가 선생님(작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형식의 소설이다. 그녀는 따분한 생활에 활력을 주고자 여자기예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기로 한다. 하루는 모델을 세우고 관음보살을 그리는데 교장이 와서 아무래도 소노코 씨의 그림은 모델을 그리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별 이상한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평소 흠모하던 옆반의 미쓰코를 떠올리던 소노코는 한번 더 그 소리를 교장에게 듣자 기분이 확 상해서 교장에게 따진다. 학교 내에서는 소노코와 미쓰코의 동성애를 의심하는 소문들이 있었고,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실제로 친해진다. 둘의 관계는 처음에 괜찮다고 하던 남편의 의심까지 받는 상황에 이르러, 어느 날 미쓰코가 오사카의 어느 집에서 옷을 도둑맞았다며 옷을 가져다 달라고 전화를 한다. 오직 자신만을 향해 있을 것이라 믿었던 미쓰코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소노코는 미쓰코와 연락을 끊고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이도 그리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미쓰코를 향한 사랑을 눈을 뜨고, 또 하나의 인물 미쓰코의 남자친구 와타누키가 등장한다. 소설은 이 둘의 미쓰코를 향한 사랑과 욕망을 중심으로 각각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계속 뒤바뀌면서 진행된다. 마지막으로 가서는 소노코의 남편까지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이 세계문학으로 고전 형식으로 출판되었고, 탐미주의니 유미주의니 하는 이미지를 업고 있어서 소설이 꽤 추상적이고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근래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특히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덤불 숲(라쇼몽)'의 구성처럼 등장인물이 말을 할 때마다 관점이 바뀌고 스토리가 달라지는 점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한다. 첫 번째 화자가 이야기 할 때 이야기를 독자가 믿고 있으면, 두 번째 화자가 나타나 사실 그 사건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앞의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는다. 이것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이야기들이 모두 하나의 완벽한 '미'의 존재, 미쓰코를 중심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객관적일 수 없는 때는 감정에 휘둘릴 때이고, 감정에 휘둘리는 것 중에서도 사랑에 빠졌을 때 거의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 미쓰코의 말을 완전히 믿어야 하는 지 마는지도 모르는 채 흔들리는 소노코를 중심으로, 미쓰코의 남자친구이면서 성불구자인 와타누키, 미쓰코의 남편까지. 등장인물들은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미', 미쓰코를 향한 욕망을 가지고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그들이 하나의 욕망을 좇는 동안 끝없는 의심과 경쟁자에 대한 증오 때문에 스스로 인간의 바닥을 드러낸다. 우리가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것을 소유하려 한다면 인간은 한편으론 그만큼 성장하면서도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고 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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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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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실린 사례 중 크리스티너라는 27세 여자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특이하다.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자기 몸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팔이 머리 밑에 있고, 다리가 하반신에 붙어 있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너무 당연해서 '인식'하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크리스티너는 그런 인식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자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발과 땅을 보고 있어야 하고,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주변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는 것인지 끝없이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인식하는 몸에 대한 감각을 보완하기 위해 그녀는 끝없이 청각과 시각을 이용해야만 했다. 어떤 것의 정도를 알 수가 없을 때 우리에게는 '기준'이 필요하다. 


기준이 매번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 후루쿠라의 경우는 신체적인 무감각이 아니라 정신적인 무감각이 문제였다.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초등학교 때 이미 사람을 삽으로 내리쳐서는 안 되는 것을 알고, 죽은 새는 구워 먹는 것이 아니라 묻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루쿠라는 그것을 선천적으로 구별할 수 없었다. 후루쿠라는 학창 시절을 겪으며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와 함께 자기 생각을 그대로 밝히는 것은 항상 좋지 않은 반응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리스티너의 경우처럼 '당연하게' 할 수 없다면 방법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동생이 알려준 대로 '아프다'고 하거나 다른 이유로 적절히 자신이 결코 비정상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가 편의점을 만나서 첫눈에 사랑에 빠진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전까지 나에게 "이것이 평범한 표정이고 목소리는 이런 식으로 내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르쳐주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천장과 침대가 그 자리에 있고 몸이 거기 있으므로 크리스티나에게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 지 가르쳐줄 생각을 못하는 것처럼, 상대가 앞에 있고 내 생각대로 표정을 짓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므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후루쿠라가 편의점에서 편안함을 느꼈던 첫 번째 이유가 '매뉴얼' 때문이었다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균질해지고, 정형화 되었으며,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편의점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편의점 인간'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18년을 일했다. 서른 여섯이지만 다른 어떤 직장에도 나갈 자신이 없었다. 오직 편의점과 사랑에 빠져 그만 보고 살았는데 다른 만남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겨우 일차 관문을 넘어 사람들 사이에서 '티'나지 않게 서 있을 수 있게는 되었지만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사람들은 틈만 보이면 정규직 일자리는 왜 구하지 않느냐, 남자는 안 만나느냐, 결혼은 언제 할거냐 등을 들이대며 공격해댄다. 

