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언론계와 조선 - 사회와사상 9
강동진 / 지식산업사 / 1987년 9월
절판


일본어를 모르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불편을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는 일본인은 일부러 일본어만을 사용하고 조선어를 배우지 않으며, 조선인으로 하여금 될 수 있는대로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어를 쓰게끔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일본인 관리는 조선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는 말도 있으나, 일시적인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서는 일본어 보급에 장애를 조성할 염려가 있다. - 조선과 일본어, 1910.10.11, 東京日日
-31쪽

조선의 국어는 이때야말로 완전히 학교의 교과목에서 삭제하고 언문을 섞은 조선문도 점차 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국민적 통일을 촉진시키는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위하여 뇌력의 경제를 위한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의 국민으로서 두 개의 서로 다른 국어를 사용함은 가장 불행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 조선의 교과목, 1910.9.3, 東京日日
-31쪽

일한의 관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식민지에 대한 관계와는 취지가 다른 것이어서 옛 형제가 새로 화합을 한 것이므로 아우가 아직 형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할 경우에는 임시로 아우의 언어까지 배움으로서 아우가 형의 언어에 통하는 시기를 앞당기게 하는 것도 또한 형의 자애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주장도 어디까지나 일시적 방편에 지나지 않으며, 조선인이 모두 일본어를 일용언어로 삼게 되는 날을 앞당기기 위한 제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조선어 연구, 1910.8.27, 讀賣-32쪽

조선국민은 우리 인민인 동시에 이 결과로서, 이를 우리 국민에게 완전히 동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된다. 또한 우리 국가의 처지에서 볼 때에도, 그들을 우리 국민에게 동화시키는 일을 불충분하게 할 경우 화근은 영원히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화의 근본적 의의는 사상, 감정의 서로의 양해가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사상, 감정의 소통을 꾀함은 무엇에 의거해야 하느냐고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언어문자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유이다. 우리가 우선 바라는 것은, 금후 조선에서 공포하는 법률 공문과 같은 것은 단연코 일본문만을 사용해야 할 것이고, 대만에서와 같이 일본문과 함께 한문의 번역 또는 주석을 다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 조선 교화의 방침, 1910.8.28, 讀賣-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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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평전 역사 인물 찾기 5
이기형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6월
품절


원산 송도 해수욕장에서 몽양은 우연히 춘원을 만났다. 그때 춘원은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와 백사장을 즐기고 있었다. 몽양이 아이들이 튼튼하고 잘생겼다고 칭찬해주자 춘원은 일본말 (그때는 국어)로 아이들에게 '여 선생이 지금 너희들을 튼튼하고 잘생겼다고 칭찬해주신다' 로 통역하더라는 것이었다.-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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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6-08-17 0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 "국어"만 쓰게 했던 이광수의 노력이 괘씸하다기보다는 불쌍하게 느껴져요. 에휴, 한 치 앞을 모르는 인간의 어리석음!
중학생 나이에 일본에 유학했던 김동인은 소설 구상을 일본어로 했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할 때 적절한 용어를 찾는 것을 힘들어했대요. 일본에서 교육받은 이광수 역시 일종의 바이링걸로서, 우리와는 다른 언어 감각을 가졌는지도 모르죠. 그 자식 세대는 또 달랐을 것이고요.
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오늘날에도 저것과 비슷한 상황이 한국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요? 일본어 대신 영어로.^^

중퇴전문 2006-08-1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번역했던 마지막 세대가 5,60년대 문학이라고 하는데, 이후에도 (특히 식자들이 구사하는) 현대 한국어의 문어는 '만들어진 언어' 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죠. 식민이 강압적으로 주어진 외부 조건이었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영어는 사회적 조건 외에도 (가령 입학 취업 승진 등에서 영어 시험 성적을 요구하는 등의), 개개인의 내면적 심리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까요.
 
