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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미술 수업 - 한 젊은 아트컨설턴트가 체험한 런던 미술현장
최선희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한 젊은 아트컨설턴트가 체험한 런던 미술현장’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꽤 두껍다. 값도 비싸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이해가 된다. 이 책엔 한 한국여성의 미술에 대한 열정과 그녀의 삶이 그리고 미술 관련 직업에 대한 얘기가 그려져 있고, 나 또한 그 현장에 참여한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질 정도로 미술현장에서 벌어지는 세세한 이야기가 일상과 함께 펼쳐져 있고 많은 그림과 현장 사진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즐겁다.
사실 토요일 저녁에 책을 펼치면서 몇 장 보다가 잠이 들면 그냥 자버릴 생각이었다. 쓸데없는 얘기면 그냥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나 보고 사진이나 대충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말 생생한 런던의 미술수업, 인턴 과정 등등이 너무 재밌는 게 아닌가. 배가 고파져서 밤 10시(!)에 누룽지를 끓여먹고는 새벽 4시가 다 되어 눈이 감겨서 할 수 없이 잤다. 그리곤 아침에 깨자마자 아침도 안 먹고 커피를 갖다 놓고 정오가 다 되도록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너무 멋진 책이다.
나는 그림에 대한 선호도가 확실한 사람이다. 그 유명한 모딜리아니나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아무 감흥을 가질 수 없다. 현대 미술의 천재화가라는 대미언 허스트의 그림엔 소름이 돋기만 한다. 한때는 샤갈과 고야를 또 한때는 인상파를 좋아했다. 모네는 어느 순간 질려버렸고 늘 좋은 건 피카소와 고흐 정도다. 프라고나르의 <그네>, 너무 좋아하고 시슬리의 눈 풍경들엔 미친다. 미술에 대한 공부를 하지도 못했고 그림도 너무 못(!) 그린다. 하지만 그림 공부를 해보고 싶은 생각, 아마추어로라도 미술 평론에 대해 공부를 해보고 싶은 욕망은 늘 갖고 있다.
최선희, 그녀는 항공사에서 근무하다 프랑스인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또 그의 근무지가 바뀌어 영국의 런던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그림을 보는 안목, 예술 전반에 대한 안목도 있었던 모양이다. 시각적인 기억력이 좋아서 그림들에 대한 기억을 잘 하는 것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런던에서 1년간의 그림 공부 코스를 마치고 크리스피에서 인턴을 하고 또 갤러리스트로서, 아트컨설턴트로서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싶다. 물론 이 성공은 상대적인 것이다. 그녀는 아직도 이 분야에서 성장하는 중이고 계속 그 직업에 대한 경력을 쌓아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곳이 런던과 파리다. 그녀는 담담하게 그녀가 받은 수업 얘기, 그녀가 만난 인물들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그것이 어떤 안목과 노력으로 이루어졌을지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또한 이 책은 그 젊은 여성 아트컨설턴트의 삶에 대해 일상을 속살거리는 책이다. 거창하게 자서전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그녀도 그게 무리란 걸 안다. 하지만 이 책엔 그녀의 여자로서의 삶이, 외국에서 사는 한국 여성으로서의 마음이, 외국남자와의 결혼생활이 아주 살짝, 커튼 사이로 비쳐들고 있다. 징징거리지는 않지만 사이사이 비쳐드는 외로움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 외로움을 잠재우는 담담하고 씩씩한 용기도 함께 보인다. 멋진 여자다!
그리고 이 책은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또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 건네는 일종의 가이드라고 볼 수 있다. 갤러리스트, 큐레이터, 아트컨설턴트가 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업과정, 그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 직접 보고 확인한 예술품들, 또 크리스피에서 하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명화의 진품을 가리는 방법, 크리스피에서 어떻게 예술품을 받아 관리하고 경매를 붙이고, 또 전시회를 기획하고 작가를 발굴하는 등의 모든 일을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술을 예술로 보는 눈과 함께 상업적으로 향할 수 있는 세일즈의 세계도 잘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한국의 미술을, 한국의 작가들을 알리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국 여성 아트컨설턴트를 통해 한국 미술이 세계로 더 멋지게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와 함께, 창조적이고 상상력 풍부한 한국 작가들이 최대한 더 많이 세계에 알려지고 그들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의 멋진 고미술을 숨겨놓고 아무도 안 보여주는 폐쇄적인 한국 미술계(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도 좀 보여달라구욧!), 학연, 지연, 계파 등으로 복잡한 한국의 미술 시장,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림 소장 등 문제점들을 넘어 좀 더 소통하는 우리 미술계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책이기도 하다.
여전히 내가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최선희, 멋진 그녀 덕분에 봄이 되면 우리 미술관, 우리 작가들 전시회를 좀 돌아다녀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또 알겠는가. 미치도록 좋은 그림 한 점 발견해 모아놓은 적금을 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