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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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p.61)


'나'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무릎에 앉히고 해주시던 '곰스크'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비록 지금은 어린시절 꾸었던 곰스크에 대한 희망은 잊어버렸지만, 그에 대한 열정은 남아서 언젠가 내 삶의 클라이막스에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도착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뜻밖의 방해자가 생긴다. 결혼 직후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올랐을 때까지도 몰랐지만 사실 아내는 전혀 즐거워 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모든 것에서 멀어져 간다'며 창백한 얼굴을 할 뿐이다. 여행 둘째 날 두시간 가량 정차하는 기차에서 내려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급기야 산 너머까지 간 부부는 결국 기차를 놓친다. 


'곰스크'가 환상이 되어 사라지는 순간이다. '나'는 더할 수 없이 초조해진다. 내 평생의 꿈이, 다른 노력도 아니고 단순히 기차에 앉아서 시간만 지나면 이루어지기 직전인데 마을에 머물고 있다니. 주인공의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어떻게든 작은 마을을 벗어나 기차에 오르고 싶지만 곰스크행은 정해진 시간도 없고 오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더구나 부인은 낡은 식당에서 머물러 살 것처럼 일을 도우며 정착하려고 한다. '나'는 그녀의 느긋한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든 그것은 결국 가시적인 '성과'를 내어야만 한다는 나의 믿음은 항상 소설에서는 배신당했다. 특히 이 소설에서 부인은 참을 수 없이 게을렀으며, 믿을 수 없을만큼 의욕이 없었다. 눈앞의 어떤 것을 보고도 그것은 자기의 몫이 아닌양 그냥 굴려 보냈고, 남편이 그것을 좇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경쟁에서는 이겨야 하고, 목표는 반드시 성취하는 것이 성공이며, 안주하는 것은 도태를 자초한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은 듯 보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경쟁에서 이기기도 하고, 나름의 목표도 달성하고, 남들보단 나은 것처럼 보여서 우쭐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의 결과물은 더 큰 목표를 끌고 들어오고, 그 목표는 달성되자마자 새로운 경쟁으로 우리를 이끈다.    


아내 역시 우리가 언젠가는 곰스크로 가게 될 것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곳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어떤 느낌이나 희망, 걱정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젊은 사람이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것처럼. (p. 34)


부인이 원하는 것은 곰스크 같은 환상, 혹은 꿈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우리집 정원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와 아빠가 함께 노는 것이다. 평생 곰스크행 열차에 타서 목적지가 다가오기만 기다리는 초조한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복, 손에 잡히는 현실을 공유하자는 말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책에는 '안헤도니아'라는 병명이 등장한다. 평생 꿈으로 생각하던 것이 현실로 이뤄졌을 때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를 잃을지도 모르는 공포에서 나오는 병의 이름이다. 

 

행복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눈앞에 다가오면 무시무시하고 불안해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을 대하는 태도는 대략 그러하다. 가까운 것들과 손에 잡히는 것들을 일단 제외하고 나면 우리는 그제서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급기야 내가 속한 원 밖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은 그럴듯 해진다. 왠지 더 의미있어 보이고 당장 눈앞의 기쁨이나 슬픔에 대해 의연해도 되는 변명거리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평생 이런 대답을 되풀이 한다. 


"나? 응 미안. 나 곰스크로 가야해서 좀 바쁘거든.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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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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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정형돈의 소속사는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방송을 중단할 것이라는 발표를 했다. 그의 병명은 '불안 장애'로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큰 어려움을 겪어왔고, 결국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무한도전을 비롯한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기로 했다. 이경규 씨 또한 공황장애라 힘들어 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나 심적 부담이 얼마나 큰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육체적 고통에 비해 정신적 고통은 어떤 방법으로든 극복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때로 그것은 주사를 맞고 상처가 낫는 것보다 쉽게 여겨져서 당사자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는 평생 불안장애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 강연도 하고 책을 내고 사교도 활발히 하는 잡지 에디터가 불안장애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일단 난감했다. 정형돈의 경우도 누구보다 남들 앞에서 밝게 웃고 남을 웃기는 직업을 가진 개그맨이 그런 병에 시달린다는 사실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오해는 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큰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며 상황을 악화시켰을 것이다. 


