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얼굴 -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한수산 외 지음 / 현대문학 / 1991년 3월
평점 :
절판


한수산을 처음 발견한 건 유용주의 산문집 <쏘주 한 잔 합시다>. 그곳에서 유용주는 한수산의 글을 일컬어 '비단결 같은 서정의 눈물방울'이라 했다. 이런 대단한 칭찬이 어디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이럴 수가, 한수산 또 발견. 이번엔 다자이 오사무의 <여자의 결투> 맨 뒷장이었다. 그곳에 다자이의 옛집을 기행하는 한수산의 취재일기가 들어있었다. 아무래도 대단한 작가일 거란 생각에 그의 책 <부초>를 처음 읽었고, 이건 요즘 말로 완전 "대박"이었다. 이래저래 찾아보니 꽤 유명하신 분 같은데, 이거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라고 꾸벅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무지를 탓하며 그 후로 한수산의 작품 찾아읽기 돌입. 그리고 두번째로 읽은 책이 바로, 단편 <타인의 얼굴>이다. 사실, 또 살짝 무지를 드러내자면, 급한 마음에 사들인 탓에 난 이 책이 한수산의 장편소설인 줄 알았단 것. 알고 보니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이었고, 한수산은 그해 수상자였다. 그것도 91년. 까마득하다면 까마득한 91년이다. 하지만, 강산은 10년 만에 휙휙 변한다지만 한수산의 감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공감하기에 아무 무리가 없다. 오히려 진지하고 어른스럽다고나 할까. 요즘 많이 나오는 가볍고 감성에만 충실한 소설과는 차이가 있어서 그게 또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의 글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밑바탕되어 있다. <부초>에서도 그랬지만, <타인의 얼굴>에서도 쓸쓸하고 슬픈 심정을 담담하고 깨끗하게 표현해내는데, 이게 참 애잔하다. 먹먹해온다.

한수산 작가 외 다른 글들은 so so. 하지만 한승원의 <돌아온 사람들>에 나온 비문은 기억에 남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_^ 2008-02-1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말 탄 자는 지나가다' 읽어보셨나요. 새로운 형식의 작품이랍니다. 추천. 중편인데 [마술적 리얼리즘]기법으로 쓰인 소설이에요.

고도 2008-02-1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 탄 자는 지나가다' 저도 읽어봤습니다. 한수산 님의 책을 몰아서 읽었거든요^^;; 그 작품이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이었군요. 좋았습니다.
 
타인의 얼굴 -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한수산 외 지음 / 현대문학 / 1991년 3월
절판


우리 핏속의 소금기는 바다의 소금기와 그 짜기가 같다고 한다. 그러나 피는 바닷물일 수 없다. <한수산. 타인의 얼굴>-22쪽

- 너 그 수산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냐?
- 할아버지가 지어주셨습니다.
- 너희 할아버지가 좀 무식했냐?
- 아, 아뇨.
- 거짓말 마, 임마. 얼마나 무식했으면 그렇게 쉬운 한자만 갖다 붙였겠냐.

<한수산. 타인의 얼굴>-24쪽

- 헤밍웨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상상력의 고갈이 술을 마시게 하지는 않지만, 지나친 술은 상상력에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런 얘기를 했거든요. <한수산. 타인의 얼굴>-29쪽

- 여기서 내려다보면, 이 건물 맨 밑이 응급실이고 그 옆이 영안실이야, 그게 보여. 여기가 칠층이니까 만약을 위해서 십층쯤 올라가서 거기서 뛰어내리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바로 그 앞이 응급실이고 옆은 영안실이니까, 순서대로 운반하기도 쉬울 테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도 그렇게 쓸쓸한 거야. <한수산. 타인의 얼굴>-32쪽

시간은 미래의 비밀을 자기 속에만 감춰두고 있는 것이다. <김영현. 우리 청춘의 푸른 옷>-84쪽

나의 불순한 의도를, 원컨대, 비난하라. <이승우. 야유>-270쪽

만약 들판에 돋아나 있는 풀이 울 수 있다면 그 눈물은 어디로 갈까. 그렇다, 풀이 울면 눈물은 뿌리에 고인다. <최수철. 뿌리에 고인 눈물>-324쪽

산 위에서는 부엉이가 울었다. 양식없다 부엉 걱정마라 부엉 꿔다먹지 부엉 가을에 갚게 부엉...... 부엉이는 꼭 그렇게 울었다. <한승원. 돌아온 사람들>-35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날개를 펼쳐든 후 본 김연수의 얼굴은, 솔직히 말하자면 '샌님' 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을 만나기 전, 글로 그를 먼저 만나니 그는 샌님이 아니라 '시인'이더라. 이 책 속 문장들엔 그의 청춘이 오롯이 들어있지만, 유년의 문장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성장기가 함축돼 있다. 본래, 좋은 글이 나오려면 깡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거나, 운동권으로 한시절을 풍미하거나, 편모나 편부 슬하에서 조부모 구박을 받으며 콩쥐 같은 사춘기를 보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반듯하게, 모나지 않게 살아온 김연수에게서 나온 문장은,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20대를 보내버린 나에겐 어떤 청춘의 문장이 남아있을지. 책을 덮은 후에도 한참을 더 생각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책장 앞을 서성거리며 이 책 저 책을 들었다 놨다 한다. 고마운 마음에 그의 다른 책들도 읽어볼 마음을 갖는다.

