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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낚시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영화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예술 양식이다. 수백 억원, 수천 억원을 들인 영화 한 편을 보는 데 관객은 단돈 7천원만 지불하면 된다. 그리곤 영화관에 앉아서 백악기에서 되돌아온 공룡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며느리에게 사로잡힌 시아버지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각 색깔별 이름을 가진 깡패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누추함을 잊고 대리체험을 하거나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머리를 식히는 것이다. 계급상승 욕망을 적당히 포장하는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영화'들, 구 소련도 모자라 외계인까지 적으로 간주해 죽여버려야 하는 '액션 영화'들...
이 같은 영화들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결국, 대중이 가진 흉포한 욕망, 인간이 가진 은밀한 관음증 등이지만, 이러한 것을 대중성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라고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왠지 아쉬움이 든다. 그렇다고 영화는 이미 예술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오락)'이다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없다. 물론,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들만 좋은 영화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소비'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영화가 많아져야 한다는 뜻이다.
김영하의 영화에 관한 에세이 <굴비 낚시>는 좀 이색적인 책이다. 분명 영화에 관한 책이기는 하지만, 영화에서 표현된 주제나 배우들의 연기 혹은 감독의 메시지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매트릭스>를 보면서 남대문과 백남준을 거쳐 '짬뽕문화'를 끌어내며, <부기 나이트>를 보면서 롤러 걸의 바퀴에서 포르노의 반복성을 발견해낸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영화를 통해 '환기'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본능적 무의식의 체험을 열어줬다면, 영화는 우리에게 시각적 무의식에 대한 체험을 환기시킨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나아가 영화가 시각적 무의식만 아니라 공감각적 무의식도 건드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하의 영화에 관한 글들은 개인적인 성질의 것도 있고, 문화적인 의미를 띤 것도 있지만, 대부분 신선한 느낌을 전해준다. 예를 들어, 그는 <매트릭스>에서 표현된 '세상은 거대한 환상'이라는 메시지에 대해 '평론가를 위한 친절한 함정이다'라고 꼬집는가 하면, <동사서독>에서 표현된 '무(無)'에 대해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잊은' 베트남을 겹쳐놓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본 영화와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거리 두기'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무의식적으로건 의식적으로건 해소시키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의 주인공 니오가 펼치는 액션과 현실의 키에누 리브스의 몸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은 각각의 글들이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씌어져 있다. 분량은 키를 맞춘 듯 가지런한데, 내용은 천차만별이라고나 해야 할 만큼 제각각이다. 영화가 다양한 만큼 다양한 형식으로 쓴 것일까. <주유소 습격사건>에 대해 쓴 글은 아예 인터넷 게시글처럼 익명의 저자들을 동원하고 있기도 한데, 어쨌든 여러 가지 빛을 반사하는 스펙트럼처럼 각각의 글들이 읽는 맛이 다른 점이 흥미롭다.
이런 글들은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마이너리티를 지향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마이너리티를 고집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메이저리티 속에 있으면서도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것이 균형감 있어 보이니까 말이다. 알고 보면 이것이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