저자는 30년간 '불안'이라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대며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이 책은 그간의 기록을 정리한 책이다. 최근 불안을 다루는 책의 출판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그 관심이 높아진다는 증거이고, 이는 또 그만큼 정신적 고통이 일반화 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는 남들에 대한 '인정욕구' 지위에 대한 '불안심리' 경쟁에 대한 '부담감' 등이 이유가 되어 현대인을 압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천상의 목소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도 콘서트에서 가사를 까먹은 일이 발단이 되어 30년 가까이 무대에 서지 못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환자 수가 50만이 넘은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저자의 불안의 여정은 정신적 문제를 다룬 3000년 동안의 모든 자료를 조사하고 실제 치료과 극복의 과정을 거치며 그 어떤 전문가보다 전문적이고 치열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극복하기 힘든 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저자 또한 거기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 불안으로 인해 과도한 걱정을 하고 남들보다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을 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더 완벽한 강의를 준비할 수 있고 위험한 행동을 줄일 수 있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그는 그런 불안에 압도 당할 것처럼 겨우 겨우 살아 낸 것 같으면서도 30년을 잘 지냈고, 20년을 직장에서 잘 지내고 있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그 기록을 모아 이렇게 훌륭한 책을 써 냈지 않은가. 어쩌면 그 과정에서 저자는 이미 답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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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의심한다
강세형 지음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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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을 나타내는 말 중에 '불혹'이라는 표현처럼 식상한 표현도 없다. 어떤 때는 너무도 흔해서 조금 무성의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꽤 근사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는 마흔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중요한 사실은 마흔이 되면 이제 세상일은 왠만큼 겪어 봤다는 자만감이 생겨 자기만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나는 요즘처럼 '원칙과 기본'을 지킨다는 말이 무서웠던 세상이 있나 싶다. 그 말은 과거에는 소신과 절개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고집을 뜻하는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원칙을 지키겠다는 말은 내말이 맞으니 내 고집대로 하겠단 소리가 되었고, 기본을 지킨다는 말은 내가 기준이니 내 말대로 따라하라는 말로 변질됐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런 어른들이 더 무서웠다. 나를 의심하지 않는 어른. 거짓이나 틀린 말을 하는 어른보다도, 내가 지금 거짓이나 틀린 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자신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없는 어른들이 백배는 더 무서웠다. (p. 13)


마흔이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은 규정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가득차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가득하다는 마음으로 쓴 책이 바로 '나를, 의심한다'이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바로 이 에세이의 시작이면서 끝이다. 고작 지난 달에 내가 확신에 차 한말조차도 친구에게 다시 들었을 때 '내가 그런말을 했어?'라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우리의 근거없는 자신감은 왜 자꾸 '확신'을 강요할까. 그런 의문은 지금 내가 갖는 의문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에 이 책은 편하게 읽혔다.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의 느낌을 한 마디로 정리 하자면, 그녀의 초기작 제목인

"나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였다.


이제 마흔이 되어 버렸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 하고 세상을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녀는 마흔이 되면 응당 사라져 버려야 할 의심과 유혹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오히려 자신은 여전히 어른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서른도 아니고 마흔은 그러기엔 또 너무 멀리 온 것도 사실이다. 그녀가 어른이 아닌것은 아닐지 몰라도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것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누구든 그러하지 않겠는가. 어느 누가 나는 이제 내가 과거에 보던 어른의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의심으로 가득찬 이 책이 그래서 읽는 내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친구의 꿈이야기이면서 자기의 이야기 같고, 다른 사람의 소설이야기인듯 하면서도 나의 꿈이야기 같은 책 한권은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두고 온 추억의 장난감을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다. 이제 대부분의 시도는 하기도 전에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나눌 수 있게 되었고, 많은 현상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서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그 여백에 놓여 있던, 다소 어설픈 상상이나 오류의 가능성은 철저하게 배제하는 능력까지 생겨났다. 그것은 내 짧은 인생의 경험을 통해 매번 확인되었고 나를 가장 많이 좌절시켰다. 


