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서랍 한국대표정형시선 21
노영임 지음 / 고요아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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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끔은 동료와의 헤어짐이 아쉬워 떠남을 망설인 적이 있다. 그 중에는 아이 키우는 일이나 글을 쓰는 일로 조언을 구하면 망설임없이 도와준, 예의 바르고 따뜻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한 분이 있었다. 교육청 앞마당의 아름드리 마로니에 나무가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고운 빛깔을 가장 먼저 알려준 분이다. 그녀는 학창시절부터 글을 썼고, 현직에 있으면서 시조 시인으로 활동하던 분이었는데 이번에 <여자의 서랍> 으로 첫 시조집을 냈다.

 

마치 시처럼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듯 하지만 글자수를 세어보면 시조의 형식에 맞는다. 그래서 더 절제미를 살려낸듯도 하다. 직장인으로, 엄마의 딸로, 선생님으로 살아가면서 느꼈던 삶의 애환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시인의 일상을 조금씩 엿보게 된다.

 

 "동백꽃//겨우내 물질하던 어린 누이 손등이랄까?/얼음 박혀 터진 틈새 내비치는 붉은 속살/못본 척, 눈가 훔칠 때/뜨건 눈물이/후두둑" 노는 것과 노동으로 인한 터진 손은 사뭇 다르겠지만 이 시조를 읽는데, 내 어린 시절과 오버랩된다. 어릴적 방 윗목에 떠 놓은 물이 어는 한 겨울에도 밖에서 놀다보니 내 손은 늘 터져 있었다. 엄마의 꾸지람에 하루 이틀은 잠잠하다가 몰래 나가서는 저녁 먹으라는 소리에 이끌려 들어오고는 했었다. 놀다가 터진 손이지만 참 아팠던 기억이 있는데 겨우내 차가운 물질 하느라 터진 어린 누이의 손등은 얼마나 아팠을까? 활짝 피었다가 어느날 갑자기 후두둑 떨어지는 허무한 동백꽃과 누이의 손등이 동일시된다.

 

"가을 속내//무른 속내 비칠까/기척도 없더니만/뽀얀 솜털 자위 뜨고/뚝, 떨군 덕석밤/명치끝/치받던 그리움/그렇게 아람 번다" 명치끝 치받던 그리움을 읽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마음 한곳에 묻어두었던 그리움이 일어난다. 나에게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우리말인 '자위 뜨고, 아람 번다'라는 표현이 생소해 사전을 찾아보니 '밤톨이 익어서 밤송이 안에서 밑이 돌아 틈이 나다'라는 뜻풀이도 예쁘다. 시인의 글에는 고운 우리말이 자주 보인다.

 

"교무수첩1-스승의 날//밟혀 줄 그림자조차/찢겨긴 지 이미 오래/주홍글씨처럼 카네이션/매달려 있던 하루/아홉 시/저녁 뉴스엔 또/어떤 죄목으로 단죄될까" 스승의 날에는 부족한 내 아이를 보듬어 안으시는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은 꽃바구니를 보내 드렸는데 혹여 누를 끼칠까 조심스럽다. 점점 삭막해져가는 사제지간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쪼보장한 배롱나무//단단히 말라 쪼보장한 배롱나무 한 그루/당신 좁은 뜨락에 꽃등 환히 밝히시더니/긴긴 날/옹이 하나를 안으로 키우셨나?/바닥난 링거병 따라 흔들거리는 중심/검붉은 오줌 팩을 생의 무게로 매단 채/고장난 메트로놈처럼/박자 잃은 어머니/어미젖 보채 쌓는 하릅송아지 같은 삼남매/비싼 일수 찍듯이 하루 벌어 한 끼니/고봉밥 짓던 아궁이/짚불 환한 기억들/꽁초만큼 남은 목숨 바작바작 타들어 갈 때/숨어서 우는 자유 그마저 빼앗겼다/자꾸만 도돌이표에 맴도는/엄니 엄니이......" 배롱나무에 달린 분홍빛 꽃이 지고나면 스산하다. 가끔씩 대화중에 내비치던 친정엄마 일상을 듣고는 했는데, 병든 노모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시조는 고리타분하고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깬 그녀의 글은 언뜻 시 같기도 하면서 시조의 은율이 느껴지는 절제미가 흐른다. 자연 풍경, 아이들, 교사생활, 유년시절, 고전의 재해석, 현시대 풍자 등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다. '드넓은 시간과 공간에 펼친 관찰력과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한 이승하 교수의 해설이 와 닿는다. 눈부신 가을날, 은행나무길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가족 혹은 친구와 이 시집을 낭송하면서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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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0-25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의 서랍... 제목이 좋네요.
이런 분도 알고 지내시는 거예요?
저도 어릴 적 손이 터진 적 있어요. 겨울에 추운지도 모르고 놀다가요.
지금 생각하면 참 씩씩했어요.

님의 좋은 코멘트와 함께 좋은 시조를 감상하고 갑니다. ^^

세실 2013-10-26 15:01   좋아요 0 | URL
예전 교육청 근무할때 앞짝꿍이셨거든요^^
호호호 저두 저두! 겨울이면 손이 터서 아프기도 하고.....맞다. 볼도 늘 빨갰어요. ㅎㅎ
막대기 들고 칼싸움 하고 댕겼어요.

늘 힘이 되어 주시는 페크님^^ 감사합니다.
편안한 주말되세요.

프레이야 2013-10-3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의서랍,이라니 제목부터도 참 좋군요.
아람 번다,는 무슨 뜻일까 궁금하고. 시조는 곱고 정감 가는 우리말을 살리기에도
더 좋은 형식 같아요.^^

세실 2013-10-31 16:27   좋아요 0 | URL
아람번다도 자위 뜬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밤이 익어 벌어진다는 의미..... 참 예쁘죠?
절제미와 은율이 있어 좋아요.
우리말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이분!!
프야님. 행복한 시월의 마지막 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