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66
마종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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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시인은 그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뿐이랴> 등의 시집을 통해 고국을 떠나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을 투영시킨 시세계를 선보여왔다.
하지만 시인이 그려온 시세계는 고국의 삶과 철저히 분리되어 정서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먼 곳에서 고국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남겨온 시편들을 아우르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움, 향수, 귀향 등의 낱말들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번에 새로이 선보인 시집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에서도 고국을 향한 그리움과 향수는 지속되고 있다.

일시 귀국을 마치고 돌아온 첫날 밤,
지구 반 바퀴의 시차 때문이었겠지만
새벽 세시에 잠이 깨었다.
밖에는 빗소리 부산하게 들리고
다시 잠들지 못하는 몇 시간,
밤이 어둡고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내일 당장 돌아가서 살고 싶다는,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는
늙어가는 내 희망을 짓눌렀다. -<첫날 밤>에서

초기 시집에서는 그리움이 다분히 외국 생활에서 빚어진 갈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환상을 동반한 극적 시도로 드러났다면, 최근 시집과 이번 시집을 통해 보여지는 그리움은 완전히 돌아오고 싶다는, 근원 지향의 회귀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일까. 이번 시집에서는 사물의 구체와 세계의 본질을 단숨에 묶어내는 시적 통찰이 곳곳에서 보인다.

물고기의 집은 물,
새들의 집은 하늘,
내 집은 땅, 혹은 빈 배.

물고기는 강물 소리에 잠들고
새들은 달무리에서 잠들고
나는 땅이 식는 몸서리에 잠든다.

평생 눈 감지 못하는 물고기는
꿈속에서 두 눈 감고 깊이 잠들고
잠자는 새들의 꿈은 나무에 떨어져
달 없는 한밤에 잠든 나무를 깨운다.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내 집>에서

물론, 때로는 사물과 세계를 단순화하는 데 의욕이 앞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 죽인다는/사나운 세상의 공식을 넘어서 살아라'(<날아 다니는 사슴>) 같은 경직된 잠언투도 눈에 띄지만, 시집 전체를 통해 보여지는 단순함은 지혜와 그리움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새삼 그리움이란 단어가 궁금해 사전을 찾아보니 '그리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다시 그리다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하다'라고 되어 있다. 몸을 의자 속에 파묻고 곰곰 생각해보니, 언제부터인가 그리운 것도 그리워하는 일도 가까이 하기보다는 부러 멀리하려 했던 것 같다. 아마도 '간절히 생각하'는 것이 힘든 일이기 때문인가 보다. 그래서 힘들지 않으려고, 힘들어 지치지 않으려고, 지쳐 아무것도 못하게 될까봐 그랬나 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시인이 들려주는 그리움의 시편을 읽으면서 그리움이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이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간절해진다는 것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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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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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어린 시절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최인호의 <내 마음의 풍차> 같은 소설들이 떠오른 것은 그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책들이 주로 성장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장소설에서는 보통,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소년, 소녀가 주인공인데, 이들은 여러 사건을 통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의 과정을 겪고 어렵사리 성년에 진입한다. 이들이 겪는 경험은 주로 사랑, 성, 죽음, 가족간의 갈등 등에서 파생되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어제'의 나와는 다른 '오늘'의 나를 찾게 되거나 '내일'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성장소설이 그리는 세계는 한 사람의 생애에서 맞딱뜨리는 사건들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다만, 인상적인 성장소설이 그려낸 경험과 정서는 우리가 쉽게 지나치곤 하는 사건들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소설을 읽는 이유, 예술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세간에 알려진 다양한 배경 때문에 더 유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점들을 접어두고 작품만을 바라보자면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평이한 구조와 사건을 가지고 있다.

왜 이렇게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밖에 없는 소설이 인기를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가 지닌 다분히 다혈질적인 성격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이 소설 전체를 통해 홀든은 단 한 순간도 거짓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상황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상기시킨다. 즉, 위악(僞惡)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시간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그만하기 위해서였다. 한번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몇 시간이라도 할 수 있다. 농담이 아니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할 수 있다. -83쪽.

언젠가 내가 아는 한 선생님이 '졸업한 놈들 중에서 자주 기억나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속을 썩이던 놈들이다'라고 말씀하시던 게 기억이 난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어린 시절 같이 뛰놀던 녀석들 중에서 까불고 말썽피우던 녀석들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 있지만, 얌전하고 공부만 하던 녀석들은 그 모습 한 가지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홀든 콜필드가 독자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이유가 그러한 위악적인 태도와 다혈질적인 성격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일탈 속에 숨겨진 감성어린 내면세계가 오래도록 이 소설을 읽게 만드는 것이리라.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229∼230쪽.

자기 자신도 제대로 붙잡지 못하는 녀석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하니 이 대목을 읽을 때 아연해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 아연함은, 어느 순간 문득 성장의 의미를 알아버린, 성장의 그늘에 들어서버린 녀석이 전해주는 서글픔이기도 할 것이다.