그때 그녀를 구원할 적절한 대상인 시하라가 나타난다. 시하라는 세상은 여전히 조몬시대(일본의 선사시대)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가부장적인 사고로 뭉쳐진 이상한 인간이다. 그는 결국 빈틈없이 완벽한 '편의점'의 세계에서 쫓겨난다. 시하라가 볼 때 사냥을 못하면 대접 받지 못하고, 부족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족원을 배제하는 사회와 지금이 어찌 달리 보일 수 있겠는가. 같은 논리로 그는 후루쿠라에게도 아이를 낳지 않는 여자는 간섭받고 강요당하고, 결국 무리에서 추방당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둘은 결정한다. 결혼하기로. 

과연 둘은 결혼(형식상일 뿐이지만, 세상은 형식만 갖추면 공격하지 않으므로)을 통해 세상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전에 우리는 어디까지 자유스러운 것일까. 우리는 선사시대에서 얼마나 많은 발전을 한 것일까. 같은 질문들이 짧은 소설에서 계속 던져진다. 어찌 보면 이 책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현대 버전 같은 느낌도 든다. 내 본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서있고, 남이 원하는 얼굴로 표정 짓는 '인간'이 될 수 없다면, 우리의 인생에는 언제든 '실격'의 철퇴가 내려진다. 인간실격의 요조든 이 소설의 후루쿠라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는 편의점의 매대를 벗어날 수 없는 부속품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이 붙어 있는 가격표와 상품명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즉각 교체되고 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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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 전2권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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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기적 유전자'가 어떤 책인가를 잘 설명해주는 글은 '무지개를 풀며'에 실린 서문이다. 그 첫머리에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어떤 출판인은 이를 다 읽고 사흘 밤잠을 설쳤다고 하고, 어떤 선생님은 학생 한 명이 눈물을 흘리며 그 책이 그의 인생을 공허하게 만들었다고 울먹였다고 했다. 이에 대해 도킨스는 그의 동료 피터 앳킨스의 이와 같은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겪는 변화의 가장 심오한 구조는 붕괴이다. 근원에는 오직 부패, 거스를 수 없는 카오스의 파도만이 몰아친다. 모든 목적은 사라지고 방향만 남는다. 우주의 심장부를 깊고 냉정하게 들여다볼수록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냉엄함이다.' 변화의 가장 심오한 구조가 '붕괴'라는 말은 모든 과학자에게 잘 들어맞는 말이겠지만, 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인생을 압축할 때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과학적 진실에 접근하는 대신 달콤한 논리에 현혹당한 사람들은 도킨스의 직설들을 매우 불편해한다. 신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그가 비난받는 이유는 너무 당당히 무지의 핵심에 당도하기 때문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핵심은 인간은 유전자의 보존체에 불과하며,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유전자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예상할 것도 없이 엄청난 비난과 치열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이 책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수정할 내용이 없이 항상 베스트 목록에 올라있을 정도로 영향력과 인기가 여전하다. 이기적 유전자의 논리는 SF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상상의 모태가 되어, 인공지능이 인간을 공격하는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도킨스는 그 연장선상에서 2006년 '만들어진 신'을 펴내며, 논쟁의 불구덩이에 기름을 안고 들어갔다. 종교와 과학이 양립하기 위해선 각각의 영역이 인정되어야 하는데, 정작 그 출발점인 '신'의 존재를 양보할 수 없으니 과학이 밝혀낼수록 종교는 맹렬히 공격할 수밖에 없다. 도킨스가 소년 시절 아운들에 다닐 때를 보면 그도 처음에는 절대적인 설계자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특히, 그가 신처럼 숭배하던 엘비스 프레슬리가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인생의 소명처럼 신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 논증의 기초적인 오류, 즉 설계자가 있기 위해서는 설계자를 설계한 자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여섯 무렵에는 이미 전투적 무신론자가 되었다.


