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음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어떤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이 이상하게도 소설이 표방하고 있는 주제가 아닌 다른 주제를 은연중에 추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최인훈의 <광장>은 주인공인 이명준이 두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엔 제3국인 인도를 향해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작품을 두 번, 세 번 읽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끼인 존재의 몸부림보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잠시 동안 누리는 행복감이다.

폴 오스터의 소설 <우연의 음악(The Music of Chance)>은 나쉬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아버지가 남긴 6만 달러가 넘는 유산을 별 생각 없이 쓰던 중 젊은 노름꾼을 만나 그에게 돈을 대주다가 탕진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도리어 1만 달러의 빚을 지게 되어 그 빚을 갚기 위해 죄수와 다름없이 농장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게 된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소설 전체를 통해 그려지는 것은 인생의 우연한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몰락하고 마는 한 남자의 보잘것없는 생애이지만, 좀더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강박적인 구속의 상태로 몰아가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특히, 오스터가 데뷔 초기에 썼던 희곡 <로렐과 하디, 천국에 가다>에서 주제를 가져온 ‘무위(無爲)의 벽돌 쌓기’는 이 소설에서 만만치 않은 분량을 차지하며, 주인공 나쉬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자연스레 오스터가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들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스터의 작품들에 드리워진 현대성의 거부와 은닉을 즐기는 주인공들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이것 또한 이 소설의 표면적인 주제일 뿐, 오스터가 추구한 것은 다른 어떤 것일 거라는 의문이었다. 그 실마리는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나쉬가 근 3개월 만에 자신의 차를 다시 몰다가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되는 클래식 음악과 이를 통해 파생되는 돌발적인 사건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이렇듯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은 나쉬를 파국으로 떨어뜨리는데, 그는 이 음악을 들으며 '그 음악이 어딘가 귀에 익은, 그가 전에 여러 번 귀기울여 들었던 곡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나쉬는 '그 곡의 모든 구절을 암기하고 있는데도 작곡가의 이름은 도무지 떠'올리지 못한다. '작곡가를 모차르트와 하이든으로 좁히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는 꽉 막혀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오스터는, 삶의 의미는 낯익은 것들 속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것을 누리고 있거나 갖고 있는 동안에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족 : 이 소설의 앞부분에 나쉬가 '길 위의 삶'을 살아가던 중 과거에 그를 취재했던 여기자 피오나를 우연히 다시 만나는 부분이 있다. 나쉬와 피오나는 서로 사랑을 느끼지만 나쉬는 다시금 길 위로 나서는데, 나쉬가 '나는 당신에게 돌아오겠다고 했소. 난 지금 약속을 한 거요'라고 하자 피오나는 '나도 당신이 약속을 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뜻은 아녜요.'라고 받는다. 그리고 피오나는 이렇게도 말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기억해둬요.'

하지만 나쉬가 '기억해둬요'라는 말을 '기억'해 피오나를 찾아갔을 때 피오나는 눈물을 흘리며 나쉬를 거부한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피오나가 '여기' '있(겠)다'고 말하는 부분을 보면 그녀는 지혜롭고, 믿음직한 여자이다. 하지만 피오나는 몇 방울의 눈물로써 나쉬를 밀어낸다. 그 눈물은 그녀가 지혜롭지도 믿음직하지도 않은 여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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