앞서, 성장소설의 주인공은 몇 가지 중요한 경험을 통해 '어제'의 나와는 다른 '오늘'의 나를 찾게 되거나 '내일'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썼다. 하지만, 그것은 곧 보통의 어른, 평범한 사회인이 된다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장이 드리운 그늘, 성숙이 숨기는 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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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낚시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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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예술 양식이다. 수백 억원, 수천 억원을 들인 영화 한 편을 보는 데 관객은 단돈 7천원만 지불하면 된다. 그리곤 영화관에 앉아서 백악기에서 되돌아온 공룡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며느리에게 사로잡힌 시아버지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각 색깔별 이름을 가진 깡패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누추함을 잊고 대리체험을 하거나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는 것이다. 계급상승 욕망을 적당히 포장하는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영화'들, 구 소련도 모자라 외계인까지 적으로 간주해 죽여버려야 하는 '액션 영화'들...

이 같은 영화들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결국, 대중이 가진 흉포한 욕망, 인간이 가진 은밀한 관음증 등이지만, 이러한 것을 대중성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라고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왠지 아쉬움이 든다. 그렇다고 영화는 이미 예술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오락)'이다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없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들만 좋은 영화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소비'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많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영하의 영화에 관한 에세이 <굴비 낚시>는 좀 이색적인 책이다. 분명 영화에 관한 책이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표현된 주제나 배우들의 연기 혹은 감독의 메시지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매트릭스>를 보면서 남대문과 백남준을 거쳐 '짬뽕문화'를 끌어내며, <부기 나이트>를 보면서 롤러 걸의 바퀴에서 포르노의 반복성을 발견해낸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영화를 통해 '환기'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본능적 무의식의 체험을 열어줬다면, 영화는 우리에게 시각적 무의식에 대한 체험을 환기시킨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나아가 영화가 시각적 무의식만 아니라 공감각적 무의식도 건드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하의 영화에 관한 글들은 개인적인 성질의 것도 있고, 문화적인 의미를 띤 것도 있지만, 대부분 신선한 느낌을 전해준다. 예를 들어, 그는 <매트릭스>에서 표현된 '세상은 거대한 환상'이라는 메시지에 대해 '평론가를 위한 친절한 함정이다'라고 꼬집는가 하면, <동사서독>에서 표현된 '무(無)'에 대해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잊은' 베트남을 겹쳐놓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본 영화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거리 두기'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무의식적으로건 의식적으로건 해소시키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의 주인공 니오가 펼치는 액션과 현실의 키에누 리브스의 몸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은 각각의 글들이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분량은 키를 맞춘 듯 가지런한데, 내용은 천차만별이라고나 해야 할 만큼 제각각이다. 영화가 다양한 만큼 다양한 형식으로 쓴 것일까. <주유소 습격사건>에 대해 쓴 글은 아예 인터넷 게시글처럼 익명의 저자들을 동원하고 있기도 한데, 어쨌든 여러 가지 빛을 반사하는 스펙트럼처럼 각각의 글들이 읽는 맛이 다른 점이 흥미롭다.

이런 글들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마이너리티를 지향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마이너리티를 고집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메이저리티 속에 있으면서도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것이 균형감 있어 보이니까 말이다. 알고 보면 이것이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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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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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본다. 왼손을 들어올려 왼뺨을 만지자 거울 속의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오른뺨을 만진다.

2.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본다. 오른손을 들어올려 오른쪽 눈에서 흐른 눈물을 닦아내자 거울 속의 나는 왼손을 들어올려 왼쪽 눈에서 흐른 눈물을 닦아낸다.

3.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본다. 거울 속의 나는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본다. 오래도록 나는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보고, 오래도록 거울 속의 나는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본다.

4.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본다. 거울 속의 나는 보이지 않는다.

5. 거울이 없는 곳에 앉아 나를 본다. 왼손을 들어올려 오른뺨을 만지고, 오른손을 들어올려 왼쪽 눈에서 흐른 눈물을 닦아내고,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보던 나를 본다.

6. 거울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7. 거울이 없는 곳에 앉아 나를 본다. 왼손을 들어올려 오른뺨을 만지고, 오른손을 들어올려 왼쪽 눈에서 흐른 눈물을 닦아내고, 거울 앞에 앉아 나를 보던 나를 본다.

1-1. 파란 블라우스 차림에, 회색 카디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어깨는 약해 보일 정도로 살이 없었다. 손톱의 껍질이 벗겨진 것을 보니 자주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억지로 뺏어 먹는 건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미안해요. 인사도 못했네요. 나는 클로이예요.' 그녀는 약간 형식적으로 팔걸이 위로 손을 내밀었다. -7쪽.

1-2. 그녀는 절대로 남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의 성격에서 이 실마리 한 가닥을 찾아내자, 다른 수많은 측면들이 덩달아 이해되었다. 그녀가 부모에 대해서 이렇다 할 분노를 내비치지 않는다는 것(잔인한 아이러니로만 표현했다), 일에 대한 엄청난 헌신,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혹독한 태도, 의무감, 심지어 우는 방식(히스테리를 부리듯 울부짖기보다는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까지도. -167쪽.

