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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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정래 선생님은 우리 문학의 거대한 산맥이다. 그 산맥이 여전히 푸르고 깊은 숲이라는 게 이렇게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외국문학을 전공하면서도 내 마음속엔 그런 자랑스러움이 있었다. 재미난 한국영화를 보고 나서 옆의 외국인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그렇게 잘난척해봐야 이렇게 재밌고 좋은 우리 영화를 못 보니 안쓰럽지 않은가 말이다. <태백산맥>, <아리랑>의 거대 산맥을 넘으며 간혹은 마음이 먹먹하고 숨이 막히기도 해서 몇 번이나 책을 내려놓아야 했었다. <대장경>을 읽으면서는 우리의 한에 어린 불심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해서 무작정 절에 들어가 엎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인간 연습>은 이 모든 작품들의 정수이며 조정래 문학의 완성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정치와 신념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한 가지 생각으로 끌어나간 단순한 작품이었다. 물론 그 작품 하나만 놓고 봤을 때, 부족함이 전혀 없는 작품이긴 했으나 조정래라는 거대 산맥에게 기대한 작품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오 하느님>이 내 앞에 있다. 일단 재밌는 작품이다. 조정래 선생님의 힘이 여전히 느껴지는 꽉 찬 느낌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의문제기부터 시작하겠다.

왜 제목이 <오 하느님>인가. 기독교적인 색채가 있는 책인가? 아니다. 그럼 오 마이 갓인가? 그렇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별로 없다. 단 한 번 나오는 저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해설도 납득할 수 없다. 배가 둑도록 고프다가 나온 먹을 것을 보고 하는 저 말이 얼마나 웃기는 말인지... 그만큼 간절하지 못했다. 그냥 요즘 사람들이 ‘아이구 하느님...’ 할 때하곤 그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지 않는가. 이 책의 제목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더라도 처음부터 주인공처럼 나오는 신길만의 어머니가 외는 염이어야 했다. “관세음보살님...”

우리 엄마는 불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불교신자다. 옛 어른들이 종교로 교리를 배우거나 내세를 위한 기도를 하기보다는,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이나 습관처럼 절에 가고 약간은 미신적으로 믿는 그런 신앙 있지 않은가.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 머리 조아리고 무조건 비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엄마의 신앙이고 신길만 어머니, 그 당시 모든 어머니들의 신앙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내세를 관장한다면, 관세음보살님은 현세를 관장한다고 한다. 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예전에 자주 김해와 서울을 차로 왕복할 때는 꼭 엄마가 가르쳐준 염을 왼다. “관세음보살님, 도와주세요...” 처음엔 엄마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생각이었지만, 이젠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불안하거나 어려운 일을 앞뒀을 때, 또는 비행기를 탈 때, 마음속으로 외게 된다.

꼭 그와 비교할만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길만의 어머니, 그 당시 자식들이 전쟁터에 나갔을 때, 그 절박한 심정은 어땠을 것인가. 그 어떤 말보다도 “총알 피해댕겨라.”라는 아버지의 말씀, “관세음보살님을 염혀...”라는 어머니의 말씀, 그게 전부였다. 어떻게든 살아야, 생존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관세음보살님, 살려주세요...”란 말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절박하게 그들의 입에서 절로 나왔을 것인가 말이다.

그 모진 세월을 그렇게 오래 겪었는데,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신앙이 아니었겠는가. 남의 나라 전쟁에 용병도 아닌 용병이 되어 말도 한 마디 안 통하는 곳을 떠돌며 그들이 갈구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조선이라는 아버지, 조선이라는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노랑머리에 코큰 외국인들 가운데 무심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키 작은 동양인들... 그들이 어떻게 몽고 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을 거쳐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정을 떠났는지... 그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 마음에 품은 그리움과 슬픔은 어떤 것이었는지... 한국인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을 터이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기쁘고 고맙다...

‘신길만은 조사실을 나서며 새롭게 솟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눈길과 고갯짓은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나누는 위로고 정이었다. 사람끼리 말이 통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중대한 것인지 신길만은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말을 한다고 다 말이 아니다. 그 말 속에 녹아있는 그 민족의 정신, 문화, 습관... 그 모든 것이다. 눈길 한 번이, 고갯짓 한 번이 모든 걸 다 느끼게 해줄 때가 있는 것이다. 외국인과 대화를 나누면 재미도 있고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난 절대 외국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다. 그가 저런 느낌, 저런 정서를 가진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사랑이 부족하거나 내가 민족주의자 같아 보이겠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난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날라리 불교신자도 아니면서 엄마가 가르쳐준 ‘관세음보살님’을 마음으로 염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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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밤에 여우가 열린어린이 그림책 14
미국 민요, 피터 스피어 그림, 김연수 옮김 / 열린어린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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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겹고 따스한 시골 풍경 그림에 여우 한 마리가 달려갑니다.