누군가 나에게 마흔이 어떤 나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위(知位)'의 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말은 내 위치를 아는 나이라는 뜻인데, 단순히 객관적 직책이 아니라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 내가 그들 사이에서 갖는 의미, 내가 할 수 있고 없는 역량의 정도, 내 단점과 장점에 대한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결국 저자의 '의심'과는 의도치 않게 반대편에 놓여야 할 말처럼 보이지만, 끝없이 나의 존재를 확인하면서도 나를 의심하는 것이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확신 속에서도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의심', 순응하면서도 언제든 박차고 나가겠다는 '무모함', 어린 시절 잠들고 눈뜰때 꾸던 꿈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는 것이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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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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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에 무리에 껴 있으면서도 하루에 열마디나 고작 하던 친구가 게임상의 누군가와 실실대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이버 친구'라나. 그래서 우리는 대번에 사이버고 뭐고 현실 친구한테나 제대로 해라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10년 전에는 트위터가 시작됐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이폰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어떤 뉴스에 아이엄마가 트위터를 하다가 아이가 사고로 숨졌는데 그 사실을 그녀가 트위터에 올렸다고 나왔다. 사이버 친구를 이야기 하며 웃다가 고작 10년이 지났는데 이제는 사이버와 현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트위터는 지고, 페이스북이 대세가 되었다. 자신의 짧은 의견을 말하기에 트위터는 유용했지만, 남들에게 과시하고 인정받으려는 욕구에는 미치지 못했었다. 더구나 우리는 싸이월드라는 개인 홈피를 많이 사용했어서인지 트위터보다는 페이스북이 결국엔 대세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페이스북이 인간의 어떤 심리를 가장 잘 활용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단 하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이다. 인정받는 다는 것은 진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선 안정적인 삶을 보장 받는 것이다. 적어도 같은 구성원 내에서 필요한 존재이므로 공격을 덜 받을 수 있고, 나아가 짝짓기에서도 양질의 배우자를 두고 선택할 여유까지 생길 수 있다. 이런 욕구는 시대를 지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웃기는 상상이지만 중세 시대에 페이스북이 발달 했다면 우리는 새벽에 밭을 가는 노동의 현장을 자랑하며 인정 받으려 했을 것이고, 종교개혁의 시대라면 우리는 청빈하고 절제된 삶의 모습을 페이스북에 올렸을 것이다. 알랭드보통은 '불안'에서 신분제 때문에 지위의 변동이 없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자질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지위가 변동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제목이나 표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페이스북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정신적 불안을 비롯한 심리적 문제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저자는 그러한 사례와 증상을 예로 들며 지금 페이스북이 끼치는 악영향을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처음으로 상대에게 보여주는 프로필의 과장을 통해 '사이버 나'의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 거기에 나와 친구를 맺고 있는 사람의 수와 그들의 명성, 내가 쓰는 글과 나의 행적 등은 나를 위한 글이라기 보다 전부 보여주기 위한 글이다. 이러한 '인정에 대한 욕구'는 우리 생활을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고, 우리는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상대의 관심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엄지손가락을 얼마나 많이 눌러주느냐는 내 글이 얼마나 인기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었고 나의 현재 위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로 인한 심리적 불안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페이스북에 대한 걱정 중 상당수는 오프에서 행해지던 행위들이 온라인으로 전이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묻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자면 이런 것은 어떨까. 편지만 주고 받다가 전화가 일상화 되었을 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 얼굴을 마주보며 이별을 전하던 소소함마저도 우리에겐 사치가 되었다. 끔찍하게 울려대는 벨소리가 이별의 전주곡처럼 울리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연인의 이별통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리 없이 우는 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는 일이 한때 그런 대접을 받았다는 말을 한다면 누가 그걸 믿겠는가. 페이스북으로 이별을 통보하는 일이 상식적인 방법은 아니고,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없는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얼굴 보고 하던 말이 전화를 통하고, 그마저 문자로 변하는 과정을 거쳐오면서 그 변화는 발전도 아니고 퇴보도 아닌 그저 방법의 변경일 뿐이지 않을까. 페이스북으로 다른 방향의 변화를 겪을 수 있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단계로 전이하는 단계일 뿐 심각한 과거의 상실은 아닐 수도 있다.

