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부인은 그런 이기채를 바라보지도 않고,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있더니, 한참만에야
"별 도리 없는 일이지."
하고, 한 마디만 말하였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서로 깊은 침묵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질식할 듯한 침묵의 무게에 눌린 이기채가 고개를 들자 칭암부인도 이기 채를 바라보았다.
그때, 이기채가 본 것은 그네의 눈매였다.
그 눈매에는 이미 서리가 걷혀 있었다.
무심코 이야기하다가 부인의 눈매에 부딪치면, 보는 사람을 서늘하게 하였던 허연 서릿발은, 지금 습기처럼 축축한 물기로 번져나고 있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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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란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좁은 통에 들어가면 좁아지고 넓은 바다에 쏟으면 넓어진다. 낮으면 아래로 떨어지고 높으면 그 자리에 고인다. 더우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추우면 얼어 버린다. 그릇과 자리와 염(炎)에 따라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싸우지않고 순응하지만, 물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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