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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ㅣ 어른을 위한 동화 11
이상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0월
평점 :
이상희의 시집을 처음 읽었던 때 아마도 나는 갓 스물이었던 것 같다. 그 시집의 제목은 <잘 가라 내 청춘>이었고, 80페이지 내외의, 두께가 그리 크지 않은 시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야 워낙에 시집을 과잉 섭취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일주일에 너덧 권을 읽기도 하던 내게 그 시집은 그저 민음사의 시집이란 이유만으로도 손 끝에 걸려들기에 충분했었으리라. 하지만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면, 뭔가 끌림은 있었다. 이를테면 작고 조그마한 목소리지만, 그 뜻이 분명한, 감상성을 배재하려는 의지가 거기엔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에 근 10년이 지나서 그녀는 두 번째 시집을 냈었다. <벼락무늬>. 여전히 얇았다. 그리고 말수는 더욱 줄어 20행을 넘는 시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첫 시집 때에 비해 좀더 메마르고 냉랭한 시선을 갖고 사물을 보고 있으되, 그 안팎엔 넘치는 수사(修辭)도, 과잉된 이미지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좀 별난 시인이다. 첫 시집도 두 번째 시집도 꼭 집어서 여성적이다 혹은 여성만이 쓸 수 있는 시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그래서 그 시들을 중심으로 그녀만의 경험과 그 해석, 지향 등을 읽어낼 수 있는-작품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80년대를 가로질렀던 앞세대들의 여전사(?)들이 보여준 '여성 찾기'의 흔적도 거치지 않은 채-첫 시집을 낼 당시에도 여전히, 또는 새로이 가세한 후배 시인들까지 합쳐서 더욱 큰 '주류'를 형성했던 바로 그 시들의 테마들 말이다-90년대로 진입한 불완전한 여성의 시다,라고 정의하기에도 그녀의 시는 꼬리표를 거부하는 듯 보였다. 그러므로, 무위와 탄식 속에 조용히 숨쉬며 사물의 깊이를 가늠하는 그녀의 시들은, 마치 나이 많은 시계공이 돋보기를 쓰고 최신 유행 시계를 고치는 모습만큼이나 역설적이었고, 한편 자연스러웠다.
그런 그녀가 언제부턴가 동화를 쓰고 있었다. <외딴 집의 꿩 손님> <토마토 씨앗> 등이 그녀의 작품이란다. 동화. 국어사전을 펼치니 '어린이에게 들려주거나 읽히기 위해 지은 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 다룰 책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시리즈로 나온 것으로 20대 초반까지도 그 독자로 염두에 두었나 보다.
<깡통>은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한 사내가 죽어 깡통으로 다시 태어나서 한 고아 소년을 알게 되고, 그 아이와 함께 삶을 새로이 살아보려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삶의 신비와 희망을 심어준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깡통>은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김세현 화가의 그림과 더불어 시와 산문의 경계를 넘기도 하고, 긋기도 하는 이상희의 글이 어우러진 한 장의 풍경화에 다름아니다. 그 풍경은 가슴을 아리게도 하지만, 부드럽고 따듯한 바람이 볼을 스칠 때처럼 마음을 조용히 위로해준다. 특히 내게 <깡통>이 좋았던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도되었던, 그래서 아내와 아이를 잃고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깡통'이 새로운 생애를 통해 삶의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게 되었음에도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는 시선을 여전히, 혹은 더욱 삶에 '밀착'하여 갖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였다. 그것은... 삶이 지향하고 숨쉬는 것은 변함없음을 알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봄은, 어제까지가 겨울이었음을 깨닫는 때...
-108쪽
내 마음은 늘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찾아다니며 삶에 대해 투덜대길 멈추지 않는다. <깡통>을 읽던 때도 그랬다. 하지만 위에 옮겨 적은 구절을 읽는 순간 내 입은 조용해졌으며, 동화든 시든 소설이든 아무 상관없다는 듯 투명한 눈으로 나머지 페이지를 넘겨 갈 수 있었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글은 그 어디에 비할 수 없이 뭉클한 것... 그러고 보면 그것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이 나이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