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 현대성의 형성-문화연구 10
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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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또는 현대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얼까. 현재의 삶이 가진 모순들이 현대가 시작되며 함께 발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현대성의 형성>은 '현실문화연구' 집단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문화의 각 영역을 통해 현대성을 찾아 나서는 한편, 그렇게 확보된 현대의 특성들을 통해 다시금 문화를 들여다보게 한다. 이러한 작업은 미시사의 열기만큼이나 익숙한 것이긴 해도 여전히 유효하고, 여전히 미진하다.

전체 7장으로 구성된 글들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큰데, 2장인 '물질과 과학의 시대', 3장인 '지식인, 룸펜과 데카당', 4장인 '유행과 대중문화의 형성' 등으로 현대성의 특성들을 잡아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현대'는 '초점이 두 개 있는 타원형의 궤도와 같은 것'인데, 그 '초점의 하나는 새로움의 충동이며 서구화의 모델이며, 다른 하나는 낡은 전통에 대한 집착과 민족에 대한 주체의식'이다.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만 '끊임없는 거울 비추기의 허구적 주체'를 생산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실 현대란 '유행'을 낳고 '결핍'을 낳는 한편,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지속적인 갈망'을 낳았다. 그것은 도시화가 불러온(또는 도시화로 집약할 수 있는) 거대화·기계화·익명화의 뒤에서 움직이면서, 보들레르에 의해 '권태로움'으로 명명된 유랑하는 현대인을 탄생시켰다. 카프카가 K.를 통해 그려냈고, 이상이 '권태'로 서울 거리를 헤맬 때, 현대는 극명하게 죽음에 한 발씩 다가서는 절박함을 띠기도 한다.

현대가 지금도, 앞으로도 문제가 될 때 좀더 해명되어야 할 부분은 한국의 자생적인 현대성의 줄기를 찾아내는 시도 같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다고 이식되고 모방된 문화적 짐을 털어낼 수 있겠는가(위험한 말이지만 '문명화' 자체가 '서구화'를 뜻하고 있음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근래 유행하고 있는 이민이나 초등학생 유학 등은 현대의 추구 속에 숨은 서구 모방의 단적인 예이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현대란 '시기'가 아니라 '의식'이기 때문이다.

모방의 층위를 세분화하고, 모방의 쓴맛을 본 지식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서구의 시간(역사 또는 역사관)이 한국인의 의식을 어떻게 관장하게 되었는지 살피는 것 등이 현대의 의미를 밝히는 몇 가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종속의 역사를 쓰자는 뜻이 아니다. 현대가 도래했을 때 열광한 선조들의 들뜬 열망과 갈등의 얼굴을 그려내자는 뜻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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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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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는 문제작인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 이 소설은 나보코프의 영어 구사 능력이 그다지 왕성하지 못할 때 씌어졌다는 혐의를 벗기 힘들다. 얼마 전에 읽은 외신에 의하면 나보코프는 <롤리타>를 러시아어로 다시 썼으며, 그 작품은 영어로 쓴 작품과 큰 편차가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출간된 나보코프의 작품에 대한 연구서가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데 어느 정도까지 다른지, 이를테면 묘사가 완화(?)되었는지 어떤지, 문체가 좀더 사실주의적인지 어떤지 등이 궁금해진다.

어쨌든 이 작품이 의미가 있는 것은 금기 영역 중 하나인 근친상간에 대한 우회적인 일탈을 감행하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은 사실상 억압을 거부하고자 하는 정신적 노력이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망의 추구에 가깝다. 단순히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좀더 속을 들여다보면 사랑의 본질인 소유와 집착에 대한 유희 가득한 조롱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흥미로운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이 소설은 끊임없이 여행을 하면서(롤리타와의 사랑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진행되는데 그 여정 자체가 상당히 흥미를 준다. 비슷비슷한 허름한 호텔에 투숙(연주 때문에 다니는 여행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읽는 이를 아연케 한다)하며 외줄타기 같은 삶을 이어가는데, 그 은밀함이 왜곡된 사랑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누가 그랬던가. 기침과 사랑은 감출수록 나오게 마련이라고.