도킨스의 가족사도 관심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이론이 발생하게 된 사소한 배경들이 흥미로웠다. 특히 이기적 유전자의 집필이 시작된 계기가, 단순히 정전 때문에 전기에 의존한 귀뚜라미 연구를 할 수 없었던 순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그가 칭찬해마지 않는 옥스퍼드(대학의 환경에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그다지 못 봤으므로)의 생활과 그의 엑설런트한 친구들 혹은 제자의 이야기까지. 사이먼 배런 코언이나 제인 브룩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 등 도킨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궁금해할 법한 사건들로 꽉 차있다. 런던대학의 대학원생인던 W.D.해밀턴의 이타주의에 대한 설명은, 유한한 개체 안에서 대대로 살아남는 '이기적 유전자'의 시작을 잉태하게 한 씨앗이 되기도 했다. 


도킨스와 '新무신론자'로 불리며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써낸 바 있는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암에 걸려서 죽기 전에 쓴 책이 있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인데 그는 이 책에서 종교인들의 일말의 기대를 무참이 무너뜨린다. 평생을 신을 비판하는데 힘을 쏟았던 사람이라도 마지막엔 신의 품으로 귀의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신이 내린 벌이라는 것이 불규칙한 생활로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암 정도라면 그의 무기고는 텅 비어 있음에 틀림없다며 마지막까지 독설을 쏟았다. 리처드 도킨스 또한 종교인들의 비난에 대해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한 자세를 견지한다. 나는 그들의 이런 당당함을 존경한다. 실험과 연구를 통한 과학적 근거와 수많은 증거를 통한 자신감이 없다면 이내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신비주의자들에게 독설을 내뿜으며 그가 70번째 생일에서 낭독한 시가 리처드 도킨스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정말로 늙어서 그 목적지에 도달하는 날까지는

시간의 날개 달린 전차가 예고하는 그곳에.

아직은 내게 어두운 밤을 순순히 길들일 시간이 잇다. 

세상을 환히 밝힐 시간이 있다. 

또 하나의 새 무지개를 풀어버릴 시간이 있다. 

영원한 안식에 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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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가와무라 겐키 지음, 이영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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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차를 주차시킨 후에 밖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영상은 끝없이 움직이지만 바깥의 소리는 이불로 덮어놓은 스피커처럼 나지막이 들릴 뿐이다. 그 순간 나의 세계는 오직 차 안의 공간이 전부이고, 밖의 세상은 스크린처럼 나와 무관한 다른 차원으로 느껴진다. 영화 '밴드 왜건'에서 잭 뷰캐넌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쇼 안에서도 모두 일어난다.'(p.99)고 했던 노래처럼, 세상은 한 발 떨어져 보면 한 편의 영화 같기도 하고 쇼 같기도 하다. 나는 언제든 그 거리감을 느낄 수 있도록 살짝 발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건 내 생각 뿐이다. 내가 문을 열고 한 발만 내딛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성능 좋은 컴퓨터처럼 순식간에 머릿속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아니 그것들이 나를 소유하고 있다. 누가 어떤것을 소유하고 있든간에 불변의 사실은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때 악마가 와서 내 귀에 속삭인다면. 

'너는 내일 죽어, 대신 네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를 없애면 너는 하루를 더 살 수가 있어.'

