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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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는 일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흔히 말해지듯 그가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지적이고 세밀하게 삶의 우연성과 비루함을 빼어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는 <거대한 괴물>은 잘 나가던 한 작가가 어찌어찌 삶의 행로를 벗어나게 되고,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뜻하지 않게 다른 이의 삶을 살게 된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 과정은 너무도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우연성'에 기대어 있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면 삶의 조건 안에 숨어 있는 다양한 '불확실성' 중 하나를 택한 것이기도 하다.

<거대한 괴물>을 통해 폴 오스터는 세밀한 삶의 묘사를 담은 사실주의와 거대 권력 속 개인의 발견이라는 모더니즘, 두 양극을 봐란듯이 합쳐놓는데 그 붙여놓은 자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매끈하다. 아울러 두 양극이 한번도 도달하지 못한, 현대의 삶이 가진 불확실성과 부유할 수밖에 없는 삶의 의미를 포착하고 있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이 규정되는 것이 자아라고는 하지만, 폴 오스터에 따르자면, 그 역시 하나의 허상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는 없고, 오직 '부유하는 의미'만 있을 뿐인 것이다.

다르게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폴 오스터의 소설을 읽는 일은 아주 난감한 일이다. 그의 소설들이 커다란 주제를 무거운 방식으로 던져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소설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시각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날렵하고 재치 있는 문체의 힘을 받아 재미있게 그려지고 있다.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그의 소설을 접하더라도 이야기 자체의 재미가 충분하다. 대화 역시 살아 있고.

난감하다는 것은 소설을 읽고 난 뒤의 여운 때문이다.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특히 <거대한 괴물>을 읽고 나면, 한 사람의 작은 세계가 어떻게 거대한 권력(또는 삶의 불확실한 우연성) 속에서 어긋나고 일그러지는지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 이 과정은 곧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난감하고 두려운 것이다.

미스터리나 탐정소설의 얼개를 즐겨 작품에 응용해온 폴 오스터. 이 작품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읽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과 흥미로운 사건들을 교직하는 솜씨가 놀랍기만 하다. 거기에 소설을 끝낼 즈음에야 완벽하게 그려지는 주인공 벤저민 삭스의 모습은 불확실성에 매달린 한 사내의 열정과 일그러진 삶의 궤적을 드러내며, 미국인의 초상으로 다가온다. 그 초상은 쓸쓸하고 돌아갈 곳 없는 부랑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 오랜 옛날의 율리시즈를 닮은 것처럼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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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철도의 밤 - 미야자와 겐지 걸작선
미야자와 겐지 지음, 이선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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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대표하는 동화 작가이자 시인인 미야자와 겐지는 생전에 일본 동북부 이와테 현에 칩거하며 두 권의 책만을 출간했다. 시집인 <봄과 아수라>와 동화집 <주문이 많은 요리점>이 그것이다.

겐지는 시집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농촌의 풍경과 삶을 간결하고 처연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개인의 왜소함을 자연의 웅대함과 대비시켜 고독자로서의 특성을 아름답게 형상화하고 있다. 생전에 문단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력만큼이나 시세계 역시 단절과 고독의 메아리가 조용히 울려나오고 있는데, 순수한 몰입과 자연과의 소통을 표현하는 탁월한 이미지들이 여운을 오래 남긴다.

<은하철도의 밤>은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집 중 대표작들을 추려낸 것으로서 나중에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은하철도 999>의 모태가 되기도 한 표제작 <은하철도의 밤>, 각각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주문이 많은 요리점> <첼로 연주자 고슈>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싣고 있다.