우리말의 탄생 -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10월
구판절판


그는 피지배 민족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지배언어를 단지 교과 과목으로 설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과목의 수업을 지배언어를 사용해서 진행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유효한 정책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렇다면 총독부는 이미 한일병합과 동시에 조선어를 공공생활에서 몰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인의 민족성 그 자체를 개조하려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언어 정책을 실시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시나 고이치는 급진적인 언어 정책이 가져오는 부작용을 충분히 고려한 상태에서 언어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다. 독일의 언어 동화정책이 실패한 원인을 급진적인 동화정책의 추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조선총독부의 언어 정책에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총독부가 일본인 교사들에게 '언어가 통하지 않아 목적달성에 지장이 없도록 조선어를 습득하라' 고 권한 것이나 총독부 관리들에게 조선어 장려책을 쓴 것 등은 이러한 언어 정책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300쪽

따라서 그는 민족어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식민지 지배체제를 조금이라도 미동시키지 않을 강력한 권력 언어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이는 총독부의 언어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조선총독부는 일차적으로 사회 공식언어를 조선어에서 일본어로 완전히 대체시키는 것을 언어 정책의 기본 방향으로 삼는다. 국가 기관이나 학교에서 조선어를 금지시킨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어 교육을 강화시킨다. 권력의 언어가 일본어라면 식민지인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어를 배우려 할 것이고, 그렇다면 식민지인들이 일본어를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일본어는 조선에서 강력한 권력 언어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301쪽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은 제대로 된 조선어사전을 갖고자 하는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근대적 의사소통 체계를 확립하려는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갑오개혁을 전후한 시기부터 제기된 민족의 숙원 사업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이 사업의 완성이 낙오된 조선 민족의 문화를 다시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일본어 상용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교육 현장은 점점 일본어 일색이 되어가고, 학교 교육을 받은 조선인들이 빠른 속도로 일본어 문화에 적응해가는 현실에서, 또 한번의 실패는 조선어의 몰락을 가속화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편찬사전회가 전 민족적인 격려 속에 출범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 구성원의 문화적 위기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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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
박성래 지음 / 교보문고(교재) / 1998년 10월
품절


조사에 의하면 중국에 번역된 서양 책은 1773년까지 모두 352종이고, 이 가운데 천문학 종류가 71종, 수학 종류가 20종, 그리고 그 밖의 과학기술서가 91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서양 과학기술서가 번역되었건만, 그 내용에 대해 우수성을 전폭적으로 인정하려는 중국 학자는 거의 없었다. (중략) 이와 같은 '서양 과학의 중국원류설' 은 청대의 중국인들이 서양 과학을 보는 시각을 잘 반영한다. 이런 태도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아편전쟁 이전의 모든 서양 과학기술 서적 번역은 '서양 사람이 입으로 번역하면 중국 사람이 붓으로 받아 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중국과학문헌번역사고' 라는 책은 설명하고 있다. (중략) 1839년 시작된 아편전쟁이 중국의 분명한 패배로 끝나자 중국 지식인들은 경악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냥 서양 문명을 얕잡아 보기만 할 수 없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200쪽

1716년에 제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스스로 천문역산에 흥미를 보이고, 막부의 관리들에게 화란말 배울 것을 명하자 화란 학문은 그 위세를 크게 떨치기 시작했다. (중략) 나가사키에 허락한 화란 상관을 통해 배워 들인 것이 18세기에 꽃을 피운 화란 학문, 즉 난학이다. 그리고 그 학문적 열매가 바로 1774년 스기타 겜바쿠 등 화란어를 배운 일본인이 번역한 화란 해부학 책 '해체신서' 였다. 화란에서 출간된 지 40년 뒤에 동양 사람에 의해 번역된 최초의 서양 과학서이다. 그 뒤를 이어 일본 난학자들은 다투어 서양 과학기술 책들을 번역, 번안해 냈다. 그들이 직접 연마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중략)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에는 1800년대 초에 이미 당시 서양에서 보급되기 시작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과학지식과 일부 기술이 일본인 자신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었다.-201쪽

이등규개는 나고야 출신으로 일본 역사에서는 대표적 박물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1827년, 25살 때 이미 그는 시볼트를 직접 찾아가 그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시볼트에게서 얻은 스웨덴 학자가 쓴 일본 식물에 관한 책에 크게 감동을 받아, 그 후 일본의 식물을 연구하고 세계에 일본 식물을 소개하는 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또 하나의 제자는 고야장영이다. 1925년 시볼트의 제자가 되었던 그는 배운 것을 바탕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1832년 '의원추요' 라는 책을 내었는데, 이는 일본 최초로 서양 근대 생리학을 소개한 책으로 남아 있다. 또 그는 이 외에도 탈레스에서 라이프니츠까지의 서양 자연철학을 소개한 책을 쓰거나 병서를 쓰기도 했다. -203쪽

