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폴 오스터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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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는 <거대한 괴물> <뉴욕 삼부작> 등을 쓴 소설가이지만, <스모크> 등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웨인 왕이 감독한 이 영화는 1996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썩 괜찮은 영화이다. 아마도 이 무렵부터 국내에 폴 오스터가 알려지고 그 다음해인가부터 그의 책들이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폴 오스터의 짧은 단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그리고 영화 <스모크> <블루 인 더 페이스>의 시나리오를 묶은 이 책은 그 외에도 폴 오스터와의 인터뷰, 두 영화에 대한 제작 노트 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나는 사실 그의 시나리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보통 관계의 우연한 얽힘과 예상치 않은 결말을 즐겨 사용하는 데 비해 시나리오는 결말이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정서적으로는 좀더 능청스럽고 한편 푸근하게 느껴졌다는 점을 고백해야 할 듯하다. 아마도 영화의 특성상 절제되고 흥미로운 단어들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리라. 특히 <스모크>는 몇 번씩 대사를 되새김질하게 만들곤 했다(말이 근사해서가 아니라 앞뒤를 잇는 절묘함 때문에).

<스모크>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개봉 당시 보았던 영화의 기억들이 속속 되살아났는데, 그때와 달리 벤저민의 고통과 고독보다 오기의 다소 천박한 듯하지만 꿋꿋한 열정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인생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스스로 택하고 받아들인 자의, 발 딛고 선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책임, 버릇처럼 내뱉는 욕설 뒤에 숨은 따스한 시선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폴 오스터의 지적대로 오기 역시 고귀한 내면을 가진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오기의 그러한 일상적인 삶, 인간의 본연적인 모습이 생의 바탕임을 오스터는 천천히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좋은 것은 드물고, 그마저도 연기처럼 사라지기 쉬운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간다. 폴 오스터가 있어 잠시, 눈을 찔러오는 세상의 모든 소음에서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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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 시공아트 9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 시공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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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혹은 남아메리카)라는 말을 들으면, 그곳은 이 세상 끝, 아주 먼 곳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프리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떨 때는 그곳이 북극이나 남극처럼,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땅처럼 여겨진다. 그곳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은 격동의 20세기를 살아낸 남아메리카 미술을 연대기순으로 개관하고 있는 입문서이다. 20세기 초, 서구 열강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 국가를 세우고, 20세기 중반 군사 독재에 신음하던 남아메리카의 역사를 배경으로 거대한 벽화처럼 미술사가 펼쳐진다.

흔히 남아메리카 미술의 특징을 그들의 독자적인 전통-주술, 신비주의, 다혈질적 기질-이나 사회주의 미술 운동-벽화, 판화, 거친 콜라주-에서 찾고는 한다. 크게 틀리지 않는 것이 남아메리카의 대표 작품이다라는 꼬리표가 달린 것들은 하나같이 그러한 성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었다. 그것은 '남아메리카 미술은 서구 전통이 연장된 것이다.'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그 무슨 식민주의 사관이냐 하는 반박이 내 안에서 이미 나오는 것 또한 사실인데, 이렇게 이야기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 또한 있다.

서구의 많은 미술가들, 이를테면 피카소나 마네, 반 고흐 등이 아프리카나 일본 등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제작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즉, 독자적인 서구의 미술 속에 외부의 영향을 녹여 넣은 것이다. 그러한 영향에 대해 제작 당시보다 작가의 사후(死後)에 더 많은 연구와 발표가 뒤따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에 와서 큐비즘의 원조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남아메리카 미술, 아니 그 너머 남아메리카의 예술을 대표하는 디에고 리베라나 멕시코 벽화 미술의 또 다른 영웅 호세 클레멘토 오로스코 등의 벽화를 보면 오랜 식민 생활이 뿌리를 내린 기독교의 전통이 고스란히 배어나오고 있다. 그것은 디에고 리베라의 <봉납>(1923∼28) 같은 작품에서 여실한데, 어두운 색채 속에 함께 모여 기도하는 군상들은 십자가 아래에서 '완벽한 조화'를 꿈꾸고 있다. 리베라의 <창조>(1922∼23) 역시 좌우 대칭의 구도 속에 천지창조의 드라마를 구현하고 있다(롤랑 조페 감독의 <미션>이란 영화가 있었다. 원주민들은 이구아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간 아마존 깊은 곳에 자신들을 위한 기독교 성지를 만든다. 비록 서구인에 의한 묘사였다고는 하지만 그 이상한 열기는 두렵기조차 한 것이었다).

