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한양출판 / 1991년 8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언급된 어느 글을 읽고 새삼스레 이 책을 떠올렸으나 도무지 책 내용의 어느 한 조각 뚜렷하게 기억나는 게 없었다. 기껏 '나'와 '쥐'가 등장하고 j's 바가 등장하며, '바람 방향이란 건 바뀌는 거야.' 따위의 알 수없는 의미의 문장 정도말고는 줄거리도 생각나지 않았다. 91년 초판 1쇄 발행, 94년 초판 6쇄 발행이라는 판권이 붙은, 활자도 낯설어진 책을 다시 손에 쥐어들고 읽었다. 책을 읽으며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왜 머릿속에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었는지. 뼈대가 남아 있을 수 없는, 이 책은 그런 이야기였다. 장면은 조각조각 나뉘고 이야기는 알 수없는 방향으로 전개되며 '나'와 '쥐'를 비롯한 사람들은 먼 바다의 수평선이나 바의 테이블 한 모서리를 응시하며 웅얼웅얼 이야기한다. 때론 제멋대로 on, off를 하고 생각하는 것의 반밖에 입밖에 내지 않으리라 결심하는, 그들이 하는 말은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보고 할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 내뱉는 말들이고 우연히 맞은편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이고, 그래서 널을 뛰는 머릿속의 생각처럼 장면들은 정신없고 이야기는 두서없다.
1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것이 조금 낯설다.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음에도, 이 책을 처음 읽었던 10년 전의 나에 대한 기억은 꽤나 선명하다. 아마도 그런 나이, 그런 시대였던 거다.
'단편적 구성, 짧은 문장, 스피드감, 경쾌한 대화, 미국적 풍속, 안티리얼리즘적 묘사, 자기 내면에 대한 off, 수많은 정보와 비유의 나열로 이루어진 새로운 개념의 도시문학'. 지금 보면 다분히 촌스럽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책 표지의 소개글에서 그 시절 '포스트모던'이라는 광풍이 주변을 온통 흔들어놨던 당시를 고스란히 되살리고 있다. 그때 이 책을 읽은 나는 아마도 얼치기 같이 그런 것들을 내것으로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사는 것의 곤란함에 비한다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십대 때였던가, 나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리고 일주일 정도 말을 못할 정도로 놀랐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세상은 나의 뜻대로 되고, 모든 가치는 전환되고, 시간은 흐름을 바꾼다... 그런 느낌조차 들었다.
그것이 함정이라고 깨달은 것은, 불행하게도 훨씬 뒤의 일이었다. 나는 노트 한가운데에 한 줄의 줄을 긋고, 왼쪽에 그간 얻은 것을 쓰고, 오른쪽에 상실한 것을 썼다. 상실한 것, 짓밟은 것, 훨씬 전에 포기해버린 것, 희생한 것, 배반한 것...... 나는 그것을 마지막까지 쓸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읽고 나자 몹시 가슴이 아팠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원하고 찾느라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허우적거리던 10년 어린 나의 조각이 아직도 몸 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야속한 반가움에 또다시 가슴이 아파 왔다.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끼겠다는 어린 조카에게 렌즈를 단념시키려 설득하는 나는, 그래도 가끔은 뭉긋한 통증을 명치끝에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감각은 살아있는 인간이었던 거다. 
얼치기의 나이를 좌충우돌 갈망의 시간을 살다가, 존재 자체도 깡그리 잊고 다시 10년쯤 더 살다가, 어느날 문득 '바람 방향이란 건 바뀌는 거야' 라는 문장을 끄집어내고는 체념의 응어리를 치유받는, 이 책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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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ntomlady 2005-08-1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을 쓰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기도 하다. 사는 것의 곤란함에 비한다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기 때문이다.
---> 멋진 말이예요 ^^

superfrog 2005-08-15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스노드랍님..(님도 즐거운 작업을 하고 계시죠?^^)
상실한 것, 짓밟은 것, 훨씬 전에 포기해버린 것, 희생한 것, 배반한 것.. 이런 것들을 떠올리는 건 가슴아픈 일이에요.