그의 동화세계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띠고 있는데, 하나는 '자연과 소통하는 진정한 자아의 발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은하철도의 밤> <첼로 연주자 고슈> <쏙독새의 별> 등 겐지의 대표작들을 이 계열로 꼽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소시민적 특성의 주인공의 좌절과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똘배> <마음 착한 화산탄> 등 나머지 동화들을 이 계열로 볼 수 있다.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쏙독새의 별>은 못생긴 쏙독새가 따돌림의 비애를 딛고 승천하여 별이 된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구도와 사력에 정진하는 쏙독새를 통해 생명의 절정과 영원에의 갈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대부분의 작품들에 영감을 제공한 <첼로 연주자 고슈>는 한 무능한 첼로 연주자가 뻐꾸기, 너구리 등과 교감하면서 자신의 연주 실력을 키우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예술의 존재 의의와 핵심을 자연과의 소통으로 삼았던 겐지의 대표작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밤하늘의 별과 가슴속 별은 분명 다르지만 그 빛은 같은 의미로 빛날 수 있다. 마루아먀 겐지의 동화들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도, 더 자란 성인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할 수 있는 깊이 있고 아름다운 빛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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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스 - 디지털 시대의 엘리트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형선호 옮김 / 동방미디어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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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는 '보보(Bobo)'란 부르주아(Bourgeois)와 보헤미안(Bohemian)의 머릿글자를 따 지은 조어로서, 말 그대로 보헤미안적 기질을 지닌 부르주아들을 일컫는다. 핵심적인 내용은 현재의 엘리트들은 유산 등으로 현재의 지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교육받고 노력하여 '새로운 엘리트' 계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높은 보수를 받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반면, 소프트웨어 개발자나 유명 카운셀러처럼 창의적이고 사회적인 기여도가 높다. 또한 그들은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환경을) 보호하는 등 경제면이나 의식면에서 '통합'을 위해 애쓰게 되는데, 그것은 기존의 엘리트들이 보수 일변도였던 상황과 달리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가치를 흡수한 결과라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라는 의문 뒤에 '이 책은 문제적인 책이다'라는 생각이 곧 뒤따른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책이 최근의 자본주의의 흐름을 과장하고 지식인의 의미를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받고 성공한 엘리트 계층이 보헤미안적 요소를 흡수해 새로운 문화를 유행시키고 있다는 기본 명제는 미국의 특정 지식인들의 주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거기에 60년대의 자유주의가 90년대 이후 보수주의에 '긍정적으로' 흡수되었다거나, '보보'들은 창조적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온건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등 사회적인 순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주장들은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지식의 상업화'를 듣기 좋은 말로 치환한 것에 다름아니다.

둘째, 미국의 다양한 계층만큼이나 보보들이 포괄하는 영역이 다양해서 그들을 한 묶음으로 묶는 것 역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교육받은 엘리트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인기 작가를 어떻게 같은 그룹으로 볼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같은 장소에서 다른 주제로 세미나를 연다고 해도 말이다.

셋째, 경제, 특히 소비를 주축으로 삶의 구조를 보는 시각을 모든 사항에 들이댐으로써 이 책은 보보들의 삶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경제에 집중(혹은 한정)되고 있다는 주장을 낳고 만다. 보헤미안의 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굳이 구식 잔디깎이를 구입하고, 교외에 나갈 때 에베레스트에서나 입는 파카를 걸친다는 등의 진술은 과장이라기보다 소비 자체에 대한 저자의 의식이 아주 저열한 것임을 드러낸다.

다만 이 책은, 보보라 부르든 그렇지 않든 미국의 현재의 지식인들이 과거 미국의 이상이 부과하는 책무로부터 자유로워졌다든지, 삶의 질을 중시하는 태도 때문에 일상적인 물건을 사는 데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든지 하는 등 '새로운 모습'(트렌드라 불러도 되리라)을 보이고 있는 것을 흥미롭게 포착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의 등장에 관한 부분과 보보들의 소비 성향에 관한 부분은 눈여겨봐둘 만하다).

한국 사회에는 아직 보보라고 부를 만한 계층이 그렇게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 규모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낡은 정치, 경제 구조 자체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최근 일고 있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 90년대 초 만연했던 중산층 의식의 부활, 과소비의 체질화 등은 보보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경제를 이야기의 중심, 삶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 분위기가 사회 안팎에서 강해지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경제 중심'의 돋보기로 지식인 계층을 들여다보게 한다(특히 미국의). 하지만, 그 돋보기는 굴절률이 제법 있어서 조심해서 보지 않으면 돋보기 없이 보는 것만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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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구나무 과학 문지푸른책 밝은눈 1
전용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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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 어떤 영역의 대상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계통적으로 연구하는 활동, 또는 그 성과의 내용. 특히, 자연과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음.