흑백과 칼라 그림이 번갈아가며 들어가 있는 이 아름답고 정다운 그림책을 보면 왜 여우가 밤에 밤길을 나서는지 알 수 있답니다. 마치 한 편의 동시를 읽듯이, 말도 리듬을 탑니다.

‘추운 밤에 여우가 달님께 밝은 빛 달라 하네. 이 밤 마을까지 가려면 꽤 길이 머니 밝게 밝게 밝게.’

배가 고픈 가족을 위해 목숨 걸고 추운 밤길을 달려 마을에서 오리와 거위를 훔쳐 달아납니다. 동물들 우는 소리에 아저씨와 아줌마가 깼습니다. 총을 메고 나팔을 불며 따라오는 아저씨한테 안 잡히려고 여우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갑니다.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여우야, 너는 잡혀 잡혀 잡혀.’

그렇게 여우굴에 도착하자 새끼 여우가 묻습니다.

“아빠, 마을은 어땠나요?” 그 말에 아빠여우가 대답합니다.
“참 아름다웠지. 그럼, 그럼, 그럼.”

사람이나 동물이나 가족을 위해선 자신의 목숨을 겁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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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 / 창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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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단편집이다. 곱씹어볼수록 대단한 작가다. 끔찍하게 무서운 작가다. 그 부드럽고 무심한 시선 아래 번득이는 것은 날카로움과 폭력이다. 진정 소설가다운 소설가를 만났다. 제목은 유치하기 그지 없어 보이는데, 날카롭기는 막 갈은 칼날 같다. 멋진 작가다. 

이 작품집엔 <가을이 오면>, <분홍 리본의 시절>, <약콩이 끓는 동안>, <솔숲 사이로>, <반죽의 형상>, <문상>, <위험한 산책> 등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처음 제목만 보고는 어린 시절 이야기인가 했다. 로맨스였으면 핑크 리본이라고 했을 텐데...라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 작품집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읽다보면 어느 틈에 벼랑 끝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 한 박자 비켜선 일상과 그 시선... 일상을 그리고 있지만 의외의 독특함으로 다가왔다.  

전체적인 작품집의 느낌은 느리면서도 집요하고, 일상을 비판하면서도 의외의 날카로움으로 찔리게 만들고 반성하게 만들기도 하고, 명철한 관찰과 예의바른 거리 유지도 느껴졌고, 일상과 심리에 대한 세심한 터치는 부드러우면서도 무심한 시선과 잘 어우러졌다. 찌르면 아프다는 걸 알면서도 이 작가는 슬며시 찌른다. 일상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그리고 독자의 의식을...

<가을이 오면>에서는 무심하게 사는 것 같은 늦깎이 대학생 여주인공의 일상에 한 남자가 들어서고 진물이 흐를 정도의 심한 알레르기는 마치 우아를 떠는 엄마와의 갈등처럼 함께 폭발하고... 그게 마치 가을이 오면 모든 게 가라앉는 것 같은 일상 같다. 사실 무심해 보이는 그 여대생, 담배 핀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책에... 햇반과 김치만으로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남자의 입에서 볶아지는 김치볶음밥이 얼마나 고소한 냄새를 풍기던지... 이 작가, 사기 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 사기에 기꺼이 넘어갔다.

<분홍 리본의 시절>은 일산에 사는 어느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지만, 실상은 많이 달랐다. 서울을 떠나 일산의 오피스텔에서 1년을 산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어찌 보면 통속적인 이야기다. 한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과거에 연인이었던 나는 그들과 새로이 엮이고, 현재의 섹스광 여자가 끼어드는 그렇고 그런 얘기.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전개되고 정점을 지나 결말까지 이르는 단계가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심리나 행동의 표현이 기가 막히다. “내가 그렇게 만만했니, 니들?” 소름끼치는 한 마디. 공포가 따로 없다.

<약콩이 끓는 동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끈적끈적한 뭔가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음산하고 음란한 뭔가가... 그걸 약콩을 끓이는 냄새로 지울 수 있을까... 결국 그 음산함과 음란함은 한 약한 몸을 가만 두지 않았다. “영험시런 여우는 죽을 때가 들면 죽을 데를 딱 찾아든다등마, 그래 그랬으까, 으째 그랬으까?” 대단한 비유가 살아있다.

