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는...
나오는 책마다 재밌게 읽으면서도 내가 늘 태클을 거는 작가다. 그토록 입담이 좋다는 작가다. 가질 거 다 가진 작가라 세간의 질투 아닌 질투를 받는 작가다. 내가 태클을 잘 거는 건 그만큼 좋다는 표시이면서 또 작가 같지 않은 편안함이 느껴져서일 것이다. 말빨, 글빨 둑이는 그가 어쩌면 조금은 친구처럼 생각이 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앞에서 까불어도 되는 작가가 바로 김영하였다. 그래서 그의 좀 무거운 작품들보다는 난 가볍고 상쾌한 작품들이 더 좋다. <오빠가 돌아왔다>의 콩가루 집안 이야기, 드라마 같이 술술 풀리던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최근에 젊은이들의 현대 인터넷 세상을 그린 <퀴즈쇼>까지 늘 즐겁게 읽었다.
그리고 부산 강연회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막 <퀴즈쇼>가 나왔을 때인가 보다. 비도 오는 날, 차가 너무 막혀서 늦는 바람에 도착하니 이미 강연은 끝나있었다. 그리고 강연에 너무나 어울리는 목소리까지 가졌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친구 줄 책 선물까지 미리 사갖고 가서 사인을 받는데, 젊은 오빠 작가답게 산 책이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가계에 도움을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했더랬다. 그 날, 늦은 게 미안해서 제일 나중에 사인을 받자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길고 긴 사인줄을 바라보는데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긴 생머리에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만약 그뿐이었다면 그녀가 내 시선을 그렇게 잡아끌지 못했으리라. 난 단박에 왜 김영하가 주변의 것으로 인해 질투를 받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의 아내였다. 두 눈에 사랑을 가득 담고, 까무잡잡한 얼굴에서 빛이 나도록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알았다.
왜 이런 얘기를 책 리뷰에 상관도 없는데 길게 하냐고? 이 책에 종종 등장하는 게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모습이 상상이 됐기에 그랬다. 그들이 힘들게 했던 이탈리아 여행, 함께 고생을 하고, 함께 열 받아 하고, 다정한 커플처럼 산책도 하고, 예쁜 아내는 밥을 하고 작가 남편은 글을 쓰다 시간이 되면 함께 밥을 먹는 그런 시칠리아 여행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게 상상이 되어 더 좋았다는 얘기다. 그들의 현실은 우리 모두의 로망이었다.
속된 말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김영하는 착착 잘 팔리는 책을 쓰는 작가였고, 말 빨 좋은 교수였고, 대충 분위기 맞춰주면 꼬박꼬박 넘치는 월급 들어오는 라디오 진행자였다. 그는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고 오랫동안 정착민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 안의 ‘어린 예술가’를 찾으려고 집을 팔고 짐을 모두 창고에 보관시키고 달랑 가방 몇 개 들고 이탈리아로, 캐나다로 떠난 것이다. 이 책은 그 중에서 시칠리아를 여행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새로운 여행의 설렘에 재를 뿌리는 칙칙한 날씨, 철도 파업으로 기차는 언제 떠날지도 모르고, 큰 소리로 장담만 해대는 이탈리아 사람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도착한 시칠리아... 그곳의 일상을 사는 사람들, 축복 받은 날씨, 역사의 뒤안길까지 느껴지는 골목길, 지친 작가는 다시 글을 쓰고 다른 일상, 다른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천지창조>를 두 번 보았다. 가슴 벅참과는 다르게 목이 부러질 뻔했었다. 그런데 김영하의 이야기를 읽다가 아예 바닥에 드러눕는 그런 생각을 난 왜 못했을까 후회가 됐다. 물론 그의 추측이었지만. 예전에 <사라고사의 편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시라쿠사 대목이 유난히 내 시선을 끌었다.
아무튼 이 책은 김영하가 하는 특별한 여행기이다. 그들과 함께하다 보면 그가 들려주는 신화와 전설, 역사와 문학 이야기에 조금씩 빠져들고(간혹은 좀 지루할 때도 있다), 김영하의 시선으로 잡아낸 많은 풍광과 곳곳의 모습이 어떤 땐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어떤 땐 아름다움이 넘치고 또 어떤 땐 쓸쓸함이 느껴질 정도로 고적하다. 은밀히 기대했던 것처럼 그의 내밀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있는 그대로, 작가로서,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차분히 그려준 여행기였다.
“편안한 집과 익숙한 일상에서 나는 삶과 정면으로 맞장 뜨는 야성을 잊어버렸다. 의외성을 즐기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어버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나날들에서 평화를 느끼며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려” 그는 떠났고 이제 어디론가 다시 흘러간다. 이탈리아의 속담을 새기면서 말이다.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은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그래서 결론은 곧,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