이 소설에서 읽는 이를 긴장시키는 부분은 많지만, 나중에 의붓아버지를 떠난 롤리타가 아버지에게 바라는 게 돈밖에 없는 때가 닥쳤을 때(!)는 특히 압권이다. 의붓아버지 앞에서 흘리는 롤리타의 눈물을 묘사하는 부분에선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보코프의 의도는 그러한 파멸에 이르도록 이끈 의붓아버지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데 있었을까. 이상하게도 그렇게 보이는 한편 이른바 팜므 파탈로서의 롤리타도 의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뒤따른다.

문화적 코드 중 하나로 자리잡은 '롤리타 콤플렉스'는 기실 근친상간만큼이나 위험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이어지는 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린 소녀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끼는지 어떤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그와 비슷한 예를 들은 바도 있고, 본 적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롤리타>의 경우처럼 그 파국이 엄청나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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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비시선 203
허수경 지음 / 창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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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허름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집을 버리고 떠난 이가 남긴 것은 거의 없었다. 가구나 가전제품 같은 살림 도구는 물론이고 집주인의 삶에 유용했을 많은 물건들이 거기엔 없었다. 남겨진 것들이 있긴 했다. 구부러진 젓가락이 보였고 날짜 지난 구문(舊聞)이 누렇게 떠 있었던가 그랬다. 집을 떠난 이의 숨결도 그를 추억할 어떤 것도 없었기에 그곳은 낯설고 무섭기조차 했다...

허수경의 시편은 읽는 이를 참담함 속으로 이끈다. 그 참담함은 인생의 쓴맛을 본 자가 마주하고 있는 세계여서 시를 단숨에 읽어나갈 수가 없다. 어떨 때는 한 편을 읽는 데 온 하루가 걸리기도 한다.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는 <혼자 가는 먼 집>의 연장에 있으면서도 몇 가지 다른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모색이라고 했지만 사실 어떤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선 모습은 아니다. <혼자 가는 먼 집>이 희망을 접으려는 자의 회한이 짙게 밴 '노래'였다면,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는 노래를 끝마친 자가 자리를 되돌아보는 느낌을 주고 있다고나 할까.

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마음으로 흐느끼던 날들이 지나가고

겹겹한 산에
물 흐른다

그 안에 한 사람, 정막처럼 앉아
붉은 텔레비전을 본다
-<몽골리안 텐트> 전문

텔레비전이 붉은 건 눈물 때문인가 고통 때문인가. 표제작에 쓴 '영혼이 오래되었다'는 진술의 숨은 의미는 그러므로 그녀가 새로움에 목말라 있지만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촛불 속을 걸어갔다가 나온 영혼'(<구름은 우연히 멈추고>)과 같아서 적막과 유랑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 시집에서 주로 사용된 '늙는'다는 단어는 그러한 적막과 유랑 사이를 오가는 자의 무위의 몸짓을 비유한 것에 다름아니다.

폐가 이야기를 위에 썼었다. 허수경의 이번 시집을 읽으며 폐가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의 기분을 다시 느꼈다. 그녀의 시가 단순히, 떠난 이의 부재를 그리고 있다는 게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적막감이 너무도 깊어 그녀의 시가 폐가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분명 그녀의 시어를, 목소리를 듣는데도 말이다. 집을 떠난 이의 숨결도 그를 추억할 어떤 것도 없었기에 낯설고 무섭기조차 했던 폐가 같은 도저한 적막감이 이 시집이다.