1-3. 클로이와 내가 흔히 주고 받는 농담이 있었다. 우리의 감정의 변덕을 인정하고 사랑의 빛은 전구처럼 항상 타올라야 한다는 상식적인 요구를 완화하기 위해서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 오늘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 둘 중의 하나가 그렇게 묻는다. '덜 좋아해.' '그래? 아주 많이 덜?' '아니, 그렇게 많이는 아니고.' '10점 만점이라면?' '오늘? 어, 한 6.5 정도. 아냐, 6.75에 더 가깝겠네. 너는 어떤데?' '어이쿠, 나는 마이너스 3 정도인데. 오늘 아침에 네가 ...할 때는 12.5 정도였던 것도 같지만.' - 186쪽.

1-4. '너는 나한테는 너무 좋은 사람이야.' '뭐라고?' ''너는 나한테는 너무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말했어.' '뭐? 왜?' '사실이 그러니까.'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클로이?' '모르겠어.' '굳이 말하자면 거꾸로지. 너야말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먼저 노력을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를 책망하는 쪽이고...' '쉬잇, 그만, 그만해.' 클로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난 윌을 만나고 있었으니까.' '뭘 했다고?' '윌을 만나고 있었다고, 됐어?' '뭐?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이야? 윌을 만난다는 게?' '참 나, 윌과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거야.' -232쪽.

1-5. 전화벨이 울려서 전화를 받으러 가는 길에 목욕탕에서 클로이가 빗을 두었던 자리가 이제는 비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마치 처음 발견하는 것처럼, 처음 깨달았을 때의 그 고통이 모조리 되살아났다). 빗이 없다는 사실이 심장을 찌르는 단검처럼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고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 268쪽.

1-6.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와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272쪽.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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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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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이 이상하게도 소설이 표방하고 있는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를 은연중에 추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최인훈의 <광장>은 주인공인 이명준이 두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엔 제3국인 인도를 향해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작품을 두 번, 세 번 읽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끼인 존재의 몸부림보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잠시 동안 누리는 행복감이다.

폴 오스터의 소설 <우연의 음악(The Music of Chance)>은 나쉬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아버지가 남긴 6만 달러가 넘는 유산을 별 생각 없이 쓰던 중 젊은 노름꾼을 만나 그에게 돈을 대주다가 탕진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도리어 1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되어 그 빚을 갚기 위해 죄수와 다름없이 농장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게 된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소설 전체를 통해 그려지는 것은 인생의 우연한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몰락하고 마는 한 남자의 보잘것없는 생애이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강박적인 구속의 상태로 몰아가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특히, 오스터가 데뷔 초기에 썼던 희곡 <로렐과 하디, 천국에 가다>에서 주제를 가져온 ‘무위(無爲)의 벽돌 쌓기’는 이 소설에서 만만치 않은 분량을 차지하며, 주인공 나쉬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자연스레 오스터가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들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스터의 작품들에 드리워진 현대성의 거부와 은닉을 즐기는 주인공들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것 또한 이 소설의 표면적인 주제일 뿐, 오스터가 추구한 것은 다른 어떤 것일 거라는 의문이었다. 그 실마리는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나쉬가 근 3개월 만에 자신의 차를 다시 몰다가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되는 클래식 음악과 이를 통해 파생되는 돌발적인 사건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이렇듯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은 나쉬를 파국으로 떨어뜨리는데, 그는 이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이 어딘가 귀에 익은, 그가 전에 여러 번 귀기울여 들었던 곡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나쉬는 '그 곡의 모든 구절을 암기하고 있는데도 작곡가의 이름은 도무지 떠'올리지 못한다. '작곡가를 모차르트와 하이든으로 좁히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는 꽉 막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오스터는, 삶의 의미는 낯익은 것들 속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것을 누리고 있거나 갖고 있는 동안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족 : 이 소설의 앞부분에 나쉬가 '길 위의 삶'을 살아가던 중 과거에 그를 취재했던 여기자 피오나를 우연히 다시 만나는 부분이 있다. 나쉬와 피오나는 서로 사랑을 느끼지만 나쉬는 다시금 길 위로 나서는데, 나쉬가 '나는 당신에게 돌아오겠다고 했소. 난 지금 약속을 한 거요'라고 하자 피오나는 '나도 당신이 약속을 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뜻은 아녜요.'라고 받는다. 그리고 피오나는 이렇게도 말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기억해둬요.'

하지만 나쉬가 '기억해둬요'라는 말을 '기억'해 피오나를 찾아갔을 때 피오나는 눈물을 흘리며 나쉬를 거부한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피오나가 '여기' '있(겠)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그녀는 지혜롭고, 믿음직한 여자이다. 하지만 피오나는 몇 방울의 눈물로써 나쉬를 밀어낸다. 그 눈물은 그녀가 지혜롭지도 믿음직하지도 않은 여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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