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명이 몰려 다니는 것을 흔히 동네 축구라 부르곤 하는데, 골키퍼 빼고 거의 20명이 몰려 다니는 모습을 두시간 가까이 지켜보았다. 공 뺏기자마자 전방에서부터 강력한 압박. 공 잡고 나면 상대 수비수 4~5명이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은 기본. 스포츠 과학의 발전 탓인지, 선수들의 깡다구인진 몰라도, 그 더위에 정말 잘도 뛰어 다니더라. 세계적으로 축구 수준이 많이 평준화 되었다고 하는데, 독일-이탈리아 전 보면서 저런 팀들과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비-유럽팀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었다. 이변도 조 예선에서나 가능한 법, 상대 팀 파악 대충 됐고 자기 팀 손발 슬슬 맞아 들어가는 16강부터의 단기 결전에선 기대하기 힘든 일 같다. 천하의 브라질도 프랑스의 압박에 나가 떨어졌으니.

이탈리아 축구가 재미 없다는 편견은 수정해야 할 듯 싶다. 따지고 보면 이번 대회 유럽의 강팀들은 모두 이탈리아 팀처럼 보였다. 물론 압박과 수비 치중이란 현상이 이탈리아의 영향이라기보단 전반적인 추세 정도로 봐야겠지만, 걔중에서도 이탈리아의 조직력과 공수전환능력이 유난히 돋보인 것은 사실이다. 우승 후보와 실제 우승국 간엔 또 차이가 있다고 할 때, 이탈리아는 대개 전자의 부류로 거론되던 팀이었는데, 이번엔 정말 우승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개최 지역의 텃세와 오심 논란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남미 축구를 압도하는 유럽세의 신장은 주목할만하다. 유럽의 강력한 압박 신공에 남미는 과연 어떤 대응책을 꺼내들 것인가. 체격과 체력의 상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박에서 밀리지 않은 아르헨티나가 어느 정도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브라질이 (그리고 개인으로선 호나우딩요가) 유럽의 공간 좁히기에 대한 응답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 한채 탈락한 것은 역시 아쉬운 대목.   

새벽에 축구 보느라 뉴스 속보를 다 보게 되었는데, 한국-인으로 태어난 팔자에 대한 소감이라고 해야 할까. 유럽의 축구을 현실이로되 현실이 아닌 어떤 것처럼 구경하고 있을 때, 유럽 애들은 동아시아 어느 지역에서 늘상 있다는 위기를 현실이로되 현실이 아닌 어떤 것처럼 생각하겠구나. 이정도 위기는 일상이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은유성이 한국 국대 축구에서 더욱 강하다고도 하겠구나. 국내 리그가 인기 없는 것도, 한국-인 입장에선 모두가 같은 편이기 때문에 대결 의지가 고취되지 않아서? 굳이 경기장을 찾지 않아도 뉴스만 틀면 아드레날린이 팍팍 분비되는 형편이니, 가령 미-북 수교 이전엔 K리그 관중 동원도 불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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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7-10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일-이탈리아 경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이탈리아를 수비축구라고만 알고 있던 제게 큰 충격이었죠 공격의 날카로움은 어느 팀보다 뛰어났으니까요... 아마 우승하지 않을까 싶네요 글구 비유럽 팀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는 이탈리아를 유럽팀에 맞서 싸우는 게 정말 어려울 듯....

로드무비 2006-07-10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은 텔레비전 중계 때 해설자 마이크를 잡아도 손색없을 듯합니다.^^

중퇴전문 2006-07-12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 가서 축구 안다고 할 수준도 안 됩니다.;;
 
여행하는 나무
호시노 미치오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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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왜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일까. 어째서 A가 아닌 B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해도 나는 합당한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저마다의 기로가 있기 마련이다. 그곳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215쪽

알래스카에서 여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직후부터 이곳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알래스카는 어디까지나 낯선 타국이었다. 알래스카의 대자연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표를 예매해야 볼 수 있는 극장의 영화처럼 지극히 객관적인 대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겠다고 다짐한 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예를 들어 간혹 마주치는 늑대조차 웬지 낯설지가 않다. 그 전에는 늑대의 모습을 사진에 담느나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은 내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나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야생동물뿐 아니라 이곳에서 함께 살아갈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 그저 친한 동료도 생각되던 사람들이 이제는 내 가족처럼 다가오는 것이었다.-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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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조금 덜 유명하던 시절의 김용환씨 홈쥐  www.namool.com 를 열심히 눈팅하던 때가 있었다. 사먹긴 지겹고, 얻어 먹기도 눈치 보이고, 해먹을 실력은 안 되는 상황에서 눈요기나마 실컷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메뉴가 올라올 때마다 아예 바탕화면에 깔아 놓는 수준이었으니, 달랠 길 없는 식욕을 그렇게라도 해소해야 했다.

처음 따라해본게 저 닭똥집 되겠다. 마트에 가면 싼 가격에 푸짐하게 살 수 있다, 뭐 중국인 아니면 한국인 밖에 안 먹는 음식이니까 (개중에 한국인 비율이 더 높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의 나에게 전혀 조리의 상식이 없었다는 것. 깨끗히 문질러 씻어야 하고 피도 빼야 하고 약간의 술과 생강도 필요하다는 등등을 모두 생략한채 그냥 후라이팬에 볶아서 소금과 후추만 뿌려 먹었다. 씹을 때마다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지만, 그래도 좋다고 먹었다. 지금은 나름대로 향상된 실력을 내외에 과시하고 있지만, 저런 과거가 있었다고는 물론 밝히지 않는다.