이곳에 남은 것이 있다면 엇갈리는 소문과 흔적 없이 불곤 하는 바람 같은 것들이다. 잠시 적막을 밀어내기도 하는 것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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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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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두께의 역사는 우리 육체 안에 체화되어 지속적인 성향을 이루고, 그 성향이 우리의 충동과 욕구의 충족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이것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의 끊임없는 검열을 받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종속적인 존재이다. 소위 이중적으로 묶여 있는(double binded) 존재이다.

한국인에게는 그러한 아비투스가 좀더 특이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랜 독재가 심어놓은 일상적인 파시즘이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주요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 문화와 동일시되는 직장 문화, 성적 우월감으로 팽배해 있는 남근주의,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 등은 바로 그러한 일상적인 파시즘의 예들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바로 그러한 일상 속의 파시즘을 찾아 나선 책이다.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의식과 행동 속의 파시즘이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지고 해부된다. 파시즘은 권력에 복종하길 강요하는 데서 억압과 소외를 발생시키는데,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삶을 목조르는 가장 위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그것은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다양한 장에 걸쳐 나타나고,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파괴적인 파급력을 행사한다. 그러한 파급력으로 인해 우리 안의 파시즘이 두려운 것인데, 바로 파시즘의 '대상'이었던 내가 나도 모르는 순간에 '주체'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더 나아가 이러한 파시즘의 양태가 너무도 일상적인 영역까지 스며 있어서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가부장적 권위로서 억압하는 어떤 상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에게 이러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나 해볼 수 있겠는가. 또한 타인의 기본적인 인권조차 짓밟는 가족 이기주의를 생각해보자.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파시스트다라고 알려줄 수 있겠는가.

위에서 일상 속의 파시즘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오래된 파시즘의 악령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뿌리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내 속의 파시즘을 몰아내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 속의 파시즘을 털어놓고 그러한 의식이 왜,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되새겨보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적절한 한 예로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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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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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의 가능성을 거부한 화가로 이름이 높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기실 시적 현현에 대한 포착에서 대부분의 작품을 출발시키고 있다. 시적 현현이란 사물과 세계의 본질이 어떤 계기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인데, 복합적인 인생에 있어서 시적 현현이란 늘 숨어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발견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시적 현현은 삶은 이러한 것이다라는 정의 대신 그저 한두 마디의 단어나 한 장의 데생 같은 것일 때도 많아서 철학적인 사유의 고투 끝에 얻어지기보다는 일상 생활 속에서 툭 불거져 나오기 십상이다.

잠들기 전 눈앞에 떠오르는 수많은 상념처럼, 삶이란 늘 흩어져 있는 조각들 같은 일상과의 씨름이며 소모전이다. 시적 현현의 발견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러한 조각들을 단숨에 꿰어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러한 조각들 중에서 닮은 것들을 살펴보게 해주거나. 시적 현현은 사물과 세계의 승화된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아서 그것과 마주할 때면 문득 처연해지거나 눈물이 배어나오게 마련이다. 시적 현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가설 수 없는 것은, 아니 마주치게 되더라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은 시적 현현의 순간 이 세계와 단절된 것 같은 극심한 괴리감 또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인지, 또는 슬픔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말이다. 연민이 가득 밀려오지 않겠는가.

이 책은 시적 현현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유하고 작품에 담으려 했던 르네 마그리트의 세계를 가감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그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상(像)인 중절모 쓴 남자의 테마가 평생 이어진 점, 아내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여성의 왜곡된 이미지의 의미 등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보려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그의 그림이 그려낸 '충돌' 너머의 시적 현현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과장 없이 삶의 속살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 마그리트가 그려낸 작품이 던져주는 의미가 어처구니없는 삶의 모순에 대한 것이거나 해소되지 않는 시적 현현에의 동경일 때가 있는데, 그 바람과 열정이야말로 마그리트 그림의 주요 원천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가 재현을 거부한 것은 재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것을 재현하고 있잖은가. 그것은 단순히 언어일 수도 있고, 시적 현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그리트가 그렇게 함으로써 파이프는 '파이프'가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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