거기에 1950년대 이후 불어닥친 초현실주의의 유행은 서구 리얼리티의 또 다른 개화를 보는 듯하다. 레메디오스 바로의 <조우(遭遇)>(1962)나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1940) 등은 막스 에른스트나 앙리 루소의 그림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서구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답습한 작품조차도 대상의 풍부한 볼륨이나 관능성으로 인해 초현실적 색채가 더욱 살아난다는 점이다.

이렇듯 남아메리카의 미술은 서구의 또 다른 얼굴처럼 내게는 다가온다.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소 늦게 나타났을 뿐,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모습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술에 무지한 자가 보고자 애쓰는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생각 역시 든다. 섬세한 영향과 그 극복의 역사를 짚어내기에는 내 눈이 아직 정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남아메리카의 미술이 세계 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인간의 고통과 희망, 역사와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막스 에른스트와 앙리 마티스가 보여도, 더 나아가 그것이 흔적에 그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남아메리카의 미술은 아름답다. 강하고 진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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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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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삶에 있어 심장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일종의 '마음의 숨쉬기'로서 관심과 애정, 희망과 노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흔히 젊은 시절을 두고 열정이 많을 때라고 하고, 나이가 들면 열정을 잃는다고 하는 것도 삶의 순간순간을 일구어내는 열정의 '힘'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열정처럼 무용한 게 또 있을까. 흔히 욕망의 온건한 이름이기 쉬운 열정은 그것이 과도하게 한 대상으로 향할 때 동경이나 사랑, 집착이나 파괴가 되기 쉽다. 열정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집착이 깊어져 파괴적인 경향을 띨 때일 것이다. 갖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 놓치고 싶지 않다... 이러한 집착은 사랑으로 승화되기보다는 일방적인 소유욕으로 그 독성을 드러낼 수 있다. 그것은 곧 대상과의 거리가 사라져 대상은 물론 자기 자신도 잊게 되기 일이기도 하다.

<단순한 열정>은 혼자 사는 중년 여자가 아내가 있는 한 남자와 불륜 관계를 가졌다가 헤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제는 너무 많이 다루어져서 어떤 감흥을 거기서 끌어낼 수 있을까 싶은데, 다행히도 아니 에르노는 짧은 분량(200매 정도)으로 감정의 과잉 없이 '단순한 열정'을 그려낸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기다리며 전화통을 바라보고,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도 말을 놓치기 일쑤인 여자에 대한 묘사나 남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틀어지지 않도록 자신은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겠다는 부질없는 다짐을 반복하는 것 들을 읽으면서 남자가 만약 아내가 있는 유부남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오래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자는 정말 남자를 사랑한 것일까 하는 의문도.

흔히들 남성과 여성의 사랑이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남성은 사랑 자체에 만족하므로 여자를 쉽게 바꾼다든지 여성은 사랑하는 대상이 중요하므로 한 남자만을 사랑한다든지 하는 말들 말이다. 이런 말들에 수긍하는 건 쉽지만, 모든 여자와 모든 남자는 그렇다는 식은 곤란하다. 이 소설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므로 더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소설을 읽어나가며 여자에게서 남자를 향한 사랑보다는 무분별한 자기애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는 것은 적어둬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열정>에서 여인이 그 누구보다 남자를 아끼고 사랑한 것은 느껴지지만, 그래서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고통,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불거진 외로움,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가장한 의식적인 통제가 너무도 가슴을 울리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여자가 철저히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는 역설 또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일이었다는 생각이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 기쁨과 편안함보다 갈등과 괴로움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진리는 <단순한 열정>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소설의 맨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는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은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74쪽

사랑은 열정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순하지 않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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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춤.데생
폴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열화당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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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의 그림은 흔히 발레리나 같은 무희들의 몸 동작을 아름답게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폴 발레리가 드가의 그림에서 받은 인상기와 드가로부터 직접 들은 그림과 작품 창작에 대한 이야기들을 함께 묶은 것이다. 거기에 폴 발레리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사유가 덧붙여지고 있다. 인상주의 미술과 같은 궤적을 보여주었으면서도 또한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했던 드가의 작품의 핵심은 거칠게 말하자면, 정적과도 고요 속에 담긴 육체의 움직임(혹은 물결)이다. 그의 오브제가 된 무희나 서커스 단원은 무대의 한복판에서 또는 저 높은 공중에서 일순 정지한 듯한 순간을 연출해낸다.

그 순간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정적이라고나 불러야 할 고요로서 대상의 정지 동작을 더욱 부각시키는 한편 보는 이로 하여금 정지한 동작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도 느끼게 하고 있다. 그 고요 속에 있는 것은 이미 대상이 아니라 주위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세계(춤, 운동...) 속에서 고요한 몰두를 행하고 있는 무희나 서커스 단원이다.