hanicare 2005-08-15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의 나는 지나갔죠? 지금의 나는 그런 흔적이고.
이 성복의 싯귀처럼 물에 젖은 종이가 말라버리듯이.
제대로 가져본 적조차 없는데 이 상실감은 무엇인지.

superfrog 2005-08-15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흐릿한 흔적이 가끔 예기치 못한 것들 덕분(?)에 불쑥 어디에선가 나타납니다.
그럴 때는 반갑고도 난감해요. *&##%^*%#(@ 이렇게요.^^;;
아마도 상실했다 착각하면서 한 평생 아련하게 그리워하면서 사는 게 아닐까 싶어요.

2005-08-15 1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8-15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경과 렌즈의 차이가 없을 줄 알았어요. 편리함과 그 반대의 것. 그것 말고는.
지금 내 안에 부는 바람이, 다시 점검한다고 해도 바뀌지 않으면 어떡해하나... 상실한 것 만큼 소유를 원하고 있는 건 분명해요...

superfrog 2005-08-1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 단락 참 아련하고 가슴아프지요..? 저는 그랬어요. 한밤에 스탠드 아래에 누워 책을 읽다가 왈칵했어요. 바람 방향이야 바뀌는 거고 우리는 그 바람에 떠밀리기도, 맞서기도, 편하게 몸을 맡기기도, 멈추기를 기다리기도 해야겠지요..

2005-08-16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08-16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햐, 멋진 표현입니다..! 소소하지만 정겹고 그리운 즐거움,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이 작품이 님을 잡아끌어도 이 책은 사지 마세요..(앗, 쓰고 나니 절판이네요..^^;;) 비문도 좀 있고 오류도 있고 좀 그래요.ㅎㅎ 읽는 저도 근간으로 다시 장만할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죠..

미완성 2005-08-1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제가 왜 이 리뷰를 놓쳤단 말입니까; 아, 광복절날 놀러다니느라 못봤던 건가 이런이런..전 이제 더 이상 하루키는 읽지 않습니다만, 금붕어님 리뷰를 보고 나니 괜스레 제가 놓친 것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 약간 찜찜해집니다. 체념의 응어리를 치유받는 책, 이라는 말을 듣고 그 누가 한 번 펼쳐보고 싶은 근질근질한 욕구를 참을 수 있겠어요.

nemuko 2005-08-1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의 소설 중 전 이 글이 젤 맘에 들었답니다. 지나고 보면 쓸데없고 부질없는 삶의 기억들. 굳이 남겨두지 않아도, 기억해 두지 않아도 좋을 이야기들. 하지만 그 시절엔 피할 수 없이 아프기만 했던 시간들.... 대충 이런 느낌이었어요. 제가 가진 책은 문학사상사의 책인데 그 책은 나쁘지 않았답니다.
글구 보내주시는 것도 황송한데 늦다고 미안하실 필요는 절대 없구말구요^^ 근데 금붕어님. 사진은 야사님 사진 보고 나니 너무 깨갱이라 도무지 올릴 엄두를 못내겠어요 ㅠ.ㅜ

superfrog 2005-08-19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멍든님, 흐흐.. 참으시고 할일을 마저 하세욧!;;
네무코님, 지금보다는 촉수가 예민할 때 읽은 책이니 저도 애착이 많아요.(그래도 하나를 꼽으라면 전 세계의 끝과.. 양을 쫓는 모험, 그리고 단편집들..^^) 다시 읽으니 또 그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아요. 쥐가 왜 그렇게 절망했는지, '나'가 찾으려는 것은 무엇인지.. 이런 생각들.. 오늘같은 날씨랑도 잘 맞아떨어지네요..(사실 저 리뷰는 읽다가 말고 쓴 거고요, 지금 막 마지막 장을 넘겼어요..;;;) 다 읽고 나니 제대로 번역된 잘 만든 책이 갖고 싶어지네요. 문학사상사 판으로 새로 구입할까봐요.
글고, 엄살 부리지 마시고ㅎㅎ, 사진 올려주세요..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