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 합법은 나약한 기회주의의 발로다. 법치마저 국가에 전유된 폭력에 다름 아니고, 정치적 쟁투의 정당성 역시 총체적인 힘의 우열 관계가 결정한다. 최후의 이념적 결사체 중 하나인 한기총에서 비합법 투쟁의 의지를 강력히 천명한 것도 나름의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다. 국보법과 사학법 투쟁 등에서 보여준 과거 경력을 고려한다면, 저 분들을 당체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빈치코드' 라는 헐리웃 영화 같으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왜 반대하겠다는 것인지 조금 의문스러운 감이 있지만서도, 반대의 자유가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다는 식의 깡다구는 문약해빠진 이 시대에 정녕 신선한 발상이지 않은가.
영화는 볼 생각이 없지만 한기총의 반대 투쟁은 기대하고 있는 팬으로서 한가지 당부가 있다. 지휘부는 머리만 굴리고 실제 투쟁은 늘 딱가리들이 도맡아 하는 계급적 모순 때문에 많은 집단과 운동이 자멸해 왔다. 소위 좌파 이론가들에 대한 우파의 비판 역시, 언어와 실천 간의 괴리를 날카로이 지적한 탓에 많은 대중의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구속을 각오한 120명의 기독 청년을 결사대로 투입하겠다는 발언은 신앙의 강철대오 한기총의 도덕적 정당성과 설득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헌신과 희생의 몫을 타인에게 떠맡기겠다는 발상은 신약의 핵심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일 뿐더러, 파급 효과 면에서도 목사님들이 직접 나서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기독교인이 이슬람식으로 싸우겠다고 나선 비장한 판국에 (parce domine..), 120명 아니 1200명의 목사들이라도 전국의 극장을 막아서야 할 것 아닌가. 설령 공권력에 의해 쇠고랑을 차게 되더라도 (설마 그정도 고난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탄압이 오히려 수백배의 교세 증가를 불러온 과거의 영광이 다시 한번 재현될 따름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한 이삭을 바치기로 결심했을 때 은혜와 축복도 따랐던 교훈을 잊지 말라.
난 진심으로, 자기 싸움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바람직한 선례가 이 기회에 세워지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