그렇다면 나와 연결된 이 모든 것들 중에서 무엇을 버려야 할까.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은 주인공이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집에서 악마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악마는 '나'에게 당신은 내일 죽는다며, 다만 '이 세상에서 한 가지만 없애면, 하루의 생명을 얻는다.'고 말한다. 괜찮은 제안이긴 한데 그 물건은 악마가 정하는 것이 문제다. 제목이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순간에 가면 악마가 '고양이'를 지목할 것이 뻔하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기도 전부터 마음이 슬퍼질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항상 '한 가지를 얻으려면, 한 가지를 잃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진리다. 이 책은 그 진리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잃은 것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할 것인가를 묻는다.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억울한 점이 있다면, 인간은 그것이 곁에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른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있을 때 잘하면 좋으련만 인간은 또 그렇게는 못한다. 소중함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잃어봐야 하는데, 잃어버리면 아무리 소중함을 알았던 대상이라도 다시 찾아올 수가 없다. 그것이 소중한 모든 것들의 아이러니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소중함을 아는 것이 제아무리 중요하다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지옥에 간다고 해도, 그것을 기억한 채 돌아와 다시 삶을 살 수 없는데 그 얼마나 무용한 필요인가. 마찬가지로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위해 잃어버려야 한다면 그 '알게됨'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소설은 뒤로 갈수록 이러한 의문의 순환고리에 빠져든다. 시계가 없어지고, 휴대폰이 없어지고, 영화가 없어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앞의 것들이 사라졌을 때는 장점도 있었고, 자신이 놓쳤던 것들을 다시 되돌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교감을 하고 같은 기억을 가진 고양이가 사라지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 소설이 던지는 물음은 이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것을 없애 버린다면 진짜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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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존재가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진짜 '나'로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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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를 위하여 - 작가 츠바이크, 프로이트를 말하다
슈테판 츠바이크.지그문트 프로이트 지음, 양진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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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평전을 남긴다면, 적어도 평전을 남겨야 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가 시대를 거슬렀다는 사실이다. 순응하고 동화되고 남들처럼 하는 이들이 세상에 남겨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시대를 압도하는 정신과 문화에 꼿꼿이 대항하는 이만이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다. '본성이 궁핍해지는 것은 언제나 더 높은 고향을 상기하기 때문'이라는 노발리스의 말처럼,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는 이상을 꿈꾸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때문에 프로이트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가 살았던 시대정신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츠바이크는 꽤 많은 면을 할애하여 그때가 어떤 시대였는지 설명한다. 


모든 공동체가 그러하듯 '사회' 역시 스스로 유기체가 되어 그를 공격하려는 성향들을 차례로 제거한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과 공격성을 규칙과 관습의 틀에 가두고 표출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은 모든 공동체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19세기는 그런 경향이 지나치게 증폭되었는데, 그 근원에는 '이성'에 대한 맹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성에 대한 도취는 머지않아 인간이 모든 삼라만상의 이유를 이성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무질서가 합리적 정신 의지에로 치환되고 나자, 본능적으로 잠재해 있던 욕망과 충동은 이성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성 이외의 것은 이미 소멸 직전에 도달했음을 알았고, 설사 그것들이 존재하더라도 더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세기의 도덕 원칙이었다. 


때문에, 프로이트가 처음 의사 동료 모임에서 '모든 신경증은 성적 욕망을 억압한 데서 시작되었다.'(p.55)는 표현을 발표했을 때, 의사 집단이 느꼈던 공포와 전율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인위적으로 히스테리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 가능하다.'(p.88)는 그의 보고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일흔 번째 생일까지도 비정규직 교수였던 그는 누구의 축하도 받지 못했다. 그는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심리적 활동이 애초에 무의식의 산물'(p.98)이라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정신분석입문을 펼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장의 제목은 '잘못'이다. 처음 이 장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는데 츠바이크는 이 개념의 탄생부터 설명해준다. 무의식을 분석하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최면 등의 방법으로 강제적 유도를 하는 것, 둘째는 그것이 드러날 때의 자료들을 토대로 나머지를 유추하는 것,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경계가 느슨해져서 표출되는 것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실수'는 이때 매우 유효한 단서가 된다. 실수는 무의식을 왜곡하려는 당사자의 감정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 쏟아져 나오는 행위기 때문이다. 누군가 잘못된 단어를 내뱉었거나, 실수 행위를 했을 때는 무의식에 그 실수를 유도할 수 있는 심리적 기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게 정신분석의 시작이다. 작가는 이런 과정을 통해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업적인 '꿈의 해석', '정신분석의 기술', '성의 세계' 등을 그의 삶과 함께 풀어 나간다. 


이런 작업들을 하면서 츠바이크는 그의 업적이 칸트와 코페르니쿠스의 진보적 사고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순간이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츠바이크는 단순히 어떤 시기에 어떤 생각으로 업적을 세웠는지를 넘어서, 소설가가 우리를 새로운 방으로 인도할 때 문 손잡이부터 구석의 벽난로까지 죄다 서술하여 펼쳐놓듯 상세한 서술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갈 때의 시대적 상황과, 앉아서 불을 피울 때의 주변의 시선, 그 불꽃이 타오를 때의 사람들의 반응을 소설처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궁금증을 유도한다. 특히 츠바이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바탕으로 섬세한 심리묘사와 의식의 흐름을 작품에 직접 도입함으로써, 그만큼 프로이트를 이야기하기에 적격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평전 다음에 실려있는 츠바이크와 프로이트의 서신들은 그들의 생각과 업적을 지근에서 보여줌으로써 평전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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