흐리고 습한 날씨다 보니, 똥집에 청하 한잔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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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퇴전문 2006-05-23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석식 소주나 약주보다 청주류를 선호하는 편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숙취도 덜하다. 정종이 가장 먼저 알게된 술이었던 유년 시절 탓도 있는진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저도주 중엔 이 술이 먹을만 하다. 소주긴 하지만 사카린 맛이 훨씬 덜하다. 주위의 소주 본류들에겐 위장 소주, 타락한 소주 등으로 지탄받는 경향이 있다. 


로드무비 2006-05-2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캐릭터의 일종인데 닭똥집이라는 브랜드가 있답니다.
이런 유니크한 이름에 끌려요.
'별' 한 번 먹어볼게요.

비로그인 2006-05-2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고픈 제가 밤에 봤다면 심히 괴로웠을 페이퍼로군요. 쨍쩅한 낮이라 해피하게 보구 갑니다.

중퇴전문 2006-05-2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별과 함께 좋은 시간 되십시오. 웬지 영업의 달인이 된 느낌입니다.

까뜨린느님도 이따 저녁에 별과 함께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비로그인 2006-05-2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어식으로 읽어주시니 엄청 이쁘게 들리는 이름이네요^^ 캐서린 쯤으로 읽어주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그렇다. 합법은 나약한 기회주의의 발로다. 법치마저 국가에 전유된 폭력에 다름 아니고, 정치적 쟁투의 정당성 역시 총체적인 힘의 우열 관계가 결정한다. 최후의 이념적 결사체 중 하나인 한기총에서 비합법 투쟁의 의지를 강력히 천명한 것도 나름의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다. 국보법과 사학법 투쟁 등에서 보여준 과거 경력을 고려한다면, 저 분들을 당체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빈치코드' 라는 헐리웃 영화 같으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왜 반대하겠다는 것인지 조금 의문스러운 감이 있지만서도, 반대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다는 식의 깡다구는 문약해빠진 이 시대에 정녕 신선한 발상이지 않은가.

영화는 볼 생각이 없지만 한기총의 반대 투쟁은 기대하고 있는 팬으로서 한가지 당부가 있다. 지휘부는 머리만 굴리고 실제 투쟁은 늘 딱가리들이 도맡아 하는 계급적 모순 때문에 많은 집단과 운동이 자멸해 왔다. 소위 좌파 이론가들에 대한 우파의 비판 역시, 언어와 실천 간의 괴리를 날카로이 지적한 탓에 많은 대중의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구속을 각오한 120명의 기독 청년을 결사대로 투입하겠다는 발언은 신앙의 강철대오 한기총의 도덕적 정당성과 설득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헌신과 희생의 몫을 타인에게 떠맡기겠다는 발상은 신약의 핵심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일 뿐더러, 파급 효과 면에서도 목사님들이 직접 나서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이슬람식으로 싸우겠다고 나선 비장한 판국에 (parce domine..), 120명 아니 1200명의 목사들이라도 전국의 극장을 막아서야 할 것 아닌가. 설령 공권력에 의해 쇠고랑을 차게 되더라도 (설마 그정도 고난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탄압이 오히려 수백배의 교세 증가를 불러온 과거의 영광이 다시 한번 재현될 따름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한 이삭을 바치기로 결심했을 때 은혜와 축복도 따랐던 교훈을 잊지 말라.   

난 진심으로, 자기 싸움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바람직한 선례가 이 기회에 세워지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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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퇴전문 2006-05-23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했더니 결국 용두사미다. 재미 없다는 영화 흥행이나 도와주고, 괜한 실언만 남긴 셈이다. 볼만한 싸움은 끝내 일어나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싸움들만 난무한다.
 
역사의 사기꾼들 - 인류의 역사를 바꾼 과학자들의 오류와 착각
하인리히 찬클 지음, 장혜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번역서 제목은 황우석 효과를 겨냥한 듯 하나, 내용 자체는 과학사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별히 사기라기보단, 기술적인 오류와 사상적인 한계를 다루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당대의 주류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 하고 가치편향적이었거나 (생물학과 의학의 경우처럼), 자기 과신과 방어가 지나쳤거나 (슐리만과 프로이트처럼), 이미 전제되어 있는 정치적 목적에 연구 결과를 복종시킨 과오가 있거나 (나찌 혐의를 끝내 고수한 제국의회 방화 연구처럼), 아니면 화학이나 물리학 등에서의 순수한 기술적 한계 등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았던 탈레스를 사기꾼이라 부르진 않는다, 당시의 지적 수준에서나마 일반적 법칙의 구성을 시도한 위대한 과학자였다면 모를까).

사례가 유럽-미국에 국한된 것은 좀 아쉽긴 하다. 가령 소련과 중국 등의 사회주의 과학과, 주체 바람이 불기 시작한 1960년대 북한의 김봉한 사건 같은 것도 재밌는 얘깃거리가 솔찬히 있을텐데. 

주로 과학과 과학자의 한계를 다룬 내용이지만, 그런 한계와 결점들이 지금껏 어떻게 보완되고 수정되어 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여전히 믿을만한 지식 탐구의 방법으로서 과학을 신뢰할만 하다는 결론. 과학의 자정능력이 단기적인 오류와 속임을 허용할진 몰라도 누구 말마따나 영원히 모두를 속일 순 없는 법이다, 반증과 검토가 과학의 필연적 속성으로 남아 있는 한. 스스로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이라 주장하는 일부 유사-과학들은 제외 (명칭의 적합성은 지금 논할 바가 아니고 단 이런 의문이 남는다, 왜 굳이 '과학' 이 되려고 하는지).    

(권력질이나 하려는 목적의) 맹신과, (허튼 주장을 옹호하려는 목적에서의) 불신 모두가 합당치 못 하다. 있는 그대로, 적절하고 요긴하게 쓰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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