<솔숲 사이로>는 깊은 산 속의 산허리에서 막 걷기를 시작했는데, 도착해보니 벼랑 끝 같은 느낌이었다. 시원한 느낌이 아니고 허전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느 날 나타났다가 또 어느 날 훌쩍 떠난 사내는 사내지만, 남은 자들은 뭔가. ‘그게 잘못이었다. 나는 네 낯섬에 매혹되었으면서도 그 낯섬을 제거하려 했다. 너를 동화시키려 했다. 너를 나로 만들려 했다. 내 젊음을 너에게 투사하려 했다.’ 떠돌이 사내는 떠돌 때만 머무는 것... 시작은 살짝 <B사감과 러브레터>의 느낌이 났다. 그래서 불안의 냄새가 났다.

<반죽의 형상>, ‘사람들은 N과 내가 친하다는 걸 알면서도 둘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면전에서 하곤 했다.’ 이 작품은 여자들이라면 백번 공감을 하며 읽을 것 같은 작품이다. 남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까... 한 반죽 속에 들어있는 두 형상처럼 서로 사랑하며 질투하며 미워하며 익숙해지는 그런 두 여자의 관계를... 사랑과 우정 사이라고나 할까. ‘남자와의 약속 때문에 나와 마지막 저녁을 먹지는 못해도 잠시라도 팔짱을 끼거나 허리를 안거나 손을 잡지 않고는 못 배기는 N의 형식적인 애정에 나는 가벼운 염증을 느꼈다.’ 언뜻 보면 가볍게 느껴지는 관계, 그런 단계를 어떤 단짝 동무 여자들끼리도 거쳐지나갈 것 같지만, 작가의 붓은 좀 더 거칠게, 좀 더 넓고 진하게 퍼진다. 작가의 힘이다. 

<문상>, 이 작품집에서 제일 찝찝하고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 작품이다. ‘단점이 차고 넘쳐도 너그럽게 웃어넘길 수 있는 시가 있는가 하면 바늘끝만한 단점조차도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시가 있다.’ 그런 시를 쓴 우정미라는 수강생과 문화센터에서 시를 강의하는 강사와의 찝찝한 관계다. 상당히 공격적인 문체가 번득였다.

<위험한 산책>은 명철함과 신랄함을 덮고 있던 작가의 무심함과 일면 부드러운 손짓이 그 폭력성과 날카로움을 모두 드러낸 작품이다. 한 박자 비켜섰던 시선과 몸짓이 온통 일상을 헤집고 피를 뿜어댄다. 현실은 단 한번 위험한 산책으로 일상의 평온함과 나약함을 뒤흔든다.

이 작가, 무섭다. 무서운데 자꾸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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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2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4-03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무서운 작가 같아요... ^^;; 역량이 숨겨져있는...
앞 작품도 찾아보려구요. ^^ 감사합니다~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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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현종이라는 작가가 누구나 다 아는 007을 소재로 특이한 소설을 만들어냈다. 아니 007과 쌍벽을 이루는 본드걸에 대해서. 친구들이 하도 본드걸 미미양, 미미양 하길래, 나도 모르게 ‘도대체 어떤 이야기이길래, 이렇듯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것일까’ 의문이 생기면서 동시에 흥미가 일었다.

다 읽고 난 첫 소감은 웃기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이 본드걸, 웃긴다. 어찌 보면 그럴싸하기도 하지만 007이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산다는 거, 좀 웃기다. 더구나 그에게 임무를 맡기는 M이나 정보국 모두 서울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본드걸이야 어차피 007과 엮이는 인물이니 꼭 한국인이 안 되란 법도 없다. 그런데 007도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한국이 무대다. 그래서 첨부터 웃겼다.

속편은 아니지만 영화와는 다르게 사실 이 작품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를 보여준다. 그 이후 스토리라고나 할까. 즉 오현종은 이 작품을 보통 007 영화가 끝나고 에필로그로 조금 나오는 부분부터 시작한다. 마치 주인공이 누군가(독자)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듯한 독특한 화법으로 작가는 미미양을 내세워 독자들을 007과 본드걸의 웃기는 일상으로 데려간다.