세상에는 참 많은 일들이 있다. 일상적인 일과 전문적인 일, 또는 알 수 있는 일과 알 수 없는 일, 또는 내 일과 남의 일... 그 구분에 따라 많은 사물과 현상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많은 사물과 현상이 왜 이러나는지 알고자 하고, 실제로도 상당히 알아내었다. 철학·문학·심리학·물리학·화학·유전공학 등등 학문 대부분이 그러한 '알고자 하는 욕구'에 기초하고 있으며, 오늘도 인간과 삶, 우주와 생명 등등 모든 사물과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해, 좀더 나은 미래와 행복을 찾기 위해 인류는 분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초읽기에 들어간 인간 '게놈' 지도 완성은 그러한 '알고자 하는 욕구'의 한 절정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자연현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해소해주는 일종의 '과학 에세이'이다. '자연과학'의 눈으로 본 생활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과학자의 눈으로 엄격하게 보고 쓴 것이 아니고 과학자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이가 썼다는 점이다.

엄마 손이 약손인 까닭, 아이들을 오줌싸게 만드는 도깨비불의 정체, 초상화들이 대개 왼쪽인 이유, 동물들이 경칩날을 아는 이유, 솔잎 송편에 관한 따뜻한 관습 등등 일상생활에서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했을 법한 현상들에 대해 친절하고 흥미롭게 쓰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재미는 인문학이나 문학 등에서 적절한 비유나 사례를 찾아내 과학적 사실과 비교하거나 수정하는 등 '분야와 시각을 넘나드는' 과학적 교양을 주고 있는 데 있다. 읽는 맛도 나고, 글 전체를 매끄럽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과학과 일상과의 거리를 다양하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중고등학생들이 읽으면 좋을 듯하고, <동물의 세계>를 가끔 볼 정도의 취향을 가진 독자라면 누구나 보기에 괜찮을 듯싶다. 머리도 식히면서 재미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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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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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의 첫 시집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 십수 년 전 고등학생 시절, 주말이며 순례처럼 나가던 광화문행(行)이 함께 떠오른다. 그다지 조숙한 편도 아니었고 다만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은 주말이면 교보문고와 종로서적에 들러 너무도 모르는 많은 저자들의 책에 눈 부셔하며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 나중에 시집에 수록되지 못한 <막장에서>란 시를 <한국인>(주로 지하철에 비치되어 있던)이란 잡지에서 읽고 '감동'을 받아 그의 시집을 찾게 된 것이 이성복과의 첫 만남이었다. (내 경우만 이럴까 싶긴 하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작은'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좋은 글, 좋은 문화에 대한 감식안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작은' 잡지를 만드는 이들이여, 부디...)

그 당시 서점에는 그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까지 출간되어 나와 있었는데, 당시의 생각에도 한 작가나 시인을 알려면 그의 데뷔작을 읽어야 한다는 지론(?)이 있어서 그의 첫 시집인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집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생의 머리로는 감당할 수 없는 돌연한 이미지들과 시어들에 당황하고 두려워하는가 하면, 그러면서도 삶의 어두운 그늘을 환히 보여주는 것 같은 희열에 몸을 떨기도 했었다. (한 권의 시집이 안겨주는 그 두려움과 희열을 이제는 자주 느끼지 못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탓으로 돌려야 할까. 그렇게 돌리기에는 그러나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최승자, 황동규, 김수영, 신동엽, 천상병, 김정환, 배창환, 정호승 등으로 이어진 섭렵(?) 시인의 계보에 이성복이 추가되었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들의 이름을 뒤로하고 그의 시편들을 껴안고 살게 만들었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의 초기 시, 특히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거부'이다. 질서의 거부, 가치관의 거부, 역사의 거부, 거부, 거부, 거부...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눈 감고 아웅하기' 같은 퇴행적인 행동 속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 거부는 두 번째 시집에 이르러 집약적 표현인 '치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거부하고, 아파하는 그의 시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게 되는 건 강한 부정과 저항 속에서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찾아낸 삶에 대한 따스한 긍정의 시선 때문이다.

거기서 너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모래내·1978년>에서

모순덩어리 삶 곳곳에 놓인 차마 바라볼 수 없는 비참함을 감당하는 것도 가슴이지만,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것도 또한 가슴이다. 비루할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을 끌어안고 싸우는 이성복의 시편들은 그러한 가슴이 가진 떨림과 아픔을 보여준다. 마치 겨울 아침 창호지에 비쳐 드는 빛처럼 고요하게 보여준다, 따스하게 보여준다. 잘게 부서져 아픔마저 삼켜버린 빛처럼 말이다. 그의 시를 통해 마주하는 삶은, 그래서 비루함만도 치욕만도 아니다. 비록 '대답하지 못'하고 살지만, 고통을 견디고 희망을 일구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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