 

이야기의 결론은 자연스레 페이스북의 활용으로 넘어간다. 2010년 이집트에서 한 사업가가 경찰에 끌려 나가 구타 당해 죽은 사건은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지면서 민중 봉기의 시초가 되었다. 이는 페이스북의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다. 단순히 사회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무한한 인적 자원을 이용할 수 있으며 정보와 의견의 공유가 가능하다. 저자는 우리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해야할 일은 바로 '균형'이라고 말한다. 오프와 온라인의 적절한 안배가 이뤄진다면 페이스북은 사건만 일으키는 문제아는 아닐 것이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감정과 함께할 수 있는가는 과거에도 중요한 화두였고, 앞으로도 풀지못할 숙제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기술 앞에서 주춤거릴 것이지만 역시 언제나처럼 균형점을 찾아 내고 말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 과도기의 중심에 서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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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을 본 적이 있니? - 추상 회화의 선구자 피트 몬드리안이 만난 세상, 안데르센 상 수상작 예술톡
알렉산드로 산나 글.그림, 이현경 옮김 / 톡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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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24에서 몬드리안을 검색해보면 그와 관련된 책은 품절을 뺀다면 고작 열권 정도이다. 그나마도 그냥 그림만 싣고 있는 책을 제외한다면 몇 권 남지도 않는다. 그리고 내가 정작 원하는 몬드리안 그림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 나와 있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정답이라기 보단 '다른 사람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같은 류의 생각이었다. 사실 그가 언제 이 그림을 그렸고 제목이 무엇이니 그 사물의 어떤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면 미술이라는 게 그야말로 시시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미술을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과정이 가끔 몬드리안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몬드리안의 그림을 이해해 가는 과정 속에 뭔가 회화 전반에 대한 비밀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정도의 책은 아니다. 대신 아이들이 몬드리안의 그림을 접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좀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저자 알렉산드로 산나가 몬드리안의 그림을 보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식이 특이한데 그 이유는 그녀의 그림을 먼저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아래의 그림은 몬드리안의 '큰바다 5'라는 작품 전 페이지에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바다를 본적이 있니?'



그러면 당연히 이 그림을 본 아이들은 어떤 바다의 모습인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페이지에 가면 몬드리안의 그림이 나온다. 그런데 이 그림은 사실 지금까지 봐왔던 바다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그림이다. 처음에는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장담컨데 아이들은 금방 상상의 바다에 빠질 것이다. 나처럼 단순하게 해가 막 뜨고 있는 바다를 상상할 수도 있고, 석양이 내리는 수평선, 혹은 갈매기 때가 가득 찬 바다와 하늘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사람이 꽉 차 있는 모래사장과 맞닿은 바다도 될 수 있겠지. 하나의 현상이 추상화 되어 가는 과정을 상상하면서 아이들은 처음엔 이것이 그림인지 선뜻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어렴풋이 뭔가 남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몬드리안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미술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몬드리안은 모든 현상을 한없이 단순화 시키고 사물을 본질만 남기고 버렸다. 이러한 방식은 피카소에서도 찾을 수 있다. 본질만 남긴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독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는 그림을 그릴 당시의 화가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끝없이 되풀이 할 것이다. 사진처럼 선명하고 정교한 그림을 볼 때 나는 가끔 뭔가 텅 빈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사람의 생각이 하나도 들어가지 못하고 사물을 모사하는데 끝나버린 미술이란 어쩌면 제록스 복사기보다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책이 아이들에게 생각의 과정, 상상하는 그림을 알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면 이 책은 몇장의 그림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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