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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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문학 기행을 갔을 때, 은희경 작가와 황석영 작가와 함께 나와 사회를 봤던 작가가 바로 백가흠 작가였다. 느리고 어눌한 말솜씨가 의외로(!) 남자다워, 여성스러운 은희경 작가와는 무척 잘 어울렸는데, 성질 급한 황석영 작가에겐 구박을 받기도 해서 억울해했던 작가, 정말 착해 보이는 멋진(외모도!) 작가였다. 그런 자리에서도 후배를 추켜 세워주려는 은희경 작가는 사회를 보던 백가흠 작가와 윤성희 작가를 배려했었다. 그래서 호감을 갖게 된 작가였다.

그.런.데. 그 작품들이라니. 하나같이 어둡고 암울하고 변태스럽고… 기가 막혔다. 예전 작품들에 비해 그나마 이 작품집이 많이 착해진 거라고 하니 이 또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역시 작가의 겉모습과 속은 다른 것인가 보다. 아무튼 읽는 내내 불편했고 마음 한 구석이 괜히 찔렸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인간 누구나 갖고 있지만 교육이나 예절 또는 위선의 가면으로 가리는 인간 내면의 가장 저급하고 저질스러운 심성을 제일 잘 그리는 김기덕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렇.다.고. 작품들이 별로였느냐? 그건 아니었다. 작품들은 한 쪽에 치우치긴 했지만 나름대로 우리 일상을 모두 특색 있고, 새롭고, 자연스럽게 잘 그리고 있었다. 백가흠이 그린 세상이 아무리 음울하고 어둡다 할지라도 그것 또한 우리의 일상이고 세상일 터이니까. 평화롭고 조용하고 행복해 보이는 삶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아니 우리가 보기를 거부하는 괴롭고 고통스럽고 외로운 세상, 바로 그 세상을 그리는 작품집이다. 역설적으로 그런 세상을 힘겹고 고독하고 우울하게 사는 이들을 밝은 빛으로 끌어낸 백가흠이야말로 진정 착한 작가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집엔 <장밋빗 발톱>, <웰컴, 베이비!>, <웰컴, 마미>, <매일 기다려>, <조대리의 트렁크>, <로망의 법칙>, <루시의 연인>, <사랑의 후방낙법>과 <굿바이 투 로맨스> 등 모두 9편의 작품이 들어있다.

제일 마음에 든 건 타이틀로 잡힌 <조대리의 트렁크>였다. 저 대리가 생각했던 그 대리가 아니고 트렁크도 그 트렁크가 아니어서 배신을 당한 순간, 버럭~! 했지만 예상을 뒤엎는 감각 또한 작가의 능력일 터였다. 왜 제일 마음에 들었느냐 하면, 그건 꿀꿀한 인생의 긍정적인 측면 때문이었다. 그래, 내 인생이 남들 보기엔 별 거 아니지만 적어도 트렁크 안에 든 노인을 업고 갈 힘은 있지 않아? 그럼, 된 거다. “조대리는 노인을 업고 집으로 뛰기 시작한다. 뛰면서 자기 엄마보다도 더 가벼운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근데 ‘삘구’는 무슨 뜻일까? 바보란 뜻인가?

어이없는 상술에 걸리기도 하고 남의 목욕 장면을 애타게 훔쳐보는 <장밋빛 발톱>은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간만에 ‘너구리’를 먹고 싶었다. 헤어진 옛 연인이 다 용서했다고 하자, 이 남자는 생각한다. ‘무엇을 용서한 것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뭘 얼마나 그녀에게 몹쓸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좋은 추억이고, 나쁜 기억이고 다 잊어 가물거렸다.’ 역시 남자란…

<웰컴 베이비>에선 신선한 말투와 그런 말투를 뱉게하는 사고를 가진 임산부 아내가 아주 맘에 들었다. “뭔 일이시대? (...) 모르셔요, 나도. (...) 아이, 시방 짜증나셔. (...) 개자식님, 꼭 이런 일은 날 시키셔요.” 돼먹지 못한 존대가 왜 그렇게 웃기던지. 퇴락한 여관의 미스터 홍의 인간적인 모습엔 마음이 찡해지기도 한다.

<웰컴, 마미>는 이 작품집 가운데 제일 끔찍한 작품이었다. 비틀린 세상에 비틀린 사람들, 비틀린 짐승까지.

<매일 기다려>는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이 인간을 얼마나 약하게 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노인은 서운하고 아쉬워서 주책없이 흐르려는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 노인은 리어카를 끌고 뛰다시피 골목을 내려갔다. 따뜻한 날씨가 고마웠다. 전철역도 있고 지하도도 있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노인의 집은 여전히 많았다.”

<로망의 법칙>에서 작가가 가르쳐주는 건 바로 이거다. “넌 어때?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화를 이루고 투쟁에서 승리한 기분이. 승리? 그게 왜 나의 승리냐. 나 그런 거 바란 적 없다. 니가 오해한 거지. 그건 순전히 다른 사람들의 몫이지. 내 것이 아냐. 진정으로 그런 것을 갈망한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다… 로망이었던 거지. 로망은 현실이 되면 물거품이 되잖아. 로망의 법칙인 거지.”

<루시의 연인>은… 정말 할 말 없다. 다만 해병대 간 조카 녀석이 무지 걱정되었다. 에휴~

<사랑의 낙법>에선 나이에 관한 글귀 하나만 기억하고 넘어간다. “유진은 올해 서른살이다. 운동선수에게 서른살은 치명적인 나이이지만 여자에겐 아직도 많은 것이 아름다운 나이이다.”

<굿바이 투 로맨스>는 읽으면서 제일 짜증났던 작품이다. 이게 말이 되냐구요? 여자 둘이 한 남자에게 붙잡혀서 쎅스를 당하고 사랑(쳇!)을 당해야 하냐구요? 책을 읽으면서 살의를 느껴보기도 처음인 것 같다. 맹렬히 불타오르는 살의였다. 그거, 사랑이라고 포장할 생각 마시길. 게다가 두 여자의 주변부는 전혀 설명이 되지 못한 것도 흠이었다.  

하.지.만 이제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하고 백가흠의 전작들을 만나러 가야겠다. 그의 다음 작품이 조금만 더 착해지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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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10-04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럼 이 작가의 책이 더 착해질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ㅎㅎㅎ

진달래 2007-10-10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뇨... 이 책도 괜찮아요. 제가 괜히 엄살을 부린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