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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깊은 두께의 역사는 우리 육체 안에 체화되어 지속적인 성향을 이루고, 그 성향이 우리의 충동과 욕구의 충족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이것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의 끊임없는 검열을 받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종속적인 존재이다. 소위 이중적으로 묶여 있는(double binded) 존재이다.
한국인에게는 그러한 아비투스가 좀더 특이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랜 독재가 심어놓은 일상적인 파시즘이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주요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군대 문화와 동일시되는 직장 문화, 성적 우월감으로 팽배해 있는 남근주의, 극단적인 가족 이기주의 등은 바로 그러한 일상적인 파시즘의 예들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은 바로 그러한 일상 속의 파시즘을 찾아 나선 책이다.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의식과 행동 속의 파시즘이 다양한 영역에서 찾아지고 해부된다. 파시즘은 권력에 복종하길 강요하는 데서 억압과 소외를 발생시키는데,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삶을 목조르는 가장 위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그것은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다양한 장에 걸쳐 나타나고,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파괴적인 파급력을 행사한다. 그러한 파급력으로 인해 우리 안의 파시즘이 두려운 것인데, 바로 파시즘의 '대상'이었던 내가 나도 모르는 순간에 '주체'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더 나아가 이러한 파시즘의 양태가 너무도 일상적인 영역까지 스며 있어서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가부장적 권위로서 억압하는 어떤 상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에게 이러한 파시즘에 대해 이야기나 해볼 수 있겠는가. 또한 타인의 기본적인 인권조차 짓밟는 가족 이기주의를 생각해보자.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파시스트다라고 알려줄 수 있겠는가.
위에서 일상 속의 파시즘을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 된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오래된 파시즘의 악령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뿌리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내 속의 파시즘을 몰아내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내 속의 파시즘을 털어놓고 그러한 의식이 왜,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되새겨보는 일이 먼저라는 생각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적절한 한 예로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