요컨대 일본은 1800년대 중반에 즈음해서는 이미 서양 과학의 대부분을 일본의 것으로 소화해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 사람들이 서양 과학을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고 서양말을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많은 일본인들이 화란말을 익혀 화란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을 정도의 적극성을 보인 것 때문이었다. -204쪽

우리 나라에는 1883년까지 서양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중략) 1857년 최한기의 '지구전요' 에 처음으로 영어 알파벳이 겨우 나타날 뿐이었다. 물론 최한기가 영어를 알지 못 했고, 그런 상황은 1880년대 초까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중략) 우리 나라에서는 1883년 여름 윤치호가 처음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중략)1882년 보빙사는 민영익을 단장으로 8명의 사절단과 3명의 통역으로 구성되었는데, 통역 3명은 각기 중국인, 일본인, 미국인이 한 사람씩이었다. 영어 구사가 가능했던 단 한 사람 윤치호는 방금 일본에서 귀국하여 미국공사관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204~205쪽

필자는 중국과 일본에서 1800년대 중반까지 나온 서양 과학서의 번역본 중 몇 가지를 소개했다. 그런데 그 많은 책이 나오는 동안 우리 나라에서는 단 한 권도 서양 과학서가 번역되어 나온 적이 없었다. 우리 나라에서 우리 나라 사람의 실력으로 서양 과학서를 처음 번역해 낸 것은 일제 시기도 아닌, 아마도 해방 후가 아닐까 생각된다.-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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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범우사상신서 30
자크 모노 지음 / 범우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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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년 동안에 걸쳐 인간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부족의 운명과 동일한 운명 속에서 살아왔으며 거기에서 벗어나면 살아 남을 수가 없었다. 또 부족은 전원의 단결이 없이는 생존할 수도 자위할 수도 없었다. 이 단결을 조직하며 보증하는 규율이 주관적으로 보아 극도로 강력한 것이었음에도 그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 구조가 그토록 오랜 동안 필연적으로 절대적인 도태의 힘을 발휘하여 온 만큼, 이 구조들이 선천적 카테고리에 드는 인간 뇌의 유전적 진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 진화는 단지 부족의 규율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규율에 대한 신화적 설명의 필요까지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자손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설명을 붙이지 않고는 못 견디는 기분과 가슴을 죄는 불안감에 쫓겨 실존의 의미를 불가불 찾아내려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유산으로 계승한 것일게다. 이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이 모든 종교와 철학, 과학 자체까지도 창조한 것이다.-195쪽

인간의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한편으로는 진정시키면서 규율을 확립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신화적, 종교적 설명은 어느 것이나 '이야기' (역사라는 의미도 된다) 이며, 인간 개체의 발생에 대한 이해를 용이하게 만든다. (중략) 위대한 종교는 모두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모두 영감을 받은 예언자의 생애 이야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197쪽

과학의 전언이란 새롭고 또한 유일한 진실의 원천을 정의하는 일이며, 윤리적 기초의 전면적 재검토와 물활설적 전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연을 요구하는 일이며, '구약' 을 결정적으로 폐기하는 일이며, 신약을 만들어 낼 필요성을 논하는 일이었다. 현대 사회는 한편으로는 과학의 혜택으로 얻은 모든 힘으로 무장하고 모든 부를 향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과학에 의하여 이미 붕괴되어 버린 낡은 가치 체계에 따라서 생활을 계속하고 그 체계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어떠한 사회도 이와 같은 분열을 경험한 일이 없다. 원시 문화에 있어서나 고전 문학에 있어서나, 지식의 근원과 가치의 근원은 물활설의 전통에 따라 혼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식과 진실의 근원인 물활설의 전통을 포기해 버리고,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는 분열된 문명이 사상 처음으로 출현하였다. -200쪽

호주의 원주민에서 유물적이고 변증법적인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물활설의 전통은 가치, 도덕, 의무, 권리, 금지의 기초를 신화적 내지는 철학적 개체 발생에서 구하고 있었던 것인데 과학이 이 모든 것들을 파멸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전언을 내재된 의의와 함께 받아 들인다면, 인간은 마침내 고래로부터의 꿈에서 깨어나 스스로의 완전한 고독을, 스스로의 근원적인 이상스러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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