드가에게는 말없는 몸짓에 대한 기이한 감수성이 있었다. -83쪽

위의 폴 발레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드가가 관심을 기울여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침묵 속에 잠겨 있으나 그 세계를 한껏 뽐내고 있는 대상의 살아 있는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관심은 일견, 대상에 대한 판에 박은 복제나 묘사에 대한 집착으로 흐를 수도 있으나 드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탁소 여직공들>(1884)이나 <여주인의 축제>(1876∼77) 등에 나타나는, 아름답지도 섬세하지도 않은 지극히 일상적인 동작들을 보면 드가의 시선이 외면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 자유로웠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발레리는 드가의 작품세계를 정치하게 분석하기보다는 그의 됨됨이, 습관, 예술관 들을 천천히 들려주며, 자신의 사유를 개입시킨다. 그가 드러낸 드가의 모습 중 인상적인 한 구절을 옮겨본다.

드가는 언제나 혼자 있다고 느꼈고, 모든 형태의 고독 속에서 혼자 있었다. 성격 때문에 혼자였고, 특출난 그리고 특이한 본성 때문에 혼자였고, 성실성 때문에 혼자였고, 오만한 엄격성 때문에, 굽히지 않는 원칙과 판단 때문에 혼자였고, 자기 예술, 다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그가 요구한 것 때문에 혼자였다. -136쪽

넓게 보면 여느 예술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엄격하고 오만한 드가의 인상에서 드가의 색채가 드러내고 있는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화폭까지의 거리란! 대상을 자유로운 공간 속에 풀어놓고자 했던 무희의 화가, 율동의 화가 드가. 물론 이 책을 읽고 그의 작품이 더욱 가까이, 깊게 느껴지는 것이 발레리가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발레리의 미술에 대한, 나아가 예술에 대한 성찰은 확실히 읽는 이의 마음을 끈다.

정치, 경제, 삶의 방법, 오락 방법, 움직임의 방법이 문제될 때, 나는 현대성의 모습이 정신적 중독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관찰한다. 우리로선 양을 늘리거나 다른 독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게 법칙이다. 더 나아가고, 더 격렬해지고, 더 커지고, 더 빨라지고, 언제나 더 새롭다-그게 바로 감수성이 무뎌지는 데 대응하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가 살고 있다고 느끼지 위해, 우리에게는 육체적 동인(動因)이 더 격렬하게 증가하고 계속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117∼18쪽

그러므로 발레리가 드가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곧, 현대성이라는 괴물에 맞서고 있는 예술가의 존엄, 그리고 예술의 진실과 생명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격렬한 언어 속에 풍부한 비유와 사유를 녹여 넣었던 발레리 자신의 시세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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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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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인열전>은 전기이면서도 작품 분석이 곳곳에 담겨 있어 단순히 전기로만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들을 대상으로 씌어진 글이므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인물 연구와 작품 해석이 병행되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유홍준의 글은, 시종 대상이 된 작가들의 그림과 삶을 들고나면서 숨기지 않는 애정과 존경을 한껏 드러낸다. 단순히 옛 그림에 대한 상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 개개인의 특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한국화의 전통에 대한 참조를 통해 위상을 가늠하는 작업까지 해내고 있다. 당대의 지인들이 남긴 글을 통해 입체적으로 삶을 재구성한 노력은 물론이고, 그동안 이루어진 조선 시대 화가들에 대한 연구까지 빠짐없이 살핀 흔적은 어느 페이지를 열어보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서문에 씌어진 것처럼 '인문학의 줄기는 문화사이며, 문화사의 꽃은 미술사학이며, 미술사학의 열매는 예술가의 전기라는 생각'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외에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추상적으로 흐를 수 있는 작품 해석에 있어서도, 까다로운 해석을 지양하고 좀더 이해가 쉽도록 배려한 것이 눈에 띈다. 도판도 충분히 실어서 작품에 대한 감상과 이해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종이 자체에 미색이 많이 넣어져 있어, 작품의 배경색이 일률적으로 황색을 띠고 있긴 하지만, 오래된 그림들이므로 어떤 면에서는 나을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렇듯 작가의 삶과 작품 모두에 대한 극진한 애정과 노력으로 책을 만든 일이야말로 <화인열전>의 진정한 의의일 것이다.

무릇 옥에도 석이 끼는 법. <화인열전>에 대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남종문인화 등 조선 시대 그림에 영향을 준 중국 화풍이나 화법(畵法)에 대한 참조가 소홀하다는 점이다. 아울러 조선 시대 당시에 화가들의 위상이랄까 아무튼 그러한 사회적인 의미가 지인들과의 관계만으로 추측되고 있어 사료 면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은 이 책이 보여준 쾌거에 비하면 미미한 것들이다. 근래 인기를 얻고 있는 글들이 대부분 가벼운 요소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가 많은데, 이 책은 그러한 책들에게 커다란 귀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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