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가.춤.데생
폴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열화당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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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의 그림은 흔히 발레리나 같은 무희들의 몸 동작을 아름답게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폴 발레리가 드가의 그림에서 받은 인상기와 드가로부터 직접 들은 그림과 작품 창작에 대한 이야기들을 함께 묶은 것이다. 거기에 폴 발레리의 미술과 예술에 대한 사유가 덧붙여지고 있다. 인상주의 미술과 같은 궤적을 보여주었으면서도 또한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했던 드가의 작품의 핵심은 거칠게 말하자면, 정적과도 고요 속에 담긴 육체의 움직임(혹은 물결)이다. 그의 오브제가 된 무희나 서커스 단원은 무대의 한복판에서 또는 저 높은 공중에서 일순 정지한 듯한 순간을 연출해낸다.

그 순간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정적이라고나 불러야 할 고요로서 대상의 정지 동작을 더욱 부각시키는 한편 보는 이로 하여금 정지한 동작의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도 느끼게 하고 있다. 그 고요 속에 있는 것은 이미 대상이 아니라 주위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세계(춤, 운동...) 속에서 고요한 몰두를 행하고 있는 무희나 서커스 단원이다.

드가에게는 말없는 몸짓에 대한 기이한 감수성이 있었다. -83쪽

위의 폴 발레리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드가가 관심을 기울여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침묵 속에 잠겨 있으나 그 세계를 한껏 뽐내고 있는 대상의 살아 있는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관심은 일견, 대상에 대한 판에 박은 복제나 묘사에 대한 집착으로 흐를 수도 있으나 드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탁소 여직공들>(1884)이나 <여주인의 축제>(1876∼77) 등에 나타나는, 아름답지도 섬세하지도 않은 지극히 일상적인 동작들을 보면 드가의 시선이 외면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 자유로웠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발레리는 드가의 작품세계를 정치하게 분석하기보다는 그의 됨됨이, 습관, 예술관 들을 천천히 들려주며, 자신의 사유를 개입시킨다. 그가 드러낸 드가의 모습 중 인상적인 한 구절을 옮겨본다.

드가는 언제나 혼자 있다고 느꼈고, 모든 형태의 고독 속에서 혼자 있었다. 성격 때문에 혼자였고, 특출난 그리고 특이한 본성 때문에 혼자였고, 성실성 때문에 혼자였고, 오만한 엄격성 때문에, 굽히지 않는 원칙과 판단 때문에 혼자였고, 자기 예술, 다시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그가 요구한 것 때문에 혼자였다. -136쪽

넓게 보면 여느 예술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엄격하고 오만한 드가의 인상에서 드가의 색채가 드러내고 있는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화폭까지의 거리란! 대상을 자유로운 공간 속에 풀어놓고자 했던 무희의 화가, 율동의 화가 드가. 물론 이 책을 읽고 그의 작품이 더욱 가까이, 깊게 느껴지는 것이 발레리가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발레리의 미술에 대한, 나아가 예술에 대한 성찰은 확실히 읽는 이의 마음을 끈다.

정치, 경제, 삶의 방법, 오락 방법, 움직임의 방법이 문제될 때, 나는 현대성의 모습이 정신적 중독의 그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관찰한다. 우리로선 양을 늘리거나 다른 독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게 법칙이다. 더 나아가고, 더 격렬해지고, 더 커지고, 더 빨라지고, 언제나 더 새롭다-그게 바로 감수성이 무뎌지는 데 대응하기 위한 조건이다. 우리가 살고 있다고 느끼지 위해, 우리에게는 육체적 동인(動因)이 더 격렬하게 증가하고 계속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117∼18쪽

그러므로 발레리가 드가에게서 발견했던 것은 곧, 현대성이라는 괴물에 맞서고 있는 예술가의 존엄, 그리고 예술의 진실과 생명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격렬한 언어 속에 풍부한 비유와 사유를 녹여 넣었던 발레리 자신의 시세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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