영화에서 보던 것과는 딴판인, 즉 세련되고 멋진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다르게, 텔레비전 앞 소파에 늘어져 축구를 보고 음식을 먹고 섹스를 하고... 더불어 이도 쑤시고 방귀도 뀔 것 같은 웃기는 모습의 007과 본드걸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새로운 임무를 맡고 한 번 영화에 나왔던 본드걸은 두 번 다시 안 나오는 것처럼 미미양은 1회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미양은 그 배신을 참다 못해 자신이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교육을 받고 임무에 투입되고 007과도 엮인다. 그래서 007의 본드걸이 아닌 본격적인 스파이 미미양의 고생담과 활약상이 전개된다. 문체는 스토리가 특이한 만큼 경쾌하고 즐겁다. 황당하면서도 웃기는 상황들은 마치 007과는 다른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끝부분의 진지함은 사실 그 맛을 조금 떨어뜨리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작가를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작가의 모나미 볼펜 끝에서 삐져나올 새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오현종 작가님, 작가 후기의 ‘재능이 없는 자의 기쁨’을 한 독자라도 함께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이런 게 ‘재능’ 아니면 무엇이 재능입니까? 유쾌하게 ‘웃으며’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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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풍경 1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양철북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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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그려져 있는 이 책은 내게 일본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은 단순하면서도 소박하고 깔끔하면서도 정갈한 풍경이었다. 그런 풍경의 일본의 한 어촌이 이 작품이 전개되는 장소이다.

인형을 등에 업은 다섯 살배기 요꼬와 등교거부 중인 고등학생 소키치는 바닷가에서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나고 함께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와 바다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한순간 새빨갛게 물들이는 해님이 바다라는 이불을 덮고 자러 들어가는 시간인 것이다. 그렇게 얘기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시작된다.

등교거부라는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주인공 소키치는 어찌 보면 청소년기의 반항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언뜻 보면 그렇다. 하지만 소키치를 학교에 나오게 하려고 찾아다니는 담임선생님을 피하는 소키치, 토산물 가게를 하는 누나와의 갈등, 그럭저럭 혼자 사는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도 하는 소키치, 도시락 집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또 밤에는 음악을 들으러 술집에 가는 소키치를 따라다니다 보면, 소키치가 단순히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으로 학교를 안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물론 사춘기에 겪을 수 있는 반항기는 기성세대 사회와 학교가 만들어 놓은 교육 체제, 그 체제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재’라는 획일화된 존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부모 세대와의 갈등 등 여러 가지가 섞여들고 있지만, 소키치의 문제는 좀 다른 양상을 띤다.

뼛속까지 어부였던 아버지가 어느 날 어부 일을 그만 두고 어울리지도 않는 민박집을 하면서 대기업이 송전탑 세우는 일을 돕는 일을 한 것, 그리고 그 일을 소키치가 이해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버린 아버지의 일이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시기와 맞물렸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 그 고장이 겪고 있는 어려움, 그 안에서 사는 많은 또 다른 청년들, 자신 같은, 또는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면서 소키치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섬에서, 바닷가에서 어부라는 1차 산업 직종이 사양길에 들어서고 농촌이나 어촌을 버리고 도시로 나가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끔 배를 타는 소키치는 왜 아버지가 어부라는 직업을 버렸을까. 뼛속까지 어부라고 느낀 아버지, 그 자신도 그 피를 물려받은 것처럼 느끼는 소키치에겐 그 의문을 푸는 것이 자신을 찾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게 될 것이었다.

‘집안 대대로 해오던 고기잡이를 포기하면서까지 아버지가 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인지 소키치는 좀 더 알고 싶었다. 안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일 뿐이다. 자신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른 채 살아간다면 수동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소키치의 여정을 따라가며 어부 또는 자연과 살을 비비며 살아가는 1차 산업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 그리움과 추억이 함께 살아난다. 산업과 자본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거대 기업들,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결국 기업의 손을 들어주는 정치권, 그에 희생당하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성까지도 씁쓸한 대비를 이루며 작가의 섬세한 필치 아래 그려져 있다.
 
무작정 반항하는 청소년, 마음엔 안 들지만 벗어날 용기가 없어 불평을 일삼으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불행한 과거를 겪었지만 새로 태어나려고 노력하는 소녀 등 그들의 고민과 휘청거리는 태도 그리고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 모두 자연스럽고 간결한 문체로 표현되어 있다. 자연 그대로의 바다가 만들어내는 세차고 아름다운 소용돌이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소키치의 아버지 그리고 그가 한 일 모두를 짐작하고 알게 되는 소키치는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를 깨닫고 그를 위한 첫 발을 내딛는다. 개발도 최소의 자연파괴를 염두에 두고 하는 애정을 담은 건강한 자연관이 그대로 살아있는 작품이었다. 또한 절제되고 간결한 대화 속에서도 서로의 진심이 녹아드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소통과 이해가 아닐까. 개발과 자본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라는 현대의 평범하지만 중요한 주제를 청소년의 입장에서, 청소년의 입을 통해 다룬 작품이었다.

히데요와 소키치의 잔잔하면서도 설익은 우정 같은 사랑의 싹틈은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눈부셔, 나한테는.” 이런 말이 최고의 사랑 고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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