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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평점 :
이성복의 첫 시집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십수 년 전 고등학생 시절, 주말이며 순례처럼 나가던 광화문행(行)이 함께 떠오른다. 그다지 조숙한 편도 아니었고 다만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주말이면 교보문고와 종로서적에 들러 너무도 모르는 많은 저자들의 책에 눈 부셔하며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나중에 시집에 수록되지 못한 <막장에서>란 시를 <한국인>(주로 지하철에 비치되어 있던)이란 잡지에서 읽고 '감동'을 받아 그의 시집을 찾게 된 것이 이성복과의 첫 만남이었다. (내 경우만 이럴까 싶긴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작은'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좋은 글, 좋은 문화에 대한 감식안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작은' 잡지를 만드는 이들이여, 부디...)
그 당시 서점에는 그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까지 출간되어 나와 있었는데, 당시의 생각에도 한 작가나 시인을 알려면 그의 데뷔작을 읽어야 한다는 지론(?)이 있어서 그의 첫 시집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의 머리로는 감당할 수 없는 돌연한 이미지들과 시어들에 당황하고 두려워하는가 하면, 그러면서도 삶의 어두운 그늘을 환히 보여주는 것 같은 희열에 몸을 떨기도 했었다. (한 권의 시집이 안겨주는 그 두려움과 희열을 이제는 자주 느끼지 못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 그렇게 돌리기에는 그러나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최승자, 황동규, 김수영, 신동엽, 천상병, 김정환, 배창환, 정호승 등으로 이어진 섭렵(?) 시인의 계보에 이성복이 추가되었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들의 이름을 뒤로하고 그의 시편들을 껴안고 살게 만들었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의 초기 시, 특히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부'이다. 질서의 거부, 가치관의 거부, 역사의 거부, 거부, 거부, 거부...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눈 감고 아웅하기' 같은 퇴행적인 행동 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 거부는 두 번째 시집에 이르러 집약적 표현인 '치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거부하고, 아파하는 그의 시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게 되는 건 강한 부정과 저항 속에서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찾아낸 삶에 대한 따스한 긍정의 시선 때문이다.
거기서 너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모래내·1978년>에서
모순덩어리 삶 곳곳에 놓인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비참함을 감당하는 것도 가슴이지만,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도 또한 가슴이다. 비루할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을 끌어안고 싸우는 이성복의 시편들은 그러한 가슴이 가진 떨림과 아픔을 보여준다. 마치 겨울 아침 창호지에 비쳐 드는 빛처럼 고요하게 보여준다, 따스하게 보여준다. 잘게 부서져 아픔마저 삼켜버린 빛처럼 말이다. 그의 시를 통해 마주하는 삶은, 그래서 비루함만도 치욕만도 아니다. 비록 '대답하지 못'하고 살지만, 고통을 견디고 희망을 일구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