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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평점 :
권여선의 단편집이다. 곱씹어볼수록 대단한 작가다. 끔찍하게 무서운 작가다. 그 부드럽고 무심한 시선 아래 번득이는 것은 날카로움과 폭력이다. 진정 소설가다운 소설가를 만났다. 제목은 유치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데, 날카롭기는 막 갈은 칼날 같다. 멋진 작가다.
이 작품집엔 <가을이 오면>, <분홍 리본의 시절>, <약콩이 끓는 동안>, <솔숲 사이로>, <반죽의 형상>, <문상>, <위험한 산책> 등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처음 제목만 보고는 어린 시절 이야기인가 했다. 로맨스였으면 핑크 리본이라고 했을 텐데...라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 작품집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읽다보면 어느 틈에 벼랑 끝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 한 박자 비켜선 일상과 그 시선...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의외의 독특함으로 다가왔다.
전체적인 작품집의 느낌은 느리면서도 집요하고, 일상을 비판하면서도 의외의 날카로움으로 찔리게 만들고 반성하게 만들기도 하고, 명철한 관찰과 예의바른 거리 유지도 느껴졌고, 일상과 심리에 대한 세심한 터치는 부드러우면서도 무심한 시선과 잘 어우러졌다. 찌르면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이 작가는 슬며시 찌른다. 일상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독자의 의식을...
<가을이 오면>에서는 무심하게 사는 것 같은 늦깎이 대학생 여주인공의 일상에 한 남자가 들어서고 진물이 흐를 정도의 심한 알레르기는 마치 우아를 떠는 엄마와의 갈등처럼 함께 폭발하고... 그게 마치 가을이 오면 모든 게 가라앉는 것 같은 일상 같다. 사실 무심해 보이는 그 여대생, 담배 핀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책에... 햇반과 김치만으로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남자의 입에서 볶아지는 김치볶음밥이 얼마나 고소한 냄새를 풍기던지... 이 작가, 사기 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 사기에 기꺼이 넘어갔다.
<분홍 리본의 시절>은 일산에 사는 어느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지만, 실상은 많이 달랐다. 서울을 떠나 일산의 오피스텔에서 1년을 산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어찌 보면 통속적인 이야기다. 한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과거에 연인이었던 나는 그들과 새로이 엮이고, 현재의 섹스광 여자가 끼어드는 그렇고 그런 얘기.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전개되고 정점을 지나 결말까지 이르는 단계가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심리나 행동의 표현이 기가 막히다.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니들?” 소름끼치는 한 마디. 공포가 따로 없다.
<약콩이 끓는 동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끈적끈적한 뭔가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음산하고 음란한 뭔가가... 그걸 약콩을 끓이는 냄새로 지울 수 있을까... 결국 그 음산함과 음란함은 한 약한 몸을 가만 두지 않았다. “영험시런 여우는 죽을 때가 들면 죽을 데를 딱 찾아든다등마, 그래 그랬으까, 으째 그랬으까?” 대단한 비유가 살아있다.
<솔숲 사이로>는 깊은 산 속의 산허리에서 막 걷기를 시작했는데, 도착해보니 벼랑 끝 같은 느낌이었다. 시원한 느낌이 아니고 허전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느 날 나타났다가 또 어느 날 훌쩍 떠난 사내는 사내지만, 남은 자들은 뭔가. ‘그게 잘못이었다. 나는 네 낯섬에 매혹되었으면서도 그 낯섬을 제거하려 했다. 너를 동화시키려 했다. 너를 나로 만들려 했다. 내 젊음을 너에게 투사하려 했다.’ 떠돌이 사내는 떠돌 때만 머무는 것... 시작은 살짝 <B사감과 러브레터>의 느낌이 났다. 그래서 불안의 냄새가 났다.
<반죽의 형상>, ‘사람들은 N과 내가 친하다는 걸 알면서도 둘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면전에서 하곤 했다.’ 이 작품은 여자들이라면 백번 공감을 하며 읽을 것 같은 작품이다. 남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까... 한 반죽 속에 들어있는 두 형상처럼 서로 사랑하며 질투하며 미워하며 익숙해지는 그런 두 여자의 관계를... 사랑과 우정 사이라고나 할까. ‘남자와의 약속 때문에 나와 마지막 저녁을 먹지는 못해도 잠시라도 팔짱을 끼거나 허리를 안거나 손을 잡지 않고는 못 배기는 N의 형식적인 애정에 나는 가벼운 염증을 느꼈다.’ 언뜻 보면 가볍게 느껴지는 관계, 그런 단계를 어떤 단짝 동무 여자들끼리도 거쳐지나갈 것 같지만, 작가의 붓은 좀 더 거칠게, 좀 더 넓고 진하게 퍼진다. 작가의 힘이다.
<문상>, 이 작품집에서 제일 찝찝하고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 작품이다. ‘단점이 차고 넘쳐도 너그럽게 웃어넘길 수 있는 시가 있는가 하면 바늘끝만한 단점조차도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시가 있다.’ 그런 시를 쓴 우정미라는 수강생과 문화센터에서 시를 강의하는 강사와의 찝찝한 관계다. 상당히 공격적인 문체가 번득였다.
<위험한 산책>은 명철함과 신랄함을 덮고 있던 작가의 무심함과 일면 부드러운 손짓이 그 폭력성과 날카로움을 모두 드러낸 작품이다. 한 박자 비켜섰던 시선과 몸짓이 온통 일상을 헤집고 피를 뿜어댄다. 현실은 단 한번 위험한 산책으로 일상의 평온함과 나약함을 뒤흔든다.
이 작가, 무섭다. 무서운데 자꾸 곱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