 

김연수에게 추천받은 책 몇 가지. 아무래도 한동안 헌책방을 들락거릴 듯하다.

-. 다자이 오사무의 딸 쓰시마 유코가 쓴 짧은 소설 <꿈의 노래>

-. '세상은 사흘 / 보지 못한 동안에 / 벚꽃이라네' ... <일본인의 시정 - 하이쿠편>

-. 김연수가 소설에 대한 견해를 공부했다는, 이안 와트의 <소설의 발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구판절판


집이 있어 아이들은 떠날 수 있고 어미새가 있어 어린 새들은 날갯짓을 배운다. 내가 바다를 건너는 수고를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건 아버지가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다.-31쪽

통영, 섬진강, 해남 등 지도에 실린 그 이름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무렵이면 그곳의 이름은 같아진다. 봄나라.-34쪽

그나마 삶이 마음에 드는 것은, 첫째 모든 것은 어쨌든 지나간다는 것, 둘째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34쪽

<일본인의 시정-하이쿠편>

'세상은 사흘 / 보지 못한 동안에 / 벚꽃이라네'-35쪽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60쪽

나는 밤을 사랑한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검은 얼굴을 지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눈들은 저마다 빛을 낸다. 그 빛 속 하나하나에 그대들이 있다. 외로운 그대들, 저마다 멀리 떨어진 불빛처럼 멀리서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그대 창으로 부는가, 그런 걱정이 든다. 하지만 그건 멀리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빛이다. 한때 우리는 너무나 가까웠으나, 그리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93쪽

당나라 시인 왕창련의 <부용루에서 신점을 보내다> 中

'낙양의 친구들이 안부를 물어보면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병에 간직했다고 하게.'-97쪽

승객이 거의 없는 밤의 시외버스고 대관령을 넘어가고 있어 귀가 멍멍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으나마 그 나이로서는 너무나 설득력이 넘치는 연애담을 들은 직후라면, 그 누가 부르든 김광석의 노래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한, 김광석이 부른 노래란 그런 노래다. 그의 노래에는 청춘의 결정적 순간에만 맛볼 수 있는 설득력이 있다.-135쪽

그러니까, 사랑이 막 끝났을 즈음이었다. 한 사람을 향해서만 쏟아지던 감정이 갈 곳을 잃고 마음속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채 처리하지 못한 감정이 넘쳐나게 되자, 자연스레 육체적인 활동은 정지됐다. 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드는 일도, 혹은 학교에 나가 수업을 듣는 일도 육체적으로 너무나 힘들어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136쪽

새 양말 한짝도 살 수 없는 처지라니!-143쪽

삶이 입 속의 혀 같은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힘들긴 해도 뒤집어보기도 할 텐데, 세상일이 그렇지는 않더라.-153쪽

다음날, 늦도록 잠을 자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먼저 깨어나 내 책을 뒤적이던 사내가 나보다 먼저 전화를 받았다. 전화 속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찾고 있었다. 사내는 내가 숨겨놓은 양주라도 찾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왜 아침부터 김연수 씨를 찾는 것이냐고 농을 걸었다. 하지만 여자는 완강하게 김연수 씨만을 찾았다. 그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더 완강하게 왜 아침부터 김연수 씨를 찾느냐고 되물었다. 아마, 그 사내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전화를 건 여자가 말했다. 여기는 출판사인데, 김연수 씨에게 전할 말이 있다. 실망한 표정으로 사내가 물었다. 출판사에서 왜 아침부터 김연수 씨를 찾느냐? 여자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누구냐? 사내가 말했다. 나는 장석남이다. 어머, 장석남 씨가 왜 거기 있어요? 저, 정은숙이에요. 둘은 마치 그날 아침에 전화하기로 했던 사람들인 양 한참 얘기했다. 그 다음에 내가 전화를 받았다. 그건 내가 시인으로 등단하게 됐다는 소식을 알리는 전화였다.

(김연수와 장석남에게 이런 인연이 있었다니...!!!!!)-170쪽

G.K. 체스터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 있다면.-191쪽

낑낑대며 얼어붙은 나무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노라면 1월 새벽 공기에서는 후추처럼 매운 냄새가 나면서 콧구멍이 들어붙었다.-2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군주론 - 바티칸의 금서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4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의외로 재미있는 통치 전략서. 원래는 한 사람만을 위해 쓴 글이지만 읽는 사람마다 재해석한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고전의 힘이다.

중학교 때부턴가 고등학교 때부턴가 무조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하며 달달 외우기만 했는데, 그 때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에 인생의 타이밍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나도 시노부처럼 "아뿔싸, 타이밍이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말이지, 타이밍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