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의 가능성을 거부한 화가로 이름이 높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기실 시적 현현에 대한 포착에서 대부분의 작품을 출발시키고 있다. 시적 현현이란 사물과 세계의 본질이 어떤 계기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인데, 복합적인 인생에 있어서 시적 현현이란 늘 숨어 있는 것이어서 그것을 발견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시적 현현은 삶은 이러한 것이다라는 정의 대신 그저 한두 마디의 단어나 한 장의 데생 같은 것일 때도 많아서 철학적인 사유의 고투 끝에 얻어지기보다는 일상 생활 속에서 툭 불거져 나오기 십상이다.잠들기 전 눈앞에 떠오르는 수많은 상념처럼, 삶이란 늘 흩어져 있는 조각들 같은 일상과의 씨름이며 소모전이다. 시적 현현의 발견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러한 조각들을 단숨에 꿰어주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러한 조각들 중에서 닮은 것들을 살펴보게 해주거나. 시적 현현은 사물과 세계의 승화된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아서 그것과 마주할 때면 문득 처연해지거나 눈물이 배어나오게 마련이다. 시적 현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가설 수 없는 것은, 아니 마주치게 되더라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은 시적 현현의 순간 이 세계와 단절된 것 같은 극심한 괴리감 또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인지, 또는 슬픔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고 말이다. 연민이 가득 밀려오지 않겠는가.이 책은 시적 현현의 문제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유하고 작품에 담으려 했던 르네 마그리트의 세계를 가감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그의 전형적인 부르주아 상(像)인 중절모 쓴 남자의 테마가 평생 이어진 점, 아내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여성의 왜곡된 이미지의 의미 등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보려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그의 그림이 그려낸 '충돌' 너머의 시적 현현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과장 없이 삶의 속살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때로 마그리트가 그려낸 작품이 던져주는 의미가 어처구니없는 삶의 모순에 대한 것이거나 해소되지 않는 시적 현현에의 동경일 때가 있는데, 그 바람과 열정이야말로 마그리트 그림의 주요 원천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가 재현을 거부한 것은 재현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것을 재현하고 있잖은가. 그것은 단순히 언어일 수도 있고, 시적 현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그리트가 그렇게 함으로써 파이